빈손을 예찬함

주식에 투자해서 운 좋게 장님 문고리 잡듯 거금을 움켜쥔 사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뙈기가 투기꾼들 덕분에 폭등해 일확천금을 거머쥔 사람, 은근과 끈기를 자랑하는 한민족의 후예답게 끈질기게 구입한 복권이 당첨돼 양손에 돈벼락을 맞은 사람, 속임수가 잘 맞아떨어져 남의 돈이 내 돈 돼 시궁창 냄새 나는 사람 등등을 졸부 (猝富)라 일컫는다. 쉽게 말하면 졸지에 돈 꽤나 움켜쥔 사람을 뜻한다.

칼이 베고 지나간 졸부들의 삶의 안쪽의 무늬는 곧잘 탐욕과 무식과 무지로 얼룩져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일종의 특징이다. 졸부들이 가장 신뢰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돈과 법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변호사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의 머릿속에 든 것이 궁핍하다 보니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혼자 해결할 능력이 없다. 대화하고 타협하고 공존한다는 사회성에 뒤쳐져 있으니 당연히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거다. 그러니 문제가 발생하면 찾는 것이 법과 변호사일 뿐이다.

변호사는 벼락처럼 쏟아져 양손에 넘치는 돈 몇 푼 쥐어주면 제 입 속의 혀처럼 알아서 잘 처리해준다, 이러니 말로만 ‘이루어 지이다’라는 하나님보다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는 변호사가 윗길일 수밖에 없다. 문제 해결을 위임 받은 변호사는 자신의 생계에 은덕을 베푸는 졸부를 위하여 길게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여 졸부보다 더 흥분하며 경고장을 날린다.

2001년인가, 2002년인가 ‘재 뉴 대한체육회장’ 자리를 놓고 허명에 목숨 건 몇몇 인사들의 꼴사나운 싸움질이 벌어졌다. 나는 라디오방송으로 모 인사의 부적절한 처신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방송이 끝난 지 2~3시간쯤 됐을까? 변호사의 친서(?)가 화급히 날아들었다. 내용인즉 ‘오늘 모 시에 방송된 모 인사에 관련한 내용은 명예훼손에 해당되는 바, 즉시 정정 및 사과방송을 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하겠다’였다. 구체적인 논리도 없이 어린아이에게 눈 부라리며 겁주는 공갈협박 수준이었다. 같잖아서 대꾸도 하지 않았다.

2006년이던가, 2007년이던가 남섬을 여행하던 한국인 관광객을 태운 한국인이 운영하는 관광버스가 뒤집혀 젊은 여성의 팔이 잘리고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나는 방송으로 안전벨트를 단속하지 않은 가이드와 관광버스회사를 질타했다. 방송이 끝난 지 불과 10여분 만에 전화가 왔다. 시비조의 음성이었다. “조금 전 방송한 관광버스회산데요. 뉴질랜드 관광버스에는 원래 안전벨트가 설치돼있질 않습니다. 그러니 안전벨트에 관련된 언급에 대해 당장 사과방송을 하세요. 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합니다.” 전화 끊고 혼자 중얼거렸다. 덜 떨어진 자식! 법 우라지게 좋아하네.

목소리 높이고 얼굴 붉히며 언쟁을 하면서 지적하고, 사과하고, 화해하는 미덕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얼마나 법 좋아하고 경찰을 자주 부르면, 어느 교민단체장 선거에서 불법단체로서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대기 중이던 경찰관이 “너희 한국인들은 왜 툭하면 경찰을 부르냐?”고 짜증 섞인 질문을 했겠는가. 그 경찰관은 마음 속으로 이렇게 비웃었을 거다. ‘너희는 너희 문제를 너희끼리 해결할 능력도 없냐?’

말로는 한마음이니 화합이니 봉사니 떠드는, 돈 좀 가졌다는 인간일수록 제 맘대로 안되면 법적 조치 운운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지금도 여전히 내 기분에 맞지 않으면 법적 조치한다는 것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좀 넉넉하게 밥 먹고 산다는 인간들의 관성이다. 특히 그 무슨 명예훼손이라면서 경고장을 날리는 것을 보면 과연 그런 인간에게 존중 받을 명예라도 있는지 의문스럽다.

자칭 교민을 아우른다는 어느 한인회장이란 인간도 제 맘에 거스른다고 변호사 시켜 경고장을 날린다. 이런 판국이니 ‘졸부들의 변호사’가 보내는 경고장 친서는 결코 비난할 가치도 없는 그들만의 폭죽 놀이일 뿐이다.

어쨌든 아무렇거나, 나는 편안하다. 내가 혹여 어느 졸부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서서 설령 몇 백 만분의 일의 확률로 패소한다고 해도 나는 완전 빈손이다. 이러니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 더 있다. 빈손이다 보니 변호사를 찾아갈 일도 없다. 아, 빈손의 평온함이여!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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