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시대’로 자신의 스타일 확립한 모리스 위트릴로
그가 표현한 흰색은 흰색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 깊이 선사
프랑스의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 (Maurice Utrillo, 1883년-1955년)는 평생 파리에 살며 몽마르트와 파리의 외진 구석구석을 그려 자신만의 도시 풍경화를 창조한 화가이다. 그만큼 그 시대의 파리를 잘 표현한 화가가 있을까? 몽마르트와 파리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며 그가 느낀 생생한 파리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그는 파리가 화려하고 들뜬 도시의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01_그 시대 살고 있는 수많은 군상들의 삶의 흔적이
그의 풍경화에는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군상들의 삶의 흔적이 아스라이 스며있어 우수에 가득 찬 서정성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인상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내면과 도시 풍경을 합일시켜 표현하는 ‘백의 시대’로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했는데 그가 표현한 흰색은 수많은 결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흰색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과 깊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02_발라동의 자유분방, 생기발랄함이 화가들 매료
위트릴로는 유명한 모델이자 화가인 수잔 발라동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위트릴로의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의 어머니 발라동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화가이기 이전에 유명 화가의 모델로 일을 했던 그녀는 파리의 뒷골목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해야만 했다. 19세기 파리에서 하층민으로 태어난 그녀가 할 수 있던 일은 세탁부나 댄서, 웨이트레스, 코르티잔뿐이었다.
몸이 가볍고 댄스에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서커스에서 곡예사로 일을 하였다. 그녀는 서커스를 찾았던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후에 부상으로 더 이상 곡예를 할 수 없게 되자 화가들의 모델로 일을 하게 되었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모델 일을 시작한 발라동은 곧 화가들의 뮤즈가 되었다.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그녀의 생기발랄함은 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발라동은 로트랙과 2년간 연인관계를 유지했고,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의 뮤즈가 되었는데, 우리는 이 인상파 화가들의 걸작들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르누아르가 ‘수잔 발라동의 초상화’, ‘우산’, ‘부지발의 무도회’에서 표현한 그녀의 모습은 사랑스러운 여인의 결정체로 그려졌고, 로트렉의 ‘숙취’, ‘수잔 발라동’에서는 자치고 힘든 그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03_발라동은 스스로에게 자신감 불어넣고 끊임없이 앞으로
그녀는 당대의 재능 있는 화가들의 작업을 곁에서 보고 배우며 화가의 꿈을 가꿔 나갔다. 그녀를 흔한 누드모델의 밑바닥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끌어올려 한 사람의 예술가로 우뚝 서게 한 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질도 있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의 성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끈기와 단호하고도 자신감에 가득 찬 성격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여진다.
그녀는 로트랙의 소개로 마티스에게 미술교육을 받았다. 대담하고 개성이 넘치는 색채와 단순함 속에 대상의 매력을 드러내는 데생은 몽마르트의 화가들의 인정을 받았고, 그들은 그녀가 화가가 되는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발라동은 18세에 아들을 낳았는데, 여러 예술가들과 몸을 섞었던 발라동은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모리스 발라동이라 불렸는데, 이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스페인 화가 미구엘 위트릴로가 그를 양자로 입적하여 모리스 위트릴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04_미술은 그와 어머니 연결시켜주는 동아줄 같은 존재
그러나 발라동이 스스로의 커리어를 위해 분주히 살아가는 동안, 아들 위트릴로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채 잊혀져 갔다. 외할머니는 모리스가 보채면 술을 한 숟가락씩 먹여 잠재우곤 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알콜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방치된 채 외로움에 삼켜진 그는 열살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어린 나이에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었다. 18세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심해져 병원에 입원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들을 나 몰라라 하고 자신의 삶을 즐기던 발라동은 정신병동에 입원해 폐인이 되어가는 아들을 보다못해 그에게 그림 그리기를 권유했다. 병원에서 치료방법으로 그림 그리기를 제시하자, 그림으로 밑바닥 인생을 바꾸어 나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그녀는 자신의 아들 역시 그림으로 자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술을 입에 대지 못할 것이라는 최소한의 효과도 염두에 두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관심이 자기에게로 돌아오자 유트릴로는 그 관심을 조금이라도 붙들어두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은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그와 어머니를 연결시켜주는 동아줄과도 같았다.
05_틀에 박힌 화법에 오염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 구사
그러나 계속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는 정말로 미술에 빠져버렸다. 온전히 대상에 집중해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는 자신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외로움과 비참함, 버려졌다는 자기비하를 잊을 수 있었다. 그의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은 그림을 통해 발산되고, 또 갈무리되어 점차 스스로를 치유해 나갔다.
위트릴로는 미술교육을 어머니에게서 받았는데, 마티스에게서 잠시 그림을 배웠을 뿐 모델을 서며 화가들의 어깨너머로 훔쳐본 것이 전부인 발라동 역시 체계적인 교육을 할만한 실력은 아니었기에, 위트릴로는 아카데미교육을 받은 화가들과는 그 출발점부터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핸디캡 덕분에 정규교육을 받은 이들의 틀에 박힌 화법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을 수 있었던 점도 있었던 것 같다.
06_그 정경은 그의 심경 대변하는 듯 쓸쓸하고 적막해
무엇을 그려야 할지도 모른 채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이 도시 풍경화에 국한 된 것은 그가 살고 있는 곳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는 카미유 피사로와 알프레드 시슬레의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들을 그렸다.
1907년의 ‘몽마니의 벤치들’은 백색시대에 들어서기 전 그의 초기 작품으로, 검은색의 나목들과 을씨년스러운 하늘아래 펼쳐져 있는 파리의 수많은 집들이 보여 도시의 우울을 관조하는 듯한 모습이다. 소박하고 정직한 데생 속에 숨어있는 위트릴로의 감성은 마치 한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 곳곳에서 보여지는 고독과 쓸쓸함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오래전 차곡차곡 접어놓았던 추억의 한자락을 훔쳐보는 듯도 하다.
그의 곁에서 그림을 가르치고 사랑을 주었던 어머니는 얼마 안가 훨훨 떠나고 말았다. 그가 잠시 붙들었던 장미빛 인생은 사라지고 또다시 버려졌다는 박탈감에 휩싸인 위트릴로는 다시 술잔을 잡았다. 그러나 이제는 술잔 곁에 붓과 팔레트가 있었다. 그는 밤에는 술독에 빠져 인생을 비관하며 울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술이 깨면 거리로 나와 그림을 그렸다.
술친구인 화가 모딜리아니와 함께 술을 마시고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던 그의 눈에 비친 파리 변두리의 풍경은 지나다니는 행인도 없이 고요히 서있는 낡은 건물들 사이의 텅 빈 거리뿐이었다. 그 정경은 마치 그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 쓸쓸하고 적막했다.
07_거리에서 고독이 주는 위로 느끼게 돼
1908년부터 1912년 사이에 그는 흰색을 주로 쓴 작품들을 그렸는데, 이 시기를 우리는 ‘백색 시대’라 부른다. 그의 화면에 칠해진 흰색은 단순한 하나의 색면이 아니다. 흰색을 칠하는 하나하나의 터치는 각기 미묘한 차이를 가지며, 수많은 다른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흰색의 물감에 모래나 석회를 섞어 건물의 벽이나 길바닥의 질감을 표현했고, 다양한 채도와 명도로 이루어진 흰색은 다른 색들을 그 안에 조금씩 품어 깊이 있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효과를 내었다. 흰색이라는 색 하나로 도시의 쓸쓸함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담아내는 그의 풍경화… 그 속에는 고독과 우울감으로 점철된 그의 내면의 모습이 함께 숨쉬고 있는 것 같다.
“상류사회의 주택가 풍경보다도 서민가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조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사인 (죽은 사람: 그의 주벽으로 생긴 별명)이 되면서부터 그림의 비결을 깨우쳤다. 즉 백으로 칠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의 작품에서 시들은 꽃의 내음이 풍겼으면 좋겠고, 황폐해진 사원의 꺼져버린 초의 냄새가 풍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린 가난한 집이 현실에선 허물어져 버렸다고 하더라도…”라고 그는 말한다.
1910년에 그려진 ‘백색 시대’의 대표작 ‘코탱의 막다른 골목’이나 ‘눈 내린 아틀리에 극장’에는 이러한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양쪽으로 서있는 건물들 사이로 쭉 뻗어있는 길은 마치 그가 홀로 걸어가는 인생의 여로처럼 보여진다. 사람의 모습이라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작은 점과 같은 모습들뿐인 거리에서 우리는 고독이 주는 위로를 느끼게 된다.
08_1912년 그려진 ‘작은 교회’는 백색 시대 대표걸작
1913년 첫 개인전을 연 유트릴로의 나이는 어느덧 30세였다. 그 나이 동안 그림을 그리며 시궁창에서 술잔과 벗하던 그의 삶은 이 개인전으로 확연히 달라졌다. 누구도 예견치 못했지만, 전시된 그의 작품들은 대중의 호응을 얻고 성공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몽마르트에 있는 ‘라팽 아질’은 피카소를 바롯한 화가들과 시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던 선술집인데, 위트릴로 역시 밤낮으로 그곳에 드나들며 술을 마시곤 했다. 위트릴로는 이 술집을 사랑하여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라팽 아젤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을 각각 그렸는데, 1910년작 ‘라팽 아젤’은 잎이 돋아나는 푸른 나무들과 희게 칠해진 벽과 펜스, 위를 향해 둥글게 뻗어 올라간 도로, 그들을 감싸는 은은한 잿빛의 하늘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반면 같은 해 그려진 ‘생 마그리트 교회’는 투박한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되어있다. 흰색과 검은 색, 회색이 주를 이뤄 마치 모노톤의 반추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단순한 형태의 흰색 벽에 뚫린 검은 창문들은 마치 드러내서는 안될 심연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 그의 정신적인 괴로움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1912년 그려진 ‘작은 교회’는 그의 백색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어둑한 하늘 아래 서있는 하얀 교회는 제목 그대로 조그맣지만 거대한 존재감으로 우리의 눈길을 끈다. 여러 겹 발라진 흰색에서 느껴지는 질감은 긴 세월 버텨온 삶의 무게와 작은 거인의 고독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사르트르 대성당’에서 보여지는 장면은 그가 화가로서 절정기에 들어있음을 알게 해준다. 안정된 구도로 정 중앙에 자리잡고 위용을 떨치는 성당의 대테일은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지만, 잿빛의 하늘 아래 텅빈 앞뜰과 두세 명의 조그만 그림자로 화려하고 웅장해야 할 성당의 모습은 어딘지 쓸쓸해 보인다.
09_그의 그림은 1914년 이후 ‘다색 시대’로 변화
1914년 이후 그의 그림은 ‘다색 시대’로 변화해갔다. 희끄무레한 멜랑꼬리에서 좀더 다양하고 화사한 색상을 사용한 그의 화면은 생기와 따스함을 품었다. 1914년작 ‘프로방스 교회’에서 보여지는 하늘은 좀더 푸르고 흰구름을 머금고 있다. 좀더 밝고 뚜렷하게 표현된 교회 본당은 우리에게 곧 바른 위엄을 보여주고, 옆 건물의 붉은 지붕이나 황토색의 앞뜰은 더 이상 우울하게 보이지 않는다.
백색 시대에서 처절하게 빛나던 예술혼은 점차 둥글게 깎여나갔다. ‘다색 시대’의 대표작인 ‘물랭 드 라 갈레트와 사크레쾨르’를 보면, 푸르른 수목이 주를 이루는 화면에 붉은 집과 벽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그의 심경의 변화를 알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21년 발라동과 위트릴로는 함께 2인전을 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 해 발라동이 그린 38세의 위트릴로에서 술주정뱅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진한 윤곽선과 차분한 녹색으로 이루어진 화면 안에서 위트릴로는 총기 있는 눈을 반짝이며 붓과 파레트를 든 말쑥한 화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자식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어머니의 바램이 섞여있는 초상화 같다.
10_말년은 성공한 화가로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트릴로는 1928년 프랑스 최고 명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고, 7년 후인 1935년 미술작품 컬랙터인 뤼시 발로르와 결혼해 안정적인 삶을 누렸다. 그리고 1938년 수잔 발라동이 사망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 애증의 존재였던 어머니… 그는 비로소 길고도 끈끈했던 모자의 연을 놓았고, 그녀를 위해 좋은 곳으로 가길 빌어줄 수 있었다.
위트릴로의 말년은 모두의 인정을 받은 성공한 화가로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더 이상 그의 예술혼이 빛나는 작품들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1950년에는 베니스 비엔나레에 프랑스 대표화가로 참가하는 영예를 누리기까지 했다. 1955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그가 생전에 자주 들리던 술집 ‘라팽 아질’의 앞에 위치한 묘지에 묻혔다.
위트릴로와 발라동, 이 모자의 삶은 참으로 유사점이 많은 것 같다. 둘 다 하층민의 사생아로 태어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 또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화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다는 점에서…. 어머니는 몽마르트의 뮤즈라 불리고, 아들은 몽마르트의 주정뱅이로 불렸지만, 그들은 그 한계를 뛰어넘어 현대 서양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가 되었으니, 그들의 재능과 노력, 집념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다음은 야수파 화가 블라맹크의 화사하고 밝은 원색의 세계를 감상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