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화파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
고대 미술, 르네상스 미술, 프랑드르 회화 융합, 바로크 미술 발전시켜
바로크 화파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년-1640년) 는 우리가 중고등학교 미술교재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세계적인 명화를 창조한 17세기의 위대한 화가이다. 그는 고대의 미술과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또 그의 고향 벨기에의 프랑드르 회화를 융합시켜 바로크 미술을 발전시키고 서양 미술사에 길이 남을 미술사조로 만들어냈다.
01_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도 명성 떨쳐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생생한 감정의 표현과 극적인 드라마의 연출은 바로크 양식의 핵심으로, 웅장하고도 거대한 서사를 화폭에 담고 있다.
루벤스는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5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실력을 지니고 특사로 유럽 각국을 다니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정국을 살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또한 공방제도를 활용해 회화뿐만 아니라 수많은 판화 작품들을 제작하고, 합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명화를 그린 화가 루벤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특히 카톨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제작된 성서를 주제로 한 명화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무한한 경외와 사랑을 받고 있다.
02_시동생활 경험 토대로 외교관 역할 훌륭히 수행
루벤스는 1577년 독일 지겐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는 모두 벨기에인이었다. 법률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신교도로 칼뱅파의 지도자였다. 16세기까지 네델란드의 국교는 카톨릭이었는데, 종교개혁의 여파로 신교도들이 네델란드로 밀려오면서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 첨예하던 때였다.
네델란드의 안트워프에서 종교탄압을 피해 독일의 퀼른으로 이주한 루벤스의 아버지는 윌리엄1세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며 안정적으로 정착했으나 얼마 안가 스캔들에 휘말려 독일 지겐으로 떠나 살게 되었다.
루벤스는 지겐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그가 열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2년 후 어머니를 따라 안트워프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안트워프에서 다시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귀족사회에 발을 들여놓았고, 루벤스를 귀족인 랄랭부인의 시동이 되게 하였다.
시동이란 하급 귀족계급의 어린 소년들이 고위귀족들의 시중을 드는 일종의 하인과 같은 역할이지만, 귀족을 모시기에 궁중예법이나 라틴어, 고전 문학 등 교양을 쌓아야 했다. 이때 받은 교육과 경험은 루벤스가 유럽 각국을 다니며 빈틈없는 예법과 교양으로 외교관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03_옐네 살부터 화가의 길 걷기 시작
열네 살이 된 루벤스는 시동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인 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림을 배우려면 화가의 밑에 들어가 일정기간 도제로 일하며 공부를 하여야 했는데, 그는 베르하트, 누트, 오트반빈의 공방에서 21세까지 도제생활을 하였다.
1957년 그려진 ‘젊은 학자의 초상’은 20살 루벤스의 반짝이는 재능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작품이다. 인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물론이거니와 살짝 옆을 비껴보는 눈동자로 인물의 자연스러운 표정을 나타내 화면 속의 인물이 생명력을 갖게 했다. 또한 시계를 들고 있는 손끝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묘사해, 손의 표정으로 수줍은 듯 내성적이지만 세상을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을 지니고 있는 젊은 학자의 순수한 내면을 훌륭하게 표현해내었다.
스물한 살이 되어 온전한 화가로 거듭난 루벤스는 화가들의 길드인 성 루크 길드에 가입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600년 23살의 나이로 꿈에 그리던 예술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게 된 루벤스는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티치아노, 베로나, 틴토레토 등 그가 갈망하던 거장들의 명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펀지로 물을 빨아들이듯 그들의 기법을 공부하며 실력을 키워가던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명성을 얻고,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 공국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또한 이듬해 피렌체와 로마에서 접한 로마시대의 고전 예술작품들과 카라바조의 작품은 그의 예술세계를 보다 더 폭넓고 깊이 있는 세계로 인도해준, 루벤스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루벤스는 탁월한 외교실력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1603년 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3세에게 보내는 빈센조 백작의 선물을 전달하고 스페인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들이 그의 실력을 한걸음 더 발전시키게 되었다.
04_왕실화가로 지명, 안트워프에서 왕실이름 건 화실 운영
로마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던 루벤스는 1608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다시 고향 안트워프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다시 그가 사랑했던 로마로 돌아갈 줄 알았지만 결국은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안트위프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어느덧 32세의 나이가 된 루벤스는 18세의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명문가의 딸로 교양 있고 가정적인 여성이었는데, 루벤스와 17년간 결혼생활을 하며 3명의 자녀를 낳았다.
1609년 그려진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의 초상’은 루벤스가 자신의 집 정원의 나무그늘 아래에 부인과 나란히 앉아 손을 마주잡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두 사람은 귀족적인 우아한 복장으로 성장을 하고 사랑과 신뢰의 표식으로 서로의 손에 손을 얹은 채 미소를 띠고 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인물의 자연스러운 포즈와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정교한 묘사로 그려진 의상은 루벤스의 탁월한 기교를 보여주지만,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서로 포개진 손의 섬세한 표현과 결혼이 주는 사랑과 신뢰의 분위기일 것이다.
루벤스는 자신이 직접 설계를 하여 아름답고도 웅장한 저택을 지었는데, 그와 그의 견습생들이 작업을 하던 이 집은 현재까지 ‘루벤스의 집’으로 운영되어 관광명소로 자리잡고 그 아름다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결혼과 함께 그에게 주어진 커다란 명예는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7세 대공과 그의 아내 이사벨라에 의해 왕실화가로 지명을 받고, 안트워프에서 왕실 이름을 건 화실을 운영하게 된 것이었다.
05_극단적인 명암의 대비는 예수님 모습 신성화
1611년과 1612년에 걸쳐 제작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는 루벤스를 바로크 화가로서 대가의 반열에 들게 하고 거장의 위치를 공고히 한 세계적인 역작이다. 안트워프 대성당의 제단화로 제작된 이 작품은 3개의 패널로 구성되었는데,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왼쪽 날개와 태어난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을 담은 오른쪽 날개가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중앙의 패널을 보좌하고 있다. 예수의 생의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을 한 작품에 담아 온전한 예수의 일생을 완성하려 한 화가의 의도가 보인다.
메인 패널의 화면은 대각선 구도로 짜여 있는데, 평면적인 구도가 주는 안정감보다 대각선의 위태한 구도가 주는 역동성을 강조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와 그를 받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실감나는 현장감을 주고 있다. 뒤의 배경과 다른 이들은 검고 어두운 색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반해, 가운데 밝게 조명을 받은 것 같이 희게 빛나는 예수님의 시신과 하얀 천에 시선이 집중되게 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명암의 대비는 마치 빛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예수님의 모습을 신성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점령 시 프랑스가 가져갔다가 19세기말에 원래의 자리인 벨기에 안트워프의 성당으로 반환되었다.
06_수많은 인물 표정과 자세 모두 다르게 그려
1617년작 ‘최후의 심판: 대’는 세로 606cm 가로 468cm의 대작으로, 거대한 화면의 중앙 위편에 붉은 옷을 예수님이 심판을 내리고 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심판자의 좌우에서 쏟아지듯 흘러내린 군상들은 아래쪽 지옥에 퍼져있다.
이 역동적이고 파격적인 구도는 권선징악의 주제에 맞게 휘몰아치듯 극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위편 구름 속에서 내려다보는 하느님, 예수의 광휘와 천국에 든 인간들은 밝은 색채와 흐릿한 형태로 표현되어 마치 영적으로 충만한 장면을 보는 것 같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혼돈과 괴로움에 가득 찬 인간들은 자신의 죄와 육욕을 표출하듯 온갖 표정과 자세로 엉키어 죄의 무게를 표출하고 있다.
루벤스가 위대한 점은 이 수많은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를 모두 다르게 그려 각각의 개성을 나타내, 우리에게 보다 사실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종종 비견되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다른 점은 미켈란젤로의 그것이 하느님과 신적인 존재의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면, 루벤스는 이 작품에서 인간과 죄악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것일 것이다. 역동적인 운동감으로 가득 찬 바로크 회화의 정수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이다.
07_영혼 갈아 넣어 완성한 역작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는 파리 뤽상부르궁전의 벽면을 장식하는 21폭의 연작으로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을 그린 루벤스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왕비였던 마리는 당시의 정치적인 이유로 나이차가 많이 나는 앙리 4세와 결혼하여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가지고 프랑스로 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이상적인 연합처럼 보였지만 각기 다른 나라에서 자라온 문화 차이는 좁힐 수 없어,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앙리 4세가 암살된 후 아들인 루이 13세가 왕이 되자 모후인 그녀는 어린 왕의 섭정이 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1617년 루이 13세가 친정을 선언하자 권력에서 밀려난 그녀는 유배생활을 하다 1621년에야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온 그녀는 예술의 힘을 빌려 자신의 위상을 바로 세우려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막강한 자금력으로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메디치가의 여인답게 그녀는 예술이 가지는 힘을 알았고, 전부터 알고 지내던 루벤스에게 이 작품을 의뢰한 것이다.
21점의 연작 중 ‘마르세이유에 도착하는 마리 드 메디치’는 앙리 4세와 결혼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 마르세유에 도착한 마리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아름답고 호화로운 옷을 걸친 채 붉은 카펫 위로 고고하게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위엄에 차있고, 하늘에는 천사가 나팔을 불며 그녀의 등장을 알리고 있다. 그녀의 뒤편으로는 메디치가의 문장을 단 배가 보이고, 앞쪽에서는 프랑스인들이 그녀를 환영하고 있다.
밑에는 바다의 해신들이 물결을 타고 역동적인 포즈로 모여있는데, 그녀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이탈리아의 해신들은 나이든 근육질의 남성으로 표현되고 그녀를 환영하는 프랑스의 해신들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마리 드 메디치를 찬양하고 그녀를 다른 인간보다 우수한 존재로 미화시킨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는 루벤스가 영혼을 갈아 넣어 완성한 위대한 역작으로, 현재는 루브르박물관에서 한 전시실을 통째로 차지하고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08_전쟁 막고 사이 좋게 지내자는 루벤스의 간접적인 호소가…
외교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던 루벤스는 스페인과 영국간의 평화 교섭의 임무를 받고 1629년 6월부터 약 9개월 동안 영국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평화와 전쟁의 상징’은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영국의 왕 찰스1세에게 기증되었다.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아 제작된 이 그림은 화면을 대각선으로 나누어 왼쪽 아래 부분은 평화를 상징하는 장면들을 담고 오른쪽 위의 공간은 전쟁의 두려운 모습을 보여주는 독특한 구성으로 되어있다.
아름다운 여인들과 아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놀고 있고, 풍성한 과일들이 그려져 있는 평화의 공간은 밝고도 화려한 색채로 묘사되어 즐거운 분위기를 풍긴다. 가운데 앉아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인은 평화를 상징하는 의인화된 여신 팍스이고, 젖을 먹는 아기는 부의 상징인 플루토스로 평화가 주는 풍요를 나타낸다.
신화에 등장하는 바쿠스의 여사제들이 온갖 보물들을 들고 있고, 반인반수인 사티로스는 먹음직한 과일들을 모두에게 권한다. 반면 어두운 색채로 칠해진 전쟁의 공간에는 군신 마르스가 불길한 기운을 띠며 덮쳐오고, 그 곁에는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가 전쟁을 부추기는 모습이 보이는데,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이들을 막고 있다. 신화를 적절히 매치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전쟁을 막고 서로 사이 좋게 지내자는 루벤스의 간접적인 호소가 담겨있는 작품이다.
09_그에게 아내는 사랑하는 여인이자 뮤즈이자 생의 동반자
1638년작 ‘모피: 헬레나 푸르망의 초상’은 루벤스의 두 번째 아내 헬레나 푸르망의 누드 작품이다. 신화나 고전 속의 인물이 아닌 살아있는 여인의 누드를 그리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지만, 상업적인 용도가 아니고 소장용으로 자신의 아내를 그린 것이기에 이해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자식이 셋 딸린 53세의 이혼 남으로 16세의 푸르른 청춘과 결혼했던 루벤스는 어린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남기고 싶었으리라.
루벤스에게 있어 여인의 미적 기준은 풍만함이었던 것 같다. 맑은 눈동자의 청순한 표정과 대조적으로 보여지는 풍만한 육체에 깃든 젊음과 생명력이 뿜어져 나온다. 하얀 피부 위에 걸쳐진 검은 모피는 묘하게 관능적이다. 진한 회색의 배경과 붉은 카펫은 검은 모피 아래서 빛나는 여인의 흰 살결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바로크 미술의 핵심인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효과를 잘 살린 작품으로 보인다.
루벤스는 첫 아내와도 17년간 사랑과 신뢰로 다져진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지만, 그녀와 사별 후 4년만에 맺어진 헬레네와도 5 자녀를 낳으며 금슬 좋은 부부생활을 하였다. 그에게 있어 아내라는 존재는 사랑하는 여인이자 뮤즈이고, 생의 동반자였기에, 루벤스는 이사벨라와 헬레나의 수많은 초상화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것 같다.
10_부와 명예 동시에 거머쥐고 평생 승승장구하며 살아온 화가
초상화뿐만 아니라 신화 속에서 여인의 인체를 풍만하고 관능적으로 표현해 루벤스 자신만의 스타일로 보여준 작품들은 여체의 신비를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삼미신’ (1639년)에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3명의 여신들은 각각 정면과 측면,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신들은 비너스의 세 시녀들로 아름다움의 상징인 이글라이아, 우아함의 상징인 에우프로시네, 기쁨의 상징인 탈레이아인데, 오른쪽은 첫 부인 이사벨라 브란트를, 왼쪽은 헬레나 푸르망을 모델로 해 그가 알고 있는 리얼한 여인들의 모습으로 여신들을 재현하였다.
그들은 춤을 추듯 한발을 구부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얹어 유대감을 자아낸다. 홀로가 아닌 셋이 합쳐져야 미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나타낼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여성의 곡선이 주는 부드러움과 당시 누드화에서 느낄 수 없던 친근감이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만년의 루벤스는 가족들과 함께 스틴에 둥지를 틀고 풍경화를 그리며 유유자적 바쁜 인생의 휴가를 즐겼다. 그러나 고질병이던 통풍이 심장에까지 퍼져 1640년 안트워프에서 생을 마감했다. 루벤스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고 평생 승승장구하며 살아온 화가이다.
귀족의 신분을 얻고 기사의 작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는 프랑드르 지역을 넘어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그의 풍부하고도 감각적인 색채와 스펙터클하고 웅장한 바로크 스타일의 작품들은 19세기 낭만주의의 고전이 되었다. 루벤스는 1830년 독립한 벨기에의 국가적 상징으로 불린다.
* 다음은 미국의 대표적인 초상화가 존 싱어 서전트의 작품과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