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유의 미술칼럼 (71) 3대 천재화가로 불리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3대 천재화가로 불리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대담한 구성, 자연스런 인물묘사, 강렬한 빛과 어둠 대조로 바로크미술 창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3대 천재화가로 불리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년-1610년)는 바로크미술을 창시한 이탈리아 화가이다. 그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대담한 구성과 자연스러운 인물의 묘사, 강렬한 빛과 어둠의 대조로 바로크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사조를 개척하였다.

 

01_폭발적 화풍으로 이탈리아 미술계 강타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10년, 유화

그는 종교적인 주제를 이상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주의 경향을 벗어나 사실에 입각한 그림을 그렸고,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의 인물들을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작품의 사실성을 높였다. 17세기초 그가 확립한 이 조형언어는 이후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이룩한 바로크 미술이라는 거대한 미술 흐름의 원천이 되었다.

39살의 나이로 요절한 카라바조는 1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폭발적인 화풍으로 이탈리아 미술계를 강타했다. 뿐만 아니라 후세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너무도 커서 바로크 화가뿐만 아니라 현대화가에 이르기까지, 4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화가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고 연구를 하며 자신들의 스타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를 주제로 해 여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을 정도로 그의 작품세계는 여러 예술부문에 영향을 끼쳤다.

 

02_시모네 페테르자노 공방에서 4년간 도제생활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 1594년경, 유화

1571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카라바조의 훌네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이다. 메리시 가문의 미켈란젤로라는 그의 이름이 르네상스의 대가 미켈란젤로와 같아, 사람들이 구분하기 위해 부모의 고향 이름인 카라바조로 부르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밀라노 동쪽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 카라바조 출신으로, 아버지는 실내장식 및 건축을 총괄하는 건축가이자 카라바조 후작의 집사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역시 유명한 측량사로 두 집안은 모두 이름있는 중산층 계급이어서 카라바조는 부족함 없는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독실한 카톨릭이었던 집안의 영향으로 그는 태어나자 마자 밀라노의 산토 스테파노 마조레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밀라노의 귀족 프란체스코 세가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전 유럽을 공포에 휩싸이게 한 페스트가 밀라노에 퍼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카라바조로 피난을 갔으나, 그의 아버지, 막내동생, 외할아버지까지 모두 병마에 목숨을 잃었다. 1584년 가장을 잃은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밀라노로 돌아오고, 카라바조는 13살의 나이로 당대 미술의 거장인 티치아노의 제자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공방에 들어가 4년간의 도제 생활을 하며 그림을 배웠다.

19세에 어머니 마저 돌아가시고 방황을 하던 그는 여러 번의 싸움과 기물 파손, 경찰관 폭행 등으로 밀라노에 있기 힘들게 되자, 21살이 되던 해 예술의 중심인 로마로 도피성 이주를 하게 되었다.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카발리에 다르피노의 공방에 들어가 유명한 화가들의 화풍을 모방해 꽃과 과일 등의 정물을 많이 그렸는데 그는 뛰어난 묘사력으로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내었다.

 

03_스스로 공방 만들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림 그리기 시작

매장 1603년, 유화

1594년 다르피노의 공방에서 떠난 카라바조는 스스로 공방을 만들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그려진 ‘병든 바커스’는 그 묘사력과 특이한 주제로 그의 정신세계를 비추는 것 같다. 당시에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묘사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 표현된 박커스는 병든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해 그렸다는 해설이 있는 만큼 자화상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소년은 우람한 어깨 근육을 앞으로 보이며 옆으로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앞으로 틀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 근육의 묘사와는 상반되게 그의 포즈와 포도를 든 손은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어두운 배경에 두드러지게 표현된 인체의 묘사력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해 20대 초반의 젊은 화가가 그렸다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다.

그러나 이 그림의 압권은 얼굴의 표정인 것 같다. 입매는 웃고 있으나 눈매는 서글픈 상반된 감정이 한 얼굴에서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동안 로마에서의 그의 신세는 고달파 가난과 병이 그를 괴롭혔는데, 말라리아에 걸려 6개월이나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포도와 박커스의 창백하고 힘없는 입술의 대조는 풍요로운 로마의 한가운데 서있는 자신의 병든 모습을 투영한 것 같기도 하다.

 

04_호기심으로 물든 청년 얼굴이 선과 악, 빛과 그림자 등식 설명

메두사 1598년경, 유화

그의 초기 작품인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이나 이후에 그려진 또 다른 ‘박커스’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정교한 과일의 묘사가 돋보이는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에서 소년의 표정은 약간은 풀어진 듯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과일들과 어우러져 그 시대의 남성성과는 좀 거리가 있는 듯한 느낌으로, 그저 과일이 주는 풍요로움에 만족하는 단순한 기쁨을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포도송이와 잎을 머리에 달고 약간은 취한 듯 홍조를 띠고 있는 박커스의 얼굴 역시 성의 구분이 모호해 건장한 어깨와 팔뚝 근육과는 괴리감을 주고 있다. 이 세 작품에서 보이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혼재는 우리에게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만, 젊은 카라바조의 탁월한 묘사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점쟁이’ (1594년-1595년)는 전형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시작점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한 빛이 인물들을 비추고 있어 주인공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기존과는 다른 카라바조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흰 옷을 입은 점보는 여인이 잘 차려 입은 부유한 청년의 손을 잡고 손금을 보는 척하며 그의 반지를 살살 벗겨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그가 오가며 보아왔던 로마의 흔한 거리의 풍경을 묘사한 것 같다.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은 여인의 하얀 터번과 흰 블라우스의 왼쪽 부분과 손등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청년의 얼굴과 몸통 역시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다. 어두운 색으로 칠해진 여인의 얼굴과 희게 빛나는 남자의 얼굴, 눈치를 보는 듯한 여인의 시선과 순진하게 호기심으로 물든 청년의 얼굴이 선과 악, 빛과 그림자라는 등식을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05_페르디난드1세 데 메디치에 선물, 명성 더해

병든 박커스 1596년경, 유화

불만에 가득 차 술을 마시며 거친 생활을 하던 이 젊은 화가에도 드디어 행운의 빛이 드리웠다. 그의 작품에 큰 관심을 보였던 델 몬테 추기경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게 된 것이다. 델 몬테는 기꺼이 그의 스폰서가 되어 그를 지인들에게 소개하고, 40점이 넘는 작품들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카라바조는 1598년 델 몬테의 의뢰로 의식용 방패를 제작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얼굴을 보면 돌이 되어 죽는다는 메두사를 거울이 달린 방패를 이용해 죽인 영웅 페르세우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둥근 방패를 만들어 메두사의 머리를 중앙에 그려 넣었다. 괴로움에 울부짖는 메두사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방패의 볼록한 부분을 반대로 오목하게 만들어 메두사의 얼굴을 튀어나오게 만든 획기적인 기법으로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 생생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 방패를 드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페르세우스라는 영웅이 되는 구조로, 추기경이 1601년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드1세 데 메디치에게 선물해, 이를 계기로 카라바조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06_마치 연극무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성 마태의 영감 1602년, 유화

카라바조는 이제 추기경의 눈에 들어 가난을 벗어나고 상류층 젊은이들과 어울리기도 하는 등 생활이 나아졌지만, 술마시고 싸우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아 재판정을 들락거리곤 했다. 그의 폭력적인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1599년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내는 유디트’일 것이다. 고국을 침공한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목을 벤 유디트라는 여인의 이야기는 성서 속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주제로 그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매혹된 많은 화가들이 즐겨 작품으로 옮겼다.

이 작품에서 한 손으로 적장의 머리채를 잡고 칼로 목을 베어내는 여인의 표정은 우악스럽게 뻗은 팔의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이 살해하고 있는 대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안으로 갈무리한 분노와 고통, 혐오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공포에 휩싸인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고 있는 피해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동정심을 느끼게 하기에는 너무나 추악하게 보인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를 떠나 이 안에는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숨겨진 화가의 내면이 표현된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중앙의 여인과 피해자의 표정에 집중된 빛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 마치 연극무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07_“자연을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1601년, 유화

로마에 위치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콘타렐리 예배당의 제단화는 성 마태를 주제로 한 3점의 작품으로 카라바조의 예술혼이 활짝 핀 명작이다. 이 제단화는 원래 당시 유명했던 화가 주세페 체사리에게 의뢰된 것이었으나 자금난으로 그가 빠지자, 제단화 장식을 총괄하던 델 몬테 추기경이 카라바조에게 3면의 제단벽 중 좌우 양쪽 날개를 의뢰하였다.

카라바조는 ‘성 마태의 순교’와 ‘성 마태의 소명’이라는 두 작품을 완성했다.

그런데 중앙의 제단을 장식할 대리석 조각이 작품의 질이 떨어져 리젝트 당하자, 추기경의 부탁으로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카라바조는 성 마태와 천사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마태가 천사의 도움을 받아 성서를 집필하는 장면인데, 화가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마태의 모습을 낡고 해진 옷을 입고 발도 더러운 세파에 시달린 노인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마태를 신성화 시키기보다 우리 곁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웃의 모습으로 그렸다. “자연을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그의 말처럼 사실주의에 입각한 그의 그림은 거의 신성모독으로 여겨져 교회 관계자들은 그의 작품을 반품시켰다.

 

08_붉은 원색이 조화롭게 다른 색들과 어우러져 생동감 더해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1602년, 유화

자존심이 상했지만 카라바조는 교회의 뜻과 자신의 신념을 적당히 버무려 ‘성 마태의 영감’을 완성시켰다. 몇달 안 남은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 혼신의 힘을 짜낸 이 작품은 희대의 걸작으로 태어나 카라바조의 대표작이 되었다.

제단의 좌우에 위치한 ‘성 마태의 순교’와 ‘성 마태의 소명’이 여러 명의 인물들로 구성된 데 반해, 이 작품은 오로지 마태와 천사라는 두 존재가 화면을 꽉 채우고 있어 더욱 웅장하게 느껴진다. 검은 배경에 뚜렷이 떠오르는 두 인물의 형체는 위와 아래,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완벽한 구도 안에서 신비롭게 빛나고 있다.

1602년에 완성된 ‘엠마우스에서의 만찬’은 성화라기보다 평범한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와도 같이 보인다. 신화나 종교의 대상을 미화시키지 않고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의 군상들처럼 표현한, 그 시대로서는 혁신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는 자신이 예수라 밝히지 않고 함께 길을 걸으며 저녁식사를 하게 된다. 예수가 한 손에 빵을 들고 오른손을 들어 감사기도를 할 때 손바닥의 성흔을 본 제자들이 놀라는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오른쪽의 제자가 양팔을 벌려 놀라움을 나타내고, 왼쪽의 제자는 놀라 의자를 짚고 일어서려는 순간을 포착해 작품 속에 캡쳐했다. 그의 상상은 순식간에 사실성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절제된 색상 가운데 드문드문 보여지는 붉은 원색이 조화롭게 다른 색들과 어우러져 작중의 사람들에게 생동감을 불러 일으킨다.

 

09_묘지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생생한 감정 비추고…

이집트로 도피중 휴식 1597년, 유화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1601년)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와 똑같은 형을 받을 수 없으니 머리가 땅으로 오게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리길 청한 베드로의 죽음을 다룬 작품이다. 화가는 사실적인 묘사를 하기 위해 베드로를 머리가 벗겨진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십자가 위에서 저 멀리 피안의 세계,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듯 그의 눈동자에는 동경의 빛이 떠돈다. 또 그의 굳건한 팔뚝과 못에 박힌 주먹 쥔 손에서는 그곳에 도달하려는 강렬한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이 그림은 특이하게 엑스자 형태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고, 오직 베드로 만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십자가를 세우려는 세 명의 인부들은 얼굴이 어둠에 잠기거나 뒷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어두운 배경에서 베드로 홀로 빛나고 있다. 우리를 성스러운 역사적 현장으로 흡입하는 놀라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1603년작 ‘매장’은 그 구성이나 뛰어난 묘사력으로 성숙한 카라바조의 역량을 한껏 드러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러 비평가들과 많은 화가들의 찬사를 받은 걸작으로 수많은 후배들이 오마주하였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이미 생명을 잃고 축 늘어진 예수의 시신을 들어 옮기고 있다. 예수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운 묘지 안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나 비통한 분위기를 풍긴다. 니고데모가 예수의 다리를 조심스레 들고 있고, 요한은 겨드랑이 아래로 예수의 상제를 안고 있다.

나이 든 성모 마리아가 비통한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 서있는 여인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두 손을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빛을 내려 예수를 살리시기를 간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 펼쳐진 부채와도 같은 구도로, 묘지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이들의 생생한 감정을 비추고 있다.

 

10_골리앗의 머리는 뼈저린 후회와 비탄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599년, 유화

1606년 카라바조는 지인과의 다툼 끝에 상대방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사형을 선고 받은 그는 로마에서 달아나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게 되었다. 도망자 생활에 지친 그가 사면권을 가진 교황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그린 작품이 1610년작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윗과 골리앗은 모두 카라바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모델로 하고 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젊은 다윗의 표정은 승리에 도취한 기쁨의 표정이 아니라 착잡하고 연민에 젖은 표정이다. 과거 자신의 행실을 후회하며 자비를 구하는 표정이랄까?

그리고 골리앗의 머리는 뼈저린 후회와 비탄으로 가득한 현재 자신의 모습이다. 다윗이 든 칼에는 ‘겸손이 오만을 이긴다’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어,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신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어필하였다. 이 작품은 화가의 모든 역량과 예술혼을 담은 걸작으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이 작품을 들고 교황에게 사면을 구하러 가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참으로 아까운 천재의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술성은 그의 사후 더욱 빛나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도도하게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 다음 번에는 상징주의 화가 페르낭 크노프의 신비로운 세계를 감상하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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