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shomon
왜, 다양하고 불확실한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하는가를…
단체 카톡방에 글 모임 회원 몇 명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의 배경은 시드니 속의 명품이라는 라벤더 베이와 오페라하우스 맞은편에 있는 현대 미술관이었다. 회장이 총무를 포함한 세 명의 회원을 대동해서 나들이를 나간 모양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하고 예술 작품을 배경으로 넣었으니 보통 야외에서 찍은 단체사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01_진술 1
‘나중에 공동으로 책을 출판하면 이번 사진을 사용하고 싶다’는 사진을 찍은 회원의 메시지도 있었다. 하지만 함께하지 못한 회원들 심기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회장이 전체광고도 없이 몇 명만 데리고 야외촬영을 나갔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공식적인 책에 실릴 사진이라면서…. 즉시 ‘어떻게 된 일이냐?’는 의미의 문자가 카톡방에 다시 올라왔다.
그러나 ‘회원들 단체모임과는 전혀 상관없는 만남이었다’며 ‘즐겁고 유익한 하루였다’는 회장의 명랑한 답변이 되돌아 왔다. 이 사람들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02_진술 2
어느 날 사진작가는 글 모임의 회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찍어준 사진이 마음에 꼭 들었다며 점심을 하자고 한다. 변변치 않은 사진을 흡족해하는 사람이 있으니 즐겁고 고맙다.
서로가 바쁘니 기왕이면 점심보다는 야외에 나가 사진을 찍는데 모델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했다. 사진작가는 모임의 회장에게 전화해 나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예전부터 ‘사전답사를 해서 장소를 찾아 놓고 회원들과 함께 사진 찍을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오고 간 터였다.
팔이 부러져 한동안 거동이 불편했던 친구도 합류했다. 네 명이 서큘러 키에서 만났다. 좋은 사진은 빛과 배경, 그리고 그 속에 놓인 대상이 한 데 잘 어우러져야 한다.
그날이 그랬다. 들고 나간 카메라가 말썽을 부려 핸드폰으로 찍었는데도 ‘이 정도면 참 좋구나’라는 마음이 들 만큼 구도와 인물 표정이 미술관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잘 나온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야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을 남들에게 들이대는 일도 사실 쑥스러울 수 있다. 멍석은 누군가가 깔아주어야 하겠지 싶어 사진작가는 망설임 없이 덜컥 그날 찍은 사진 몇 장을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03_악당의 진술
비를 피하려고 라쇼몽 (나성문)이라는 허름한 성 아래에 승려와 나무꾼이 서 있다. 그들은 그날 있었던 기묘한 살인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둘의 이야기에 평민 한 사람도 끼어든다.
부인과 함께 라쇼몽을 지나가던 사무라이 한 명이 살해를 당한 사건이다. 최초의 목격자인 나무꾼이 관청에 신고했다. 지역에서 유명한 악당이 살인자로 지목되었고 죽은 사무라이의 아내가 나무꾼과 함께 법정에 섰다.
그리고 진술이 시작됐다. 악당은 여인의 남편을 보물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는 척하다가 함정에 빠트렸다고 진술한다. 남편을 묶어 놓고 강제로 여인을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저질렀던 행동이란다.
오히려 떠나려는 자신을 남편과 대결하도록 부추긴 것은 여자라고 말한다. ‘세상에 없는 치욕을 당했으니 어쩌면 좋겠냐?’며 우는 여인의 말에 악당은 묶여 있던 여인의 남편을 풀어주고 그와 공정한 대결을 벌여 남자를 죽였다고 했다. 그런데 여인이 없어져 버렸단다.
04_아내와 남편의 진술
아내의 진술이다. 그녀는 악당이 떠난 후 묶여 있던 남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런데 남편이 자기를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란다. 거기에 분노를 느껴 지니고 있던 단검으로 남편을 찔러 죽였다고 자백했다.
그 후 연못에 투신해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니 자신처럼 힘없고 가엾은 여자는 어떻게 하느냐고 하소연한다. 여기서 죽은 사무라이 또한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그도 영매의 힘을 빌려 살인사건을 진술한다.
악당이 자신의 아내에게 ‘사랑해서 저지른 짓이니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자기와 함께 살자’고 그녀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가 ‘남편이 살아있는 한 당신과 함께 떠날 수 없으니 남편을 죽여달라’고 요청했고 여자의 사악함에 진저리를 친 악당은 남편인 자기에게 여자를 죽일지 말지 결정하라고 했단다.
그러는 사이 자기 아내는 도망가고 악당이 그녀의 뒤를 쫓았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악당이 자기의 포승을 풀어주고 떠났는데 비참하기가 말할 수 없어 아내가 떨어뜨린 단도로 자살했으며 얼마 후 누군가가 단도를 자기 몸에서 빼갔다며 진술을 마친다. 이쯤 되면 영화를 보던 사람은 죽은 사무라이 말이 진실인 것 같다.
05_나무꾼의 진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 서 있던 나무꾼은 이 사건에 연루되기 싫어 관청에서는 말을 안 했을 뿐 세 사람의 진술은 모두 다 거짓이라며 자기가 보았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멀찌감치 떨어져 사건을 목격했다는 나무꾼의 증언이 시작되니 관객은 ‘드디어 진실이 밝혀지려나…’ 싶다. 나무꾼에 따르면 악당이 무릎을 꿇고 여인에게 자신의 아내가 되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는 자기가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겠느냐며 자기의 단검으로 남편의 묶인 줄을 자르고 두 남자 사이에서 서럽게 울었다.
악당은 여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결투를 벌여 그녀를 정정당당하게 얻으려 했지만 남편은 의외로 ‘이런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없다’며 여인에게 왜 자결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되자 악당도 여인을 향했던 애정이 급격히 식어버려 떠나려 했다고 한다. 그러자 여인이 남편에게 성이 나서 대들었다. “악당을 죽이고서야 내게 자결하라고 할 자격이 있는 거 아니냐?”
그리고 악당에게는 “너라면 일상의 지긋지긋한 삶에서 날 구해줄 거로 생각했는데 흥! 너도 내 남편처럼 별수 없구나”라고 했다. 이 말에 두 남자가 홀린 듯이 결투를 벌이고 악당이 남자를 죽인 사이 여인은 도망을 갔다는데….
06_진실이 있는가?
나무꾼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평민은 그의 말도 믿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한 하인의 말에 의하면 나무꾼은 사무라이 아내의 단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정적 증거가 되는 단검에 대해 증언하지 않았다.
그가 단도를 사무라이 몸에서 빼낸 것인지 아니면 떨어진 것을 주웠는지 또는 도적질한 것인지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상 그가 하는 증언은 진실의 여부를 판단하기에 무리가 있다.
그래도 진실을 알고 싶다는 관객의 욕구는 꺼지질 않는다. 진술의 초점이 각자의 영웅심과 수치심, 이기적인 마음이 합쳐져 상황을 과장하고 조작했나?
그러나 그들의 진술은 누가 들어도 본인들에게 불리한 증언이 섞여 있다. 이야기의 귀퉁이를 이렇게도 맞춰보고 저렇게도 대어 보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제야 관객은 감독의 의도가 진실을 파헤치고 살인범을 가려내는 일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07_해석의 가능성
학교에 탈장수술로 결석하겠다고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은 사람이 결석 사유를 맹장수술이라고 전했단다. 왜 그런 소리를 했느냐고 물으니 ‘탈장수술이라고 하면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가 이유였다.
어떤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말한 사람에겐 그 나름의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 의도 없이’ 무슨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삶에서 빈번하게 마주치는,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그 간단하지 않은 이유의 배경은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하다.
자그마한 초밥가게에서 일하던 아주머니 한 분은 최저임금을 더 낮추려고 한다며 여주인이 돈에 얼마나 지독한지 모른다는 불평을 한다. 그녀의 친정어머니까지도 ‘내 딸이 장사에 정신이 팔려서 건강도 안 챙기는 독종이다’라고 이야기했단다.
진실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종업원 입금에 빡빡한 여주인과 몸을 돌보지 않고 자기 일에 성심을 다하는 여주인의 모습이다. 연애 시절 남편과 결혼하려고 정성을 많이 쏟았다는 여자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여자가 남자보다 부족하다는 말로 듣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 정성을 들일만큼 좋은 신랑감이었다는 이야기로 들어준다.
어떤 사람을 말만 번드르르한 종교적 위선자로 해석할 수도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갈등하면서도 신앙인의 모범을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혼했으니 그의 삶이 절망스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찾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됐구나’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
08_진실의 입체성
‘라쇼몽’과 ‘덤불 속’이라는 짧은 단편소설 두 개를 합쳐 만든 이 영화는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 사자상을 받았다. 이 일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젊은 나이에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감독이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이 영화가 일본에서는 흥행에 실패했다고 한다. 일본 영화평론가들은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너무 산만하다는 혹평을 내렸다는데 ‘누가 남자를 죽였나,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의 여부를 따졌다면 나올 법한 말이다.
베니스영화제는 일본 영화계보다 한발 더 나아가 영화를 바라보았다. ‘왜 인물마다 진술이 다른가? 과연 진실을 규정할 수 있는가?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영화가 끝날 무렵 우레와 같은 울림이 마음을 친다.
진실이 보는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다르게 진술되는가. 누군가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우리네 인생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영화는 늘 옳고 그른 것으로 사태를 파악하려는 내게 왜 다양하고 불확실한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해준다.
글 / 박해선 (글벗세움 회원·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