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최고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
거대한 캔버스, 사각의 색면 안에 자신의 감정 실어 전달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1903년-1970년) 는 색면으로 이루어진 독창적인 작품세계로 이 시대 최고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꼽힌다. 그는 거대한 캔버스에 단순하면서도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사각의 색면 안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 관객에게 전달한다.
01_영혼의 화가로 불리는 그는…
오로지 사각의 색면만이 캔버스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어떤 현실적인 이미지나 추상적인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제목마저도 붙이기를 거부한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색의 덩어리들은 그저 자신의 의식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순수한 감정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색은 더 이상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색 자체가 주는 신비한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영혼의 화가로 불리는 그는 “나는 비극, 황홀경, 운명같이 근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느낀 똑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라며 자신의 작품이 단순한 미술작품을 넘어 영혼의 대화를 하고 감동을 공유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를 원했다.
02_막스 웨버 통해 유럽 현대회화 배우며
로스코는1903년 러시아 드빈스크에서 유대계 러시안인 야곱 로스코비치의 4자녀중 막내로 내어났다. 1913년 그의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이주해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정착했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그는 예일대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졌으나 2학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막스웨버 밑에서 회화수업을 들었다.
막스 웨버를 통해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등 유럽의 현대회화를 배우며, 그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한 사람의 무명화가에 불과했던 그는 생계를 위해 브루클린의 유대인센터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그는 밀턴 에이버리와 아돌프 고틀리브라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또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이디스 사샤와 결혼했다.
1933년 오리건 주 포틀랜드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1935년에는 그와 뜻이 맞는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립미술가협회 ‘더 텐’을 만들어 1940년 해체될 때까지 그들과만 전시를 하였다. 193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1940년 마르코스 로스코비치에서 미국식 이름인 마크 로스코로 개명을 해 그 이름만을 사용하였다.
03_사실화에서 벗어나 초현실주의 화법으로
평범한 수채화나 풍경화를 그리던 그는 이 때부터 자신의 색을 가진 화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37년작 ‘지하철 (무제)’와 1938년작 ‘지하철 입구’ 그리고 1940년작 ‘지하철 판타지’는 모두 뉴욕의 지하철 모습과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연작이다.
그의 작품의 특징인 가로와 세로의 선들과 단색들이 화면을 분할하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 기형적으로 길쭉하게 그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을 겪은 그들은 모두 앙상하게 말라 타인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서로를 보지 않고 각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마치 지하세계의 유령과도 같은 그들은 무력감에 젖어 우두커니 서있다. 소통의 부재와 빈곤이 주는 피폐함, 상대에 대한 무관심과 군중 속의 고독이 화면 전체에 깔려있는 것 같다.
이후 로스코는 사실화에서 벗어나 초현실주의의 화법으로 고대신화나 정신적이고 감정을 표현하는 작품을 그렸다. 1942년작 ‘새들의 계층’은 신화에 기반한 작품으로, 여신 네이처가 암 독수리의 짝을 찾는 캔터베리 이야기 중 새들의 의회 장면을 초현실적인 기법을 사용해 그린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1944년작 ‘바닷가의 느린 여울’은 자신과 그의 두 번째 아내 메리 엘렌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나란히 있는 유기적인 형태의 춤추는 듯한 모습은 열정과 행복감에 취해있는 것 같이 보인다.
04_‘멀티폼’ 양식이라 불리며 독특한 표현양식으로 자리매김
로스코는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전통적인 미술방식으로 화가의 고뇌와 희망을 담아내기 어렵기 때문에, 혼란한 현대에서 느끼는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언어를 담아내기 위해 로스코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에서 벗어나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배제하고 추상화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보통의 경우 캔버스에 색이 잘 묻도록 젯소로 밑칠을 한 다음 그림을 그리는데 그는 직접 캔버스 천에 붓이나 스펀지로 물감을 칠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켄버스천이 물감을 흡수해 물감이 스며드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며 농담을 표현하는 동양화의 수법과도 비슷한 것 같다.
묽은 농도의 물감을 수 차례에 걸쳐 덧칠을 하며 얻어지는 텍스처는 오묘한 농담으로 깊이와 몽환적인 효과를 보여준다. 한번 칠할 때마다 나타나는 붓터치는 수많은 반복을 통해 일렁이며 단순한 색면이 가질 수 없는 신비로운 움직임을 보여주어 우리로 하여금 그 색의 바다로 빠져들게 한다.
이러한 작업방식으로 태어난 그의 작품들은 ‘멀티폼’ 양식이라 불리며 로스코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1940년대 후반 시작된 이 멀티폼 시리즈는 대형 캔버스에 여러 가지 색들이 어우러져 자유로운 형태로 얽히며 감정의 순수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색면 회화의 모태가 되는 작품들이다.
05_내면의 감정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의 역할 하기를
1950년대 이후의 그의 작품은 대부분 거대한 캔버스 위에 두세 가지의 색면을 다양하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1950년작 ‘백색 센터’는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820억원에 낙찰되었다. 전후 동시대 현대미술 작품 중 최고가였다.
록펠러 회장이 1960년에 10000불이 채 못 되는 가격에 사들여 45년간 그의 사무실에 걸어 놓았던 애장품이라는 사실이 경매가를 부추겼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의 균형 잡힌 아름다운 색의 배열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애호가들의 주머니를 열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장미빛 바탕의 넓은 화면 위에 위에는 노랑이, 밑부분엔 라벤더가 넓은 면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중앙의 흰색이 이 두 색의 완충역할을 하며 동시에 두 색깔의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노랑과 흰색 사이의 가느다란 짙은 색선은 이 밝기 그지없는 화면에 어떤 깊이를 주고 있다. 마치 우리의 밝고 행복한 감정 사이에 숨어있는 어두운 일면 같이….
로스코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단순히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가 빨강이나 노랑, 그린, 훅은 검정 등 색을 배열할 때 어떤 미학적인 관점에서 그 색을 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그린 색면 하나하나가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영혼의 칼라가 되기를,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의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06_자신의 작품 감상할 때 45cm 거리서 보라고 권유
로스코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색이 살아있다는 느낌은 수없이 반복된 붓질 하나하나가 겹겹이 쌓여 있는 질감과 밀도, 그러면서도 투명하게 빛나는 선명함에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에는 다른 색면화가들의 작품이나 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이가 있어 하나의 색면이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는 듯하다.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때 45cm 거리에서 작품을 보라고 권유한다. 대부분 대작인 그의 작품을 그 거리에서 보면 관객은 자연스레 자신을 압도하는 색면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는 관객이 그의 작품에 본질적으로 다가와 작품에 표현된 것을 직접 느껴보고 체험하기를 원했다. 그럼으로써 더욱 깊이 자신과 소통할 수 있기를… 자신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수많은 레이어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질감과 미묘한 색의 변화가 주는 투명성을 몸으로 느껴 인간의 기본감정인 희로애락의 감정과 그들이 주는 의미 속에 몰입되기를 원했다.
07_넓은 색면은 하나의 세계가 돼 우리에게 다가오고
1953년작 ‘초록과 적갈색’은 로스코의 대표작중 하나로, 윗부분의 진한 녹색의 색면과 아래쪽의 적갈색 색면으로 나뉘어져 있고, 가느다란 청색의 선이 두 색을 둘러싸고 있는 그림이다. 색면들은 색채의 농담이 드러나 그 안에서 입체감을 느끼게 하고, 그러한 얼룩은 마치 우리 마음의 상흔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1956년에 그려진 ‘노랑과 오렌지’는 밝은 갈색 바탕에 노랑색과 주황색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 이 강렬한 원색의 조합은 우리에게 한껏 고양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색면은 더욱 절제된 형태로 그려졌고, 노랑과 오렌지는 어둠 속에 떠다니는 빛과 같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의 그림에서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각각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그의 거대한 색면 앞에 서있으면 이 넓은 색면은 하나의 세계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그 속에서 속삭이는 수많은 감정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내면에 눌려있던 모든 감정들이 저절로 표면으로 떠올라, 따스하게 품어주는 오렌지빛 하늘을 유영하며 하염없이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08_불안과 흔들리는 정신은 점점 어두워지는 작품의 색깔로
로스코는1958년 맨허튼의 고급 레스토랑 ‘훠 시즌스’에서 레스토랑의 벽면에 걸 작품을 의뢰 받았다. 그는 갈색과 주황, 검정이 주조를 이루는 경건하고 영성이 가득한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작품이 끝나갈 무렵 레스토랑을 방문했던 로스코는 실망감에 휩싸였다.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부유한 손님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물질과 쾌락이 우선인 장소였고, 그의 작품은 전혀 그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그곳에 있는 식기나 화병 속의 꽃과 같이 들러리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분노해, 당장 계약금 35000불이라는 거금을 물어주고 계약을 파기했다. 이 사건은 그가 자신의 예술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나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로스코는 1961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을 열었다. 그러나1960년대에 이르러 완전히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올라 부와 명예를 거머쥔 로스코는 점차 정체성의 딜레머에 빠지고 말았다. 거액의 계약금을 돌려줄 정도로 자신의 작품이 기득권의 노리개가 되는 것을 거부했던 가난한 화가의 고결한 예술혼은 쏟아지는 사람들의 환호에 움츠러들고, 자신이 혹시 그토록 비난했던 그들과 같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의 불안과 흔들리는 정신은 검정과 갈색, 어두운 블루와 같이 점점 어두워지는 작품의 색깔로 나타났다.
09_로스코 작품 앞에서 내면 상처 치유 받고 영적인 교류를
미국 택사스주 휴스톤에 위치한 ‘로스코 채플’은 로스코의 후원자인 텍사스의 석유왕 메닐 부부에 의해 세워진 예배당인데, 예배실은 오로지 마크 로스코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고, 요가, 명상, 음악으로 소통하며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되는 평화롭고 신성한 분위기의 채플이다.
로스코 채플 메인 홀에는 위에서 내려오는 자연광에 의해 변화하는 빛이 벽면의 거대한 검은 캔버스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캔버스 안의 검은 색은 자신을 비추는 빛의 양에 따라 속에 머금은 갈색이나 청색, 붉은 빛, 보라빛 등 오묘한 색을 언뜻언뜻 내보여, 마치 수많은 인간의 감정들이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인다. 사람들은 이러한 작품을 마주하고 앉아, 그가 내보인 감정과 스스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과 공명하며 명상에 잠기게 된다.
예술의 본질이 사람들을 치유하는데 있다고 믿은 그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그린 14점의 검은 작품들뿐만 아니라, 이 채플의 전체적인 컨셉과 디자인을 구상하며 수년에 걸쳐 그의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 채플은 로스코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인 1971년 완공되자 그의 이름을 기려 ‘로스코 채플’로 명명되었다. 영성과 예술, 인권을 중심으로 하며 감동과 치유가 함께 하는 이곳에는 달라이 라마, 넬슨 만델라, 지미 카터등 여러 영적 지도자들이 방문하였고,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내면의 상처를 치유 받고 영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
10_우리에게 스스로르 들여다보게 만든 위대한 예술혼
로스코는 1968년부터 대동맥류로 고통 받으며 약물에 의존해 살아야 했고, 힘든 작업도 할 수 없어 종이에다 작품을 그려가며 지냈다. 더구나 대중들은 이제 새로운 예술을 찾아 팝아트의 세계에 심취하여 그를 고리타분한 엘리트 예술가로 치부했다. 이런 모든 상황들은 그의 정신을 흔들었는데, 설상가상으로 2번째 아내 메리 엘렌마저도 그의 곁을 떠나 버렸다. 결국 로스코는 1970년 그의 스튜디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 ‘무제 (회색 위의 검정)’은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이 죽음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 대로 그의 죽음에 대한 사상이 표현된 것 같다. 색을 잃은 황량한 회색빛 벌판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하늘. 겹겹이 싸여 이룬 반투명한 검정색은 많은 것을 간직한 것 같이 일렁이며 관조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다.
이제 그가 죽은 지 54년이 지났다. 2000년대에 이르러 그의 작품들은 재조명을 받고, 많은 작품들이 수백억을 호가하며 가장 비싼 현대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회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수많은 예술 이념들이 나타났지만 결국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영원한 것이리라. 인간의 감정을 그리며 우리에게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 그의 위대한 예술혼에 찬사를 보내며,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 ‘마크 로스코와 나 2’에 나오는 시 귀로 끝을 맺는다.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중략)
스며 오는 것
번져 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 다음은 팝 아트의 거장 리히텐슈타인과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