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가 되고 기둥이 되어

새벽까지 비 바람이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하늘이 파랗게 웃고 있다. 봄을 부르는 새소리가 들린다. 잔디속에 숨어 있던 토끼풀도 물을 한껏 먹은 듯 통통한 잎을 자랑한다. 빨래줄에는 작은 물망울이 열매처럼 달려 있다. 강풍과 밤새 씨름한 그네는 새끼줄처럼 꼬여 있고, 부러진 가지는 물구나무로 서 있다.

텃밭의 깻잎은 흙물을 잔뜩 뒤집어 쓰고 누워있다. 작년에 떨어진 씨앗이 겨울도 가기 전에 드문드문 나온 깻잎이다. 어린 새싹이 옆으로 앞으로 치고 간 바람에 맥없이 쓰러진 것이다. 흙을 고르고, 깻잎을 다시 일으켜 모종을 했다. 서로 벽이 되어 쓰러지지 않도록 촘촘히 심었다. 무더기로 싹이 나온 애기 상추는 살짝 한 쪽으로 쏠려 있다. 빽빽이 붙어 있어 거센 바람을 피한 것 같다. 손가락 보다 더 작은 싹들이 서로 끌어안고 쓰러지지 않은 것이 대견하였다. 삽으로 조심이 떠서 햇빛이 중간쯤 드는 나무 밑에다 모종을 했다.

어린 목련나무도 건재하다. 양 옆의 형님 나무가 든든한 기둥이 되어 버틴 덕분이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듯이 초록 잎이 하늘거린다. 이 목련은 아는 지인이 갖다 주었다. 잎사귀 2개가 달린 조그만 나무였지만 이 삼 년 지나면 연보라색 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마땅한 자리를 찾다가 어른 키보다 더 큰 귤나무와 체리나무 중간 사이에 심었다. 올 봄에 가느다란 새 가지가 나오고 새 순이 나왔다. 흥분이 되어 남편을 불렀다. 그 후로 틈만 나면 눈인사를 한다.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살에도 아기 손바닥 만한 잎사귀가 제법 풍성하다.

나는 목련꽃을 좋아한다. 정원을 만들면서 사야 할 버킷리스트에 목련이 첫 번째였다. 크림색 꽃에 향기가 있는 목련 나무를 사다가 부엌 창문에서 잘 보이는 곳에 심었다. 홀로 우아함과 고고함을 맘껏 자랑하라고 넉넉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다음 해 봄, 새순이 움트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린다. 연 초록의 옷을 입고 제일 먼저 봄 인사를 하는 뽕나무, 물 오른 마디가 어린 처녀의 젖가슴 같이 볼록해진 목백일홍, 그런데 목련나무는 늦잠을 자는지 기척도 없다. 굵은 가지를 손톱으로 긁어 보았다. 속이 딱딱하고 말라 있다.   토양 탓을 하면서 다시 사다 심었다. 비료도 챙겨 주었고 물도 충분히 주었다.  웬일인지 다시 말라서 꽃은커녕 새싹도 보지 못했다. 장소를 옮겨 봤지만 세 번째도 실패, 목련과 나는 인연이 없다고 포기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정원의 식물과 비슷하다. 한쪽이 밀리면 받쳐주고, 기울면 일으켜주면서 더불어 산다. 눈을 서로 맞추면 너도 알고 나도 알아서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유아독존의 사람은 혼자 열심히 정상을 향해 돌진한다. 언제나 톱 (top)에 있을 줄 알지만 어디 인생사가 평탄하기만 할까? 폭풍이 부는 내리막길에서 비로서 손잡이가 없음을 안다.  스스로 만든 골짜기이다.

나의 이민초기에는 체감으로 느끼는 바람이 거세였다. 새로움이라는 것에 기대가 있었지만 붙잡을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어 불안하였다. 쉽게 나가지지 않는 언어의 벽에 일상이 가로 막혔다. 자유로움과 외로움의 무게가 저울질 되었다.  어깨를 대줄 사람이 그리웠다. 신앙의 공동체에 발걸음을 멈추고, 동문모임에 얼굴을 내밀면서 삶의 공유를 넓혀 나갔다. ‘내’ 가 아닌 ‘우리’ 속에 살다 보니 등을 빌려 줄 사람이 곁에 와 있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고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이 말은 중국의 장자가 한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랑해전’에서 병사들에게, 국론이 분열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호소한 말이다. 흩어져 나온 깻잎은 쓰러지고 뭉쳐 나온 상추는 살아남은 것처럼 모여 있으면 서로 방패가 되고 벽이 되어 살아 남는다.

고립이 고독사의 전조 (前兆)라고 한다. 실직이나 이혼, 질병으로 가족이 모여 살지 못하고 1인 가구가 되어 홀로 살게 된다. 가정에서도 고립되고 사회에서도 단절된다. 혼술, 혼밥, 혼행의 나홀로 문화가 새로운 사회현상이 되고, 개인주의 만연으로 사람은 더 고립된다. 고립은 고독사로 가는 지름길이다.

세 번의 목련나무 심기가 실패한 것은, 혼자서 견딜 수 없어 고독사 한 것이 아닐까?

 

 

글 / 이정순 (글무늬문학사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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