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대학시절, 군부독재에 항거하며 온갖 고초를 겪었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정계에 입문해 서울의 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습니다. 그는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지역구 포장마차에서 기자들과 종종 만나 민주주의와 민생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뒷구녁(?)으로는 정재계의 그렇고 그런 자들과 짝짜꿍이 돼 강남의 고급 룸살롱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와 함께 먹었던 돼지껍데기며 꼼장어, 쏘주를 모두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후 정치라면 너무너무 신물이 나서 투표 자체를 완전히 끊어버렸다가 혜성(?)처럼 나타난 그에게 한 표를 행사해 그가 우리동네 국회의원이 되는데 일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군부독재에 온몸으로 맞서 싸운 인권변호사로 유명했던 그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는 술에 떡(?)이 된 상태로 국정감사장에서 피감기관 장관에게 90도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였던 건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다행이(?) 위의 두 사람 모두 국회의원을 그리 오래 해먹지는 못했습니다. 지난날의 행적들을 보고 아낌 없는 성원과 지지를 보냈던 유권자들의 기대를 져버린 당연한 결과일 터입니다. 멀쩡했던 사람도 그 안에만 들어가면 이상해져 버리는 정치판은 그야말로 요지경 속인 듯싶습니다. 하긴, 어쩔 수 없는 패거리정치의 늪 속에서 자신의 소신을 펼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한참 혈기왕성하던 30대 시절,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 나라 정치판이 바로 서려면 65세가 넘은 정치하는 자들이 모두 없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당수가 사라지고 그 같은 말을 했던 30대들이 주축이 돼 이끌고 있는 지금의 한국 정치판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놈이 그 놈…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모습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권력을 잡은 자들’인 것입니다.

지난주 토요일, 하루 종일 추적추적 비도 내리고 기분도 꿀꿀해서 밖에도 나가지 않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문득 한 드라마에 눈이 갔습니다. 한국 정치판을 무대로 한 그 드라마는 처음엔 그저 그런가 보다 싶었는데 이내 심하게 몰입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열두 편을 한꺼번에 다 봤습니다. 전날 공개된 넷플릭스 (Netflix) 드라마 ‘돌풍’입니다.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사이의 대결을 그린…’이라는 설명이 붙은 이 드라마는 이른바 386 운동권 세대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정치판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설경구, 김희애, 김미숙, 박근형 등 걸출한 배우들이 선 굵은 연기를 펼쳤고 임세미, 전배수, 장 광, 김영민, 김홍파 등의 연기 또한 돋보였습니다. 타락한 진보세력들과 그를 바로 잡으려는 한 인물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실제 이 드라마는 진보와 보수를 향한 ‘돌려까기’ 혹은 ‘모두까기’를 동시에 시도하고 있습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 소속으로 대학시절에는 군부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쳐 투쟁한 동지였지만 정치판에 뛰어든 이후에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변해버립니다. 그들의 말대로 ‘괴물들과 맞서 싸우다 보니 어느새 그들도 그보다 더한 괴물이 돼버린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의 몸을 던져 끝내 불의를 응징하는 주인공의 “거짓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더 큰 거짓이다”라는 말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드라마 ‘돌풍’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이 셋의 전격적인 ‘야합’으로 기묘한 민주자유당 창당이 선언됐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8일 후 열린 통일민주당의 3당합당 결의 전당대회장에서 홀로 오른 팔을 치켜들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치다가 건장한 청년들에 의해 들려나가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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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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