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물 이야기

새 생명을 틔우는 과정은 자연의 조건뿐만이 아닌가 보다

9월의 햇살이 따뜻하다. 대지는 서둘러 씨앗을 틔웠고 바람은 꽃들을 다투어 피워낸다. 튜울립 축제가 열리는 보랄을 가볼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쇼핑센터에서 아기를 안고 지나가는 어느 부부에게 눈길이 갔다. 낯설지 않은 그들을 한 번 더 돌아보면서 고개가 갸우뚱!

 

01_필리핀인 ‘라울’이 아들의 첫 생일초대 카드를

오래 전이었다. 당시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직장동료였던 필리핀인 ‘라울’이 뜻밖에 아들의 첫 생일초대 카드를 주면서 참석여부를 물었다.

나는 곧바로 ‘린’을 떠올렸다. “물론 참석 할거야!” 나는 웃으며 라울을 쳐다보았지만 사실은 린을 다시 보고 싶었다. 짙은 눈썹에 오똑한 코와 가지런한 치아를 감춘 붉은 입술의 라울은 스물다섯 살, 회사에서 가장 나이 어린 보조기술자이지만 아들 ‘키스’가 있다.

아기는 전에 회사 주차장 차 안에서 엄마 린의 품에 안겨 있던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벌써 자라서 첫돌이 된 것이다.

그때 나는 갓난아기 키스보다 아기엄마 린을 보고 더 놀랬다. 이제까지 그렇게 하얀 동양여성은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를 닮은 린에 관한 이야기는 그 후로도 시도 때도 없이 직장에서 흘러 다녔지만 언어가 다른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만의 비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비밀이 드디어 뻥 터져버렸다. 돌잔치를 앞두고 린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 패가 갈려 크게 언쟁이 벌어진 것이다.

 

02_“키스는 라울 아들이야. 진짜는 아니지만…”

“린의 아기 생일에 안 간다니? 너무 한 것 아냐?”

“라울의 아기도 아닌데 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의아해 하는 내 표정을 보고 ‘릴리’가 내 손을 잡아 끌며 밖으로 데리고 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라시아 (그들은 나를 스페인어로 부른다)… 놀라지마! 키스는 라울 아들이야. 진짜는 아니지만….”

30여년 전, 린의 엄마는 호주인과 결혼해서 린의 오빠와 린을 낳았다고 했다. 아빠는 그녀가 어릴 때 집을 나갔고 오빠마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가자 린의 엄마는 병이 들어 린을 데리고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이다.

“필리핀에서 몇 년을 버티던 엄마는 결국 죽었고 린은 고아가 된 거야. 사람들은 말이야… 린이 너무 하얗기 때문에 아무도 린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어.”

“그라시아, 보았니? 린은 눈썹까지 하얗단다. 사람들은 린에게서 소독약 냄새가 난다고 해. 그래서 다들 린을 싫어하는 거야.”

 

03_그때 라울은 쇼크를 받았고 서둘러 호주로 왔다

그때 라울이 유일하게 린을 찾아가 위로를 해줬다고 한다. 그 후 린은 필리핀에서도 살수가 없어 오빠를 찾으려고 다시 고향인 호주로 돌아왔지만 오빠를 찾을 수 없었고 그때부터 린은 라울과 전화로 사랑을 키웠다는 것이다.

가족도 없이 혼자였던 린은 라울에게 호주로 와서 결혼도 하고 같이 살자고 간절히 불렀다고 한다.

릴리가 다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라울은 너무나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었어. 결혼했던 형이 죽어서 부모와 형수네 애들까지 모두 책임져야 했거든. 올 처지가 못 됐던 거야.”

“음… 그걸 몰랐던 린은 라울을 기다리다 원망을 했고 뜻밖에 임신을 한 거야. 날마다 무서워서 벌벌 떨며 살던 린을 도와준다고 드나들던 아저씨와 그렇게 되었나 봐. 린은 울면서 필리핀으로 가서 라울을 만나서 말했대. ‘나는 이제 임신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너마저 나를 버릴 것인지…’라고.”

그때 라울은 쇼크를 받았고 서둘러 호주로 왔다고 한다. 오자마자 린과 결혼했고 키스를 자기 아들로 입적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라울은 돈을 벌어서 필리핀으로 부쳐야 하는 처지라서 매일 여섯 시간을 잠자고 16시간을 일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린을 전보다 더 지독하게 미워하는 거야.”

 

04_그러나 결론은 봄이다. 또한 사랑이다

디와이 ‘정글짐’이라는 놀이센터에서 벌어진 키스의 첫돌 잔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통 돼지도 구워오고 음식도 풍성했고 축하 케익도 여러 사람들이 구워 와서 푸짐했다.

너도 나도 그들 부부와 아기 사진을 찍으려고 아우성이어서 포토타임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포토타임이 끝나자 누군가가 손을 들어 크게 기도를 시작한다.

“사랑으로 자라는 이 아기에게 부디 건강과 행복을 허락하시고. 어리고 여린 이 부부가 충분히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와 평화를 축복해주소서….”

알레르기가 심한 ‘로시타’가 내 옆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훔치고는 코를 핑 풀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던 나도 서둘러 린의 가족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늘 쇼팅센터에서 마주친 부부… 젊다 못해 어리다고 느껴졌던 그 부부가 라울과 린 그리고 키스로 오바랩 되었다는 먹먹함에 묵은 사진첩을 펼쳐보았다.

새 생명을 틔우는 과정은 자연의 조건뿐만이 아닌가 보다. 시련, 아픔, 길고 지루한 기다림과 불면의 시간들… 그러나 결론은 봄이다. 또한 사랑이다.

 

글 / 그라시아 (글벗세움 회원·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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