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20대 시절, 한국에서 심야 라디오프로그램을 듣다가 단박에 반했던(?) 시가 한 편 있습니다. 충남 서산 출신인 이생진 시인은 어려서부터 바다와 섬을 좋아해 해마다 섬으로 여행을 다니며 한국 섬의 정경과 섬사람들의 애환을 시에 담아내 ‘섬 시인’ 혹은 ‘바다 시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196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그는 1996년에 ‘윤동주문학상’을 받았고 2002년에는 ‘상화시인상’을 수상했습니다. 1929년생이니 올해로 아흔다섯 살이 된 이생진 시인은 지금도 여전한 시작(詩作)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1978년 출간한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2001년 제주도 명예도민이 된 그의 작품에는 성산포를 주제로 한 시가 유독 많습니다. 그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생진 시인의 시는 ‘술에 취한 바다’입니다. 성산포에서는 / 남자가 여자보다 / 여자가 남자보다 / 바다에 가깝다 / 나는 내 말만 하고 / 바다는 제 말만 하며 / 술은 내가 마시는데 /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 성산포에서는 / 바다가 술에 / 더 약하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는’ 모습은 아직 한번도 못 봤지만 끝이 안보이게 이어져 있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속세(?)에서 가졌던 이런 생각과 저런 고민들을 훌훌 털어낼 수 있어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천차만별의 바다색깔, 가까이 다가오면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향연은 답답했던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들어줍니다.

가깝게 보이지만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닐 듯싶은 조금 먼 바다에는 작은 배 몇 척이 군데군데 떠있습니다. 아마도 낚시를 즐기는 배들인 것 같은데 저렇게 멀고 깊은 바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면 커다란 물고기들을 제법 많이 만날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파도가 좋아 열댓 명의 서퍼들이 서핑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고 저 만치에서는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한 데 몰려 열심히 파도타기를 하며 괴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문득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꼬마녀석 두 명이 열심히 모래 탑 쌓기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녀석들이 점보사이즈 플라스틱 컵을 이용해 수십 개의 모래 탑을 쌓아놓고 흐뭇해 하고 있는데 심술궂은 파도가 슬며시 다가와 모래 탑 여러 개를 부숴놓고 달아납니다. 다섯 살쯤 돼 보이는 동생이 도망치는 파도를 쫓아가 발길질을 하자 일곱 살쯤 된 형이 얼른 달려가 동생의 손을 잡고 이끌어옵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합니다.

호주의 바다는 어디를 가나 아름답지만 최근 들어 우리는 커드미라 비치 (Cudmirrah Beach)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시드니에서 남쪽으로 세 시간 거리이니 결코 가깝지는 않은 곳이지만 아내와 저는 가끔 혹은 문득 그곳을 찾곤 합니다. 워낙 바다와 여행과 운전을 좋아하는 터라 근처의 가격 착한 캐러밴 파크에 우리의 임시둥지(?)를 틀고 3박 4일을 지내는 겁니다.

2주 전에도 아내와 저는 그야말로 ‘그냥’ 그곳을 찾았습니다. 집에서 먹던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둘이서 지내기에 딱 좋은 원룸 캐빈을 얻어 둘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커드미라 비치를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바다가 아름답고 좋아서라는 점도 있지만 편안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비치에 낚싯대를 꽂아놓고 의자에 앉아 녀석들이 달려들 때까지 넋을 놓은(?) 채로 ‘바다 멍’을 즐기기도 하고 여유롭게 해변을 거닐기도 합니다. 가끔씩은 낚싯대를 붙들고 물고기들과의 ‘입질 밀땅’도 합니다. 고맙게도 커드미라 비치에서는 꽝 치는 일 없이 최소 한 마리는 개런티(?)가 된다는 점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메리트로 작용합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잡히는 연어 (Australian Salmon)는 덩치는 다른 지역 녀석들보다 다소 작지만 회로 먹으면 쫄깃쫄깃 맛이 아주 좋습니다.

이번 여행도 우리에게는 고마운 바다 덕분에 만족도 100퍼센트였습니다. 특히 돌아오는 길에 봄보 비치 (Bombo Beach)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끓여먹었던 라면은 이번 여행의 멋진 피날레였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아내와 저는 라면 두 개에 찬밥까지 말아서 돼지처럼(?) 먹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즐거움을 잊지 못해 조만간 또 다시 바다를 찾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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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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