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bucket)은 양동이, 리스트 (List)는 목록을 의미한다. 중세유럽에서 교수형을 시킬 때 양동이를 밟고 목에 밧줄을 걸었다. 그리고 딛고 있던 양동이를 걷어차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연유로 버킷리스트 (bucket list)는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것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가 됐다.
영국 버진그룹 ‘리차드 브렌슨’ 회장은 우주여행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상공 80.5Km 우주공간에서 3분동안 무중력상태를 경험하고 자신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이뤘다고 행복해했다고 한다. 억만장자의 버킷리스트답다. 많이 가진 사람의 버킷리스트는 그렇게 비례하는 것인가 보다. 하늘을 보면 생각이 많고 땅을 보면 마음이 복잡한 사람들에겐 꿈같은 얘기다.
무참한 이야기지만 나는 버킷리스트가 없다. 인생을 처음 살아봐서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굳이 고단한 생존의 나날들이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렸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건 더 큰 것을 꿈꾸지 못한 웅크린 자의 자기변명이라고 할 테니까.
어쨌거나 그건 내가 걸어온 길, 혹은 내 삶에 대한 확신의 부재였는지 모른다. 나의 서사는 내가 나무인지 숲인지 바다인지 몰랐다. 나는 내 인생의 정상에 무엇을 세워놓겠다는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프란츠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처럼 벌레 같다는 생각에 힘들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것들은 있었다. 기타를 배우고 싶었고, 비행술을 배우고 싶었고, 자전거여행을 하고 싶었다. 히말라야에 우뚝 솟은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마나슬루에 오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버킷리스트는 이루지 못하는 상상 속의 생각일 뿐이었다.
뜬금없게도 이만큼 늙어버리고 나서야 여행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배낭 하나 걸머지고 에뜨랑제 (Etrangere)가 되어 세상 속을 헤매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는 건 언제 어떻게 무슨 황당무계한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다. 많이 늦었지만 행운을 빌면서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본다.
꿈속에서라도 갈수만 있다면 꼭 가보고 싶은 세 곳이 있다. 그 하나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Jared Diamond)’가 저술한 <총, 균, 쇠>에 기술된 15세기 잉카제국문명의 흔적을 더듬어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지역을 돌아다니고 싶다. 가파른 산길을 돌고 돌아 산정상에 숨어있는 도시 마추픽추 (Machu Picchu)를 만나고 싶다.
마추픽추는 잉카제국 잉카인들이 구축했다는 높이 5미터 두께 1.8미터의 성벽으로 두텁게 싸여있는 요새도시이면서 스페인침략군 ‘피사로’에 쫓기던 잉카군이 마지막으로 피신했던 해발2400m 산상도시이기도 하다.
끝까지 뒤쫓아온 스페인침략군을 피해 노약자를 땅에 묻고 황급히 떠나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잉카제국문명의 비극의 도시 마추픽추에서 거적을 깔고 누워 밤하늘 무수한 잔 별들을 올려다볼 것이다. 인간사회의 운명을 바꾼 ‘총 균 쇠’의 현장에서 분노와 절망과 절멸을 마주하고 싶다.
그 둘이 중부유럽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북서쪽에 위치한 꽃의 도시 피렌체 (Firenze)다. 피렌체는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의 고향으로 불리기도 한다. 14-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혁신운동인 르네상스 (Renaissance)가 탄생한 곳이다.
중세의 암흑을 걷어내고 인문주의운동이 시작되면서 유럽 역사의 근대가 동트던 곳 피렌체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아름다움, 새로운 인간다움이 발견된 인문학의 고향이라고 일컬어진다.
단테, 미켈란젤로, 다빈치,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등이 피렌체에서 태어난 천재들이다. 피렌체에서 탄생한 수많은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인류에게 정신적 가치를 심어준 것이다. 이 영혼의 도시에 머물며 잠시라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나는 대체 무엇인지, 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부활을 품어보고 싶다.
그 마지막이 달라이라마의 나라 티벳이다. 티벳의 장례문화 천장 (天葬)을 만나보고 싶다. 천장은 시신이 잘 썩지 않는 티벳 고원의 기후와 메마른 토양 등 자연환경에 순응한 장례방식이다. 티벳인들은 새들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간다고 믿는다.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은 독수리를 타고 생명의 고향으로 향할 수 있게 하는 영생의식이다.
사람이 숨을 거두면 망자의 시신을 언덕 위에 올려놓고 천장을 주관하는 천장사가 시신을 분해해 독수리가 먹도록 널어놓으면 독수리 떼들이 시신을 먹어 치운다. 그 독수리 떼들과 마주보며 앉아있고 싶다.
사람은 죽어 진정한 의미의 한줌의 흙이 된다. 식물의 양분이 될 것이고, 빗물을 타고 강으로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 (布施)와 영생의 흐름이리라. 너무 많이 늦어버렸지만, 꿈속에서라도 그렇게 절멸과 부활과 영생을 만나보고 싶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버킷리스트도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꿈을 품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푸르른 청춘일 때 배낭을 꾸렸어야 했다는 것을. 나는 하루의 밧줄에 목을 매단 바보였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