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램

사각의 정글이라는 생존의 세계를 벗어나 우두커니 서있다. 더 이상 챙기고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들이 없다. 책임을 져야 할 일도 없다. 얘기할 사람도, 얘기 들어줄 사람도 없다. 뜨거운 김이 퍼져 오르는 국밥 한 그릇과 술 한잔 나누며 얘기하고 싶은 보고픈 형제들도 아득히 멀기만 하다. 홀로 남은 내가 이길 수 없는 몸서리쳐지는 고독만이 푸석해진 육신을 벌레처럼 파고든다.

잠시도 마음 편하게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온 억눌림에서 벗어나면 평온함이 두 팔로 감싸줄 것이라 믿었다. 거짓과 속임수로 풍요를 탐하지도 않았고, 헛된 명예를 위해 수작을 부린 적도 없기에 마음은 평화로움으로 가득 차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벼울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삶의 세월에 등 떠밀려 홀로 서있는 마음은 곤궁해지고 육신은 헛되다.

고개 돌려 뒤돌아본 삶은 지친 자의 신기루처럼 헛것이다. 배곯고 헐벗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세월들이 흉중 (胸中)에 물결을 일군다. 이민이란 걸 참으로 우연히 알고 잠깐 이 방황의 시간을 그렇게 견디면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를 그리워하며 다시 찾을 줄 알았다. 잠깐의 떠남인 줄 알았는데 너무 오래 멀리 와버렸다.

어찌 살아야 이제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을까? 숨 거두는 날까지 장난치지 않고 성실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스스로의 가치를 회복하는 길일까? 또한 스스로의 가치는 뭔가. 이런 진부하고 상투적이고 현학적인 말들이 내가 평생 살아온 길 위에 무슨 의미로 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외로우면 주위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하라고 한다. 어느 비교종교학 교수는 “소신도 없이 기웃거리다가 ‘파리끈끈이 같은 종교’에 빠져 몸도, 마음도, 돈도, 시간도, 가정도 다 잃어버리지 않을 확실한 자신만 있다면 종교에도 참여해보라”고 한다. 가서 ‘조직론’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종교활동에도 참여해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종교적 제국주의’에 빠져 온 세상 사람들을 자기들만의 종교로 채색하겠다고 광분하며 자신들만이 선이라는 지독한 아집과 독단에 빠져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들과 다름을 인정할 줄 모르는 집단 광기의 열병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그런 무리 속으로는 발 디딜 마음이 없다.

새도 가지를 가려 앉는다 (良禽擇木)는 옛말이 있다. 함부로 아무하고나 어울리지 말라는 교훈이다. 외롭다고 해서 아무하고나 어울리면 즐거움이 쏟아질까? 겸손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세상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잔머리 굴리는 것에는 천재성을 발휘하고, 자신만이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그런 비리고 역겨운 냄새 나는 무리들과는 차라리 홀로 외로울 지 언정 어울릴 마음이 없다.

사람은 자신만이 가진 취향과 특성이 있다. 누구든 관계치 않고 어울려 희희낙락을 즐기려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편안해 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들만 가까이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구 뒤섞여 있는 무리들은 외로움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더해주는 숙주일 뿐이다.

아무 가지에나 가리지 않고 내려 앉는 새도 있겠지만 가려서 내려 앉는 새도 있다는 말이다. 아무 곳에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고 난 뒤의 공허함은 스스로 견디기 힘든 허탈함일 뿐이다.

어느 기업의 광고문구처럼 세상에는 소중한 것들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이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자신을 불 태우는 불꽃이 되어야 하는 것들이 모두 소중한 것들이다. 이런 소중한 것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자신이 서있어야 할 곳을 잃어버렸을 때, 삶은 견디기 힘든 허탈과 고독을 몰고 온다.

고독이 나를 감쌀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홀로 앉아 청색도 적색도 아닌 색맹일 뿐인 내 고단했던 삶의 얘길 형체도 없는 그 누군가에게 중얼거린다. 실제로 그 누구든 내 얘길 조금만 들어준다면 나는 고독한 삶의 자리를 벗어나 세상을 수놓은 꿈의 오색무지개를 찾아 나설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의 삶이 어디까지 이를지 모르지만, 사는 그날까지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어 저 높은 곳을 향해 곧게 뻗은 자작나무처럼 서있고 싶다. 그런 내 삶의 얘길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줄 그 누군가를 찾아 길을 나서고 싶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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