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형편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망스러웠죠. 그리고 몇 년 뒤에 다시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저보다 훨씬 앞서가는 예술가라는 걸 알았어요. 제 인생에 몇 번 안 되는 경이로운 경험이었죠.” 영화감독 우디 앨렌의 말이다.
01_지루한 영화?
상영 시간이 두 시간을 넘고 대기권 밖의 우주공간을 표현하기 위해서 영화는 아주 천천히 진행된다. 록 허드슨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아는 사람 있으면 설명 좀 해주세요!’라는 말을 던지며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부터도 10년도 전에 DVD를 사다 놓고 초반부에 진행되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훗날을 기약했던 영화다. ‘애석한 실패작’이라는 혹평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예산의 거의 스무 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는데 영화 평론가들은 20세기를 통틀어 아직도 이 영화를 능가하는 SF영화가 없다는 평을 내린다.
1965년에 제작에 들어가 인간이 달나라에 착륙하기도 전인 1968년에 영화가 첫 상영 됐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시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받았을 충격이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02_달에 간 적이 없다고?
영화계에서 천재적이었다는 수식어에 이어 완벽주의라는 평을 함께 들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2001을 보지 못하고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표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만들어진지 50년이 되었고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는 이 영화를 가장 과학적인 SF영화 1위로 선정했다.
그 정교한 장면 뒤에는 완벽을 추구하는 감독의 신들림이 있었다. 1969년 7월 16일 있었던 미국의 달 착륙이 미 항공우주국의 조작극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소련이 우주선 개발로 달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할지도 모른다는 미국인들의 두려움과 맞물려 NASA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을 설득했다는 소리다.
원작자 아서 클라크가 쓴 시나리오로 비밀 군사기지에서 달 착륙을 주도면밀 하게 촬영했다는 풍문인데 스탠리가 만든 영화 ‘오디세이’가 얼마나 정확하게 과학 기술에 근거했는지 증명해주는 좋은 예이다.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알렉스 노스라는 작곡가가 영화음악을 맡았지만 첫 시사회에 가서야 자신이 작곡한 곡이 영화에서 모조리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만큼 감독이 영화음악과 얼마나 씨름을 했는지 보여준다.
스탠리 감독은 니체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작곡했다는 R.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우리들이 잘 아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등으로 문명의 개화와 우주 시대의 발전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03_줄거리, 상상력 부재?
영화는 인류진화의 열쇠라고 여겨지는 검은 돌 ‘모노리스’를 등장시킨다. 정체불명의 외계인이 보낸 직사각형의 검은 돌 ‘모노리스’를 만날 때마다 지구인은 진화한다.
영화 전체에서 ‘모노리스’는 세 번 나타나는데 첫 번째 출현으로 인해 유인원들은 도구 (무기)를 사용하면서 다른 부족을 제압 (폭력)할 줄 알게 된다. 이런 시작이 몇몇 영화 평론가들에게 ‘형편없는 상상력의 부재’라는 평을 듣긴 했지만 유인원이 휘두르던 동물 뼈가 허공으로 던져지면서 우주 정거장으로 바뀌는 모습은 금세기에 가장 의미심장한 장면으로 회자된다.
유인원에게 나타났던 ‘모노리스’는 최첨단의 우주선을 타고 목성을 향하는 주인공 데이브에게 여전히 파악되지 않는 정체다. 이것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 예술의 덕목 중 하나라는 어느 비평가의 말대로라면 우주 어딘가 인간보다 훨씬 더 진화된 종이 있으리라는 가능성, 그리고 그들과의 접촉이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불편한 진실이겠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 HAL이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는 데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을 살해한다는 설정 또한 우리의 현실에서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삶에 편리하고 충직한 하인이지만 그들에게 얼마큼의 독자성을 허용해야 하는가?
컴퓨터의 메모리 칩을 빼 버림으로 HAL의 반란을 제압하고 데이브는 목성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육체적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가 다시 스타 차일드, 즉 어린아이로 탄생한다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제작진들 사이에서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영화는 실패작이다’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영화에서 풀어주려 했던 답보다 더 많은 질문이 관객들로부터 나와주길 바란다는 말로 해석해야 하겠다.
04_포비아
초등학교 시절 <소년 중앙>에 실린 천체사진을 보고 질겁을 한 적이 있다. 정확한 원인이나 이유 없이 어떤 대상에 대해 공포심을 느끼는 것을 포비아라고 하는데 내겐 그 어떤 사람들처럼 우주의 광활함이 웅장하고 황홀한 풍경이기 이전에 두려움이었다.
‘저렇게 깜깜하고 망망한 은하계에 홀로 떠다닌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그런 상황을 비슷하게 겪었던 적이 있다. 오래 전 인도네시아의 모요 아일랜드 (Moyo Island 에서 스쿠버 다이빙 수업을 받던 첫날이었다. 텔레비전의 한 장면처럼 수천 마리의 물고기 떼 흐름이 내 몸의 방향이 틀어질 때마다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광경엔 절로 탄성이 나오기도 했지만 물살로 인해 귀에 들리는 먹먹한 소음은 정체불명의 SF영화 속 장면처럼 긴장감을 조성했다. 그래서인지 잠수복 위에 산소통을 매달고 바닷속 어딘가를 헤집고 다니는 것이 내게 그다지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곳이 내 앞에 펼쳐졌다. 상상 속에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던 블랙홀처럼 바다의 시퍼렇게 짙은 해저 벽이 이루는 블루 홀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나를 당기고 있었다.
온몸을 엄습하는 두려움으로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산소마스크 때문에 극심하게 느껴지는 공포를 비명으로 쏟아낼 수도 없었다. 두 눈을 이겨질 듯이 감고도 붙박이장처럼 얼어붙어 있던 나를 누군가 물 위로 끌어 올렸다.
05_우주 안의 지구인
“우주에 우리만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 두 가지 다 끔찍한 일이다.” 미래학자이자 공상과학 소설의 거장이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원작자 아서 C 클라크의 한마디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대변한다.
SF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박상준 전문가에 의하면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SF 분야가 발달하지 않았다는데 공상과학은 통속문학이며 순수문학과 비교해봤을 때 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한국인들의 일반적 정서라고 한다.
그는 분야와 매체를 막론하고 조금이라도 많은 SF 작품들이 알려져야 하는 이유를 ‘시공간적 시야 확장’에 둔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만큼이나 사고의 전환도 함께 따라가야만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말이겠다.
오십 년 전에 컴퓨터 그래픽 도움 없이 만들어진 영화의 기술적 측면과 시각적 영상미에 많은 사람이 극찬을 아끼지 않지만 영화로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훌륭한 이유는 따로 있다고 한다.
지구인들이 우주 안에서 자기들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관찰하고 싶은 외계인이 있다면 꼭 권하고 싶은 영화라는 그의 말에는 이 영화에 인간 스스로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질문이 함축되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주인공이 목성 어딘가에 속한 방안에서 홀로 나이 들고 죽는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냈다.
06_원 웨이 티켓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달에 가고 싶은지 묻는다. 그 물음에 대다수 사람이 ‘물론이지!’라고 답한다. 내 친구는 외계인과 우주에 유독 관심이 많은데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현대의 과학기술로 화성에 갈 수는 있지만 돌아올 수 있는 기술은 아직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화성으로 가는 편도 티켓은 이미 매진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친구의 말이 과장됐다 하더라도 지구 밖으로 나가 보고 싶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2014년엔 버진 갤럭틱이 추진하던 민간인을 위한 우주여행 선이 실험 이륙 몇 분 만에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니 가까운 달나라도 아니고 화성까지 가려면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화성은 그렇다 치고 나는 아직 달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래도 광고나 포스터에 우주를 담은 다양한 이미지가 자주 등장해서인지 천체에 대한 두려움이 한결 덜해졌다. 내 어린 시절에 비해 놀랄 정도로 선명해지고 아름다운 태양계에 속한 지구와 은하계의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요즘은 천체 망원경으로 하늘 저 멀리까지 내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07_밤하늘
멜번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가면 메인 리지 (Main Ridge)라는 시골에 작은 시누이가 산다. 저녁에 하늘을 보고 큰 대 자로 누우면 대낮의 태양 빛으로 더워진 땅의 열기가 등에 따뜻하게 전해진다. 공기가 맑아서일까, 반짝이는 것들이 내 얼굴 위로 쏟아질 것 같다.
한동안 그렇게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구의 둥근 선이 느껴지고 밤하늘이 내 눈앞으로 넓게 퍼진다. 그때부터 내가 누워 있던 곳이 작아지면서 우주의 한 곳에 둥실 떠 있는 지구가 보이는 것 같다. 시누이 집에 가면 마당에 누워 내가 즐겨 하는 놀이다.
달이 손바닥에 들어올 것 같다. 몇 개가 있는지 숫자로는 나타내기 어렵다는 은하계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비교적 가깝다는 태양계 안에서도 유독 지구는 다른 행성들에 비해 그 크기가 보잘것없다.
그 작은 지구가 자기보다 더 자그마한 달까지 끼고 돈다. 몇 억 년 동안 태양처럼 뜨겁던 곳에 비가 내려 바다가 되고 생명체가 자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왜 하필이면 지구라는 곳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 독특함과 유별스러움이 날이 갈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인류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수많은 문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흥미로운 것을 고른다면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와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다.” 영국의 생물학자 토마스 헉슬리의 말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에서 볼 때 우리는 중요한 존재인가?’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글 / 박해선 (글벗세움 회원·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