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 미술 3대 거장 요하네스 베르메르
바로크시대 화가이지만 사실적, 정교한 기법으로 평범한 사람들 일상 표현
우리에게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친숙한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1632년-1675년)는 빛의 화가라 불리며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와 더불어 황금기였던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3대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01_43세에 세상 뜨고 30여점에 불과한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4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30여점에 불과한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미술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극적이고 웅장한 것을 추구하는 바로크 시대의 화가이지만 보다 사실적이고 정교한 기법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표현한 것에 기인한 것 같다.
베르메르는 그 시대 네덜란드의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리얼하게 묘사해서, 보는 이가 타임 슬립을 해 당시의 생활상을 몸소 느낄 것만 같게 해주고 있다. 신화와 종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회화의 주인공을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주변 인물들로 바꾸어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에 흐르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베르메르는 바로크 미술이 주는 빛과 어둠의 극적인 콘트라스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련된 부드러움으로 빛과 어둠 양면을 감싸 안는다. 이러한 포용이 주는 안온한 느낌은 대상의 잔잔한 내면까지도 담아내 신비스러운 고요가 화면을 감돌게 한다.
02_15세부터 화가 밑에서 도제생활
베르메르는 1632년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태어났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무역과 산업이 발달한 황금기로 그의 아버지는 이 번창하는 도시 델프트에서 직물업과 여관을 경영하며 그림도 파는 부지런한 상인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난 베르메르는 15세경부터 화가의 밑에서 도제생활을 하며 길드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따기 위해 노력했다.
그 시대에는 모든 산업이 길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길드 규정상 6년이상 길드에 가입된 화가의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정해진 기한을 마친 베르메르는 21세인 1653년 델프트의 성 루가 길드에 가입해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을 그려 팔 수 있는 한 사람의 장인으로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온전한 화가로서의 자격을 갖춘 그는 카타리나 볼네스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가난한 개신교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부유한 집안의 카톨릭 신자였던 그녀와 결혼해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였다. 1655년 그의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여관업과 직물업을 병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03_원근법에 충실하지만 거기에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
베르메르의 작품에는 한쪽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인물을 부드럽게 비추는 형식의 그림들이 많다. 1658년경 그려진 ‘우유 따르는 하녀’는 사방으로 퍼지는 은은한 빛 속에서 항아리에 우유를 따르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일상의 루틴이 주는 편안함과 소박한 먹거리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우유를 따르는 모습이 우리에게 따스한 감성을 느끼게 해준다.
여인은 흰 두건을 쓰고 노란 상의에 푸른 치마를 입고 있다. 반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보이는 팔뚝과 손 모양은 굳건하고 세심하게 그려져 있고, 약간 외로 꼰 고개와 우유가 넘치지 않도록 그릇을 가늠하는 시선, 앙다문 입술이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청색과 노란색의 대비를 즐겨 그렸던 베르메르는 이 작품에서도 걷어 올린 치마와 테이블보의 청색과 황금색의 브라우스로 그 취향을 드러낸다. 점묘법으로 그려져 질감이 살아있는 빵과, 바구니와 그릇 등 어느 하나 세밀하게 묘사되지 읺은 것이 없고, 그 섬세함은 살아있는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는 완벽한 원근법에 의해 창조된 입체적이고 생생한 세상을 세로 45cm, 가로 40cm의 작은 화면에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눈을 속이는 것은 테이블의 모양이다. 원근법에 의하면 빵이 있는 쪽의 테이블 면이 하녀의 몸 쪽보다 넓게 그려져야 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반대로 그려져 있다.
테이블이 사다리꼴의 기형적인 모양일 리는 없고, 화가는 화면의 전체 구도에서 앞면에 돌출된 테이블의 면적이 갑갑해 보이지 않도록 임의로 그 크기를 변형시킨 것으로 보인다. 원근법에 충실하지만 거기에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04_빛과 그림자의 적절한 사용으로 놀라운 생명력 보여줘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비견되어 북유럽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5년경)는 베르메르라는 화가는 몰라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거의 흑색에 가까운 어두운 배경에 홀로 빛나고 있는 소녀의 청초한 모습은 누군가가 불러 바로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동적인 소녀의 자세로 더욱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베르메르 화풍의 주요 골자인 빛과 그림자의 적절한 사용으로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 이 작품에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받아 환하게 떠오르는 얼굴 속에 우수를 머금은 듯한 눈동자와 매끄럽게 솟아오른 콧대, 반쯤 벌어진 촉촉한 입술에 맺힌 순수하고 신비로운 표정이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반짝이는 눈동자와 입술의 볼륨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흰색에 가까운 포인트는 표정의 리얼함을 살리고 있다. 특히 진주 귀걸이의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 칠해진 흰색의 포인트는 이 작품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겠다.
소녀는 아름다운 울트라 마린블루의 터번과 황금색의 머리띠를 두르고, 톤다운된 황금색의 옷을 입고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다. 청색과 노랑색을 사랑했던 화가는 이 칼라들을 화면에 표현하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 물감을 구입하곤 했다고 한다.
05_당시 초상화 혁명 이룬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 작품에는 눈썹과 속눈썹이 안 그려진 것처럼 보여 사람들이 더욱 모나리자와 공통점을 찾기도 하는데, 사실 엑스레이로 검사한 결과 원본에는 속눈썹이 그려졌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3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었던 작품이 20세기에 와서 빛을 보자 여러 가지 주장과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당시 시도되지 않았던 초상화의 혁명을 이룬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소설, 음악의 주인공이 되어 우리를 만난다. 세로 44.5cm 가로 39cm의 조그만 작품이 가지는 흡인력은 놀라워서,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미술관에는 매년 4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이 아름다운 소녀를 보기 위해 방문한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이 작품은 국보급 대우를 받으며 절대로 국외에 대여를 하지 않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06_‘델프트의 풍경’은 네덜란드 풍경화중 최고의 마스터피스
1660년경 그려진 ‘델프트의 풍경’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베르메르의 두 점의 풍경화 중 하나이다. 델프트에서 나고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화가가 자신의 고향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우리에게 17세기 네덜란드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전해준다.
작품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하늘과 중심 아래쪽에 위치한 도시의 정경이 안정감을 주고 있다. 뭉개구름이 평화롭게 떠도는 드넓은 하늘 아래 빨강 지붕과 뾰족한 첨탑들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동화 속의 나라를 보는 것 같다. 도시의 아래쪽으로는 바닷물이 흐르고, 잔잔한 수면에는 도시의 그림자가 은은하게 비치고 있다.
앞쪽의 모래사장에는 나룻배와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정박해 있는 배들이 수면 위로 흔들리고 있는 움직임이 느껴질 것만 같은 풍경에 그의 탁월한 묘사력이 드러난다. 고요함과 평화가 흐르는 듯한 풍경이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중 최고의 마스터피스라는 명성이 어울리는 훌륭한 작품이다.
07_편지 주제로 한 작품들 즐겨 그려
베르메르는 편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즐겨 그린 것 같다. 비교적 초기 작품인 1657년경 그려진 ‘열린 창문 앞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와 1663년경 그려진 ‘편지를 읽는 여인’과 1669년경 그려진 ‘연애 편지’를 보면 6-7년 주기로 이 주제를 다뤘으니, 30여점에 불과한 그의 전체 작품 수에 비하면 확실히 많이 그렸다고 할 수 있겠다.
‘열린 창문 앞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에서는 창 밖에서 쏟아지는 빛이 소녀의 황금빛 머리와 옆얼굴을 따라 내려와 손에 들고 있는 편지에 이르러 그 밝기가 최고조를 이룬 다음 테이블 위에 놓여진 과일들을 비추고 있다. 벽에는 큐피드의 그림이 걸려있어 설레는 표정으로 그녀가 읽는 편지가 연애 편지임을 암시하는 것 같고, 늘어진 붉은 커튼 아래로 열려진 창문 유리에 비친 소녀의 실루엣이 몽환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아름다운 페이즐리 문양의 천이나 푸른 도자기의 정교한 묘사가 돋보이고, 화면의 3분의1정도를 가리고 있는 녹색 커튼이 소녀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것 같아 정겹다.
‘편지를 읽는 여인’은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 빛을 받으며 편자를 읽고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그녀의 배는 둥글게 솟아나와 임신한 여인처럼 보인다. (또 다른 의견은 그저 그 시대에 유행하던 패션이라고도 해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아기를 가진 여인이 멀리 떠난 남편의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이라는 게 좀더 서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나 싶다. 벽에는 커다란 지도가 걸려 있고, 여인은 지도 어딘가에 있을 먼 곳으로 떠난 남편을 그리며 편지를 꼭 잡고 있다. 애틋함과 절실함이 편지에 고정된 시선과 움켜쥔 손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08_그 속에 캡처된 일상의 한 순간은 영원한 평화를
‘연애 편지’의 구도는 화면을 양 옆의 어두운 부분과 중앙의 밝은 부분으로 삼등분해 중앙의 주인공들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효과를 나타낸다. 창고처럼 쓰이는 허드레 방에서 밝은 거실에 있는 주인 여자와 하녀의 대화를 엿보는 듯한 구도인데, 거실과 화가의 시점이 거리감을 조성하고, 그가 정확한 원근법을 나타내기 위해 종종 사용하는 흑백의 격자무늬 대리석 바닥으로 화면은 더욱 깊숙하게 입체감이 느껴진다.
가운데 앉아서 류트를 연주하다 하녀가 건네는 편지를 받아보는 장면에서 거실의 창으로 들어왔음직한 한낮의 태양빛을 온 몸에 받은 여인의 놀란 표정과 하녀의 미소 띤 표정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벽에 걸린 액자와 가구들이 17세기 네덜란드 중산층 가정집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고, 바닥에 놓인 빨래통과 빗자루가 어두운 방 선반에 놓인 잡동사니들과 연결되어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제목에서 보여지는 연애 편지라는 간지러운 감정이 두 여인의 시선에 녹아 있는 것 같아 절로 미소가 흘러 나오게 되는 작품인 것 같다.
1670년경 그려진 ‘레이스를 뜨는 여인’은 한 여인이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레이스를 뜨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바느질에 몰두한 여인의 표정과 바늘을 잡고 한 땀 한 땀 열심히 레이스를 뜨는 손의 모양이 너무나도 정교해 금방이라도 바늘을 움직일 것만 같다. 오른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열중하고 있는 얼굴과 손은 밝게 빛나고, 왼쪽 아래 부분에 놓인 쿠션과 천들은 어두운 청색으로 흰 레이스가 달린 노란 드레스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투명한 빛이 일상의 순간을 따스하게 포옹하는 고요한 화면… 그 속에 캡처된 일상의 한 순간은 영원한 평화를 누리고 있다.
09_위작 사건으로 베르메르 작품 진가 재확인
20세기에 와서 베르메르의 작품이 잘 알려지게 된데 한 몫을 차지한 것은 한 판 메이헤런의 위작 사건일 것이다. 메이헤런은 건축을 전공한 미술학도로 고전 미술을 좋아하여 그들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00년대는 이미 고전화가들의 인기는 사라지고 수많은 현대 미술사조가 미술계를 종횡하고 있을 때였다. 비평가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그의 그림을 알아주지 못했고, 메이헤런은 자신의 진가를 무시하는 미술비평가들을 경멸하며 고전 화가의 위작을 만들어 그들을 망신주기로 결정했다.
특히 그가 싫어했던 베르메르 전문가로 통하는 아브라함 브레디위스 박사를 골탕 먹이기 위해 그는 4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베르메르의 위작 ‘엠마우스에서의 만찬’을 만들었다. 아브라함 박사뿐만 아니라 비평가들과 네덜란드 예술협회도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거금을 주고 그의 작품을 구매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에 맛을 들인 메이헤런은 1938년부터 1945년까지6점의 베르메르 위작과 프란스 할스 등 다른 고전 화가들의 위작을 만들었다.
이 작품들이 위작인 것이 밝혀진 것은 2차 세계대전중 나찌 점령하에서 헤르만 괴링이 그의 작품을 산 것에서 비롯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나찌에게 나라의 문화유산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전범 재판에 회부된 메이헤런은, 자신이 진짜 베르메르의 작품을 판 것이 아니고 그의 위작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자신은 매국노가 아니라 나찌에게 사기친 위작범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믿지 못한 재판부는 그를 3개월 동안 자택 연금시키고 위작을 만들어 보라고 했고, 그는 경찰의 감시하에 만들어낸 ‘신전에서 설교하는 젊은 예수’로 자신을 증명했다. 세계적으로 떠들썩했던 이 사건으로 그는 유명해졌고 더불어 베르메르 작품의 진가도 재확인 되었다.
10_350년이 지난 현재,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는 최고의 거장
베르메르만큼 베일에 싸인 화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에 서명이나 제작연도를 기입하지 않고, 작업노트도 남아있지 않아 스스로를 알리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의 작품은 그리는 족족 의뢰를 한 독지가들에게 팔려 대중들에게 선보일 기회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베르메르는 15명의 자녀를 낳아 그 중 4명을 잃고 11명의 자녀를 키웠는데,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더구나 1672년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경제 위기가 찾아와 미술 시장은 얼어붙었고, 40세의 가장이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결국 1675년 43세의 나이에 심장 발작으로 갑자기 죽음을 맞은 그의 뒤에 남은 것은 막대한 빚뿐이었다.
남아있던 작품들은 빚을 갚기 위해 팔려나가고, 어렵게 아이들을 키우던 아내는 12년 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그의 작품들도 잊혀져 갔다. 그러나 그의 사후 200년이 지난 즈음부터 그의 작품은 다시 재조명을 받고 루브르 박물관에도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350년이 지난 현재에는 그 누구의 작품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는 최고의 거장이 되었으니, 너무 늦게 빛을 본 이 불우한 화가에게 약간의 위로라도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 다음에는 바로크 미술의 대가 카라바조의 작품들과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