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거장 프랑수아 부셰

예쁜 것에 대한 욕구 구체화, 밝고 경쾌하며 우아하고도 세련된 화풍으로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거장 프랑수아 부셰 (Francois Boucher, 1703년-1770년)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그리스 신화와 성서를 주제로 해 많은 작품들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가와 귀족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는데, 권위적이고 고귀한 모습 속에 숨어있는 낭만적이고 화려한 생활상을 섬세하고 뛰어난 묘사력으로 표현했다.

 

01_루이15세 시대 궁정화가

금발의 오달리스크 1751년, 유화

18세기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로 불리는 그는 신화 속의 아름다운 여신들의 모습, 이국적인 여인들의 누드 등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섬세한 필치로 아름답게 표현했고 당시 상류사회의 생활상 또 그들이 꿈꾸는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그려 판타지를 현실에 불러온 듯한 작품들을 남겼다.

또한 젊은이들이 애정을 나누는 장면들을 한편의 로맨스 영화처럼 사랑스럽게 표현해, 에로티시즘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이룩했는데, 욕망에 대한 숨김없는 열정으로 가득 찬 화려하고도 세련된 분위기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부셰는 루이15세 시대의 궁정화가로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를 비롯한 많은 걸작들을 남겼고, 당시 프랑스인들이 갈구하는 예쁜 것에 대한 욕구를 구체화시켜 밝고 경쾌하며 우아하고도 세련된 화풍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02_17세 때 역사화가 프랑수아 르무안느 제자로

다리 1751년, 유화

부셰는 1703년 파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장식물에 그림을 그리는 장인이었다. 비록 아카데미에 소속된 정식 화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그림 그리는 재능은 부셰에게 예술가의 길을 열어주었다. 부셰는 자라면서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17세가 되자 역사화가 프랑수아 르무안느의 제자가 되었다.

1723년 스승의 권유로 아카데미의 로마상에 도전했던 부셰는 당당히 로마상을 받아 정부에서 이탈리아로 유학할 수 있는 비용을 받게 되었지만, 당시 정부에 예산이 모자랐던 관계로 그의 이탈리아 행은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생계를 위해 장 프랑수아 카르의 공방에서 도제로 판화작업을 하였는데, 이때 로코코 미술의 아버지인 앙투안느 와토의 드로잉 연작을 동판화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셰는 와토의 드로잉과 그의 스타일을 연구하며 여성의 신체를 우아하고 균형 있게 표현하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가 여성의 신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화가라는 찬탄을 받은 것은 와토의 로코코식 표현법에서 출발된 것으로 보인다.

 

03_로코코 양식 이후 파리가 예술의 중심지로

레다와 백조 1742년, 유화

로코코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 양식으로 어원은 조개무늬 장식을 뜻하는 프랑스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기존의 예술양식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생겨난 데 비해 프랑스에서 자생한 양식으로, 이 로코코 양식 이후 예술의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옮겨와 파리가 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건축, 실내장식, 음악, 미술등 여러 분야에 걸쳐 성행했던 바로크 양식의 뒤를 이어 등장한 로코코는 바로크에 비해 좀더 섬세하고 여성적인 흐름이다.

건축, 회화, 조각의 집대성인 베르사이유궁전은 화려하고 웅장하며 남성적이고 위엄 있는 바로크 양식의 절정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주체인 프랑스 왕실을 위한 예술이었다.

반면 로코코는 베르사이유의 영광을 부러워하는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예술로 화려하지만 변덕스럽고, 우아하지만 가벼운, 사치와 유희를 즐기는 사교계의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생겨나 전 유럽으로 퍼져나간 로코코는 바로크와 고전주의, 낭만주의와 함께 18세기 예술을 이끌어간 중요한 예술사조이다.

 

04_승승장구 잘나가는 화가의 길로

리날도와 아르미다 1734년, 유화

1727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바로크 화가들의 화풍을 연구하고 파리로 돌아온 부셰는 종교와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해 귀족과 부르주아 사이에 인기를 끌고 명성도 쌓여갔다.

부셰는 1734년 ‘리날도와 아르미다’라는 작품으로 아카제미 회원으로 발탁되었다. 이 주제는 16세기 이탈리아 시인 토르쿼토 타소가 1차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쓴 서사시에 나오는 에피소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적 결말에 대한 노래이다.

예루살렘 공략을 위해 팔레스타인 항구도시 아스칼론을 함락할 선봉을 맡은 프랑스 기사 리날도와 그를 납치하려고 남장을 하고 적진에 뛰어든 아스칼론 성주의 딸 아르미다… 그들의 만남은 비극이 예정되어 있었다.

서로의 정체를 짐작한 채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그들은 마법사 이스멘이 만든 마법의 정원에서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사랑이 깊어지자 아르미다는 모든 것을 고백했지만 리날도는 분개하여 군사를 데리고 와 마법의 정원을 파괴하고 도시를 함락한다. 아르미다는 도시의 폐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유명한 시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부셰는 그들의 사랑이 꽃피는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아름다운 연인들의 모습으로 재현했다. 아르미다는 반쯤 벗은 채 리날도를 향해 유혹적으로 시선을 맞추고, 리날도는 방패도 저버린 채 그녀를 향해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다.

그들의 주변에는 아기천사들이 마치 두 사람의 사랑을 보호하듯 갖가지 포즈로 앉아있다. 웅장하고 삭막한 기둥들을 뒤로 하고 그들의 사랑은 꽃처럼 피어나 주변을 물들인다. 가장 로코코적인 사랑의 세레나데이다. 이 작품은 심사위원과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후 부셰는 승승장구 잘나가는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05_가장 판타지적 요소 많이 포함된 ‘비너스의 승리’

물 위를 걸으려 하는 베드로 1766년, 유화

1740년대 부셰는 ‘비너스의 승리’ ‘디아나의 목욕’ ‘레다와 백조’등 여신들을 주제로 해서 여러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 중 1740년에 그려진 ‘비너스의 승리’는 가장 판타지적 요소가 많이 포함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키테라 섬의 파도치는 바다에 앉아있는 비너스를 중심으로 트리톤과 나이아드, 아기천사의 형상을 한 큐피드가 자유분방하게 흩어져 있다. 나른하게 휴식을 즐기는 듯한 여신들은 관능적인 몸매를 뽐내고, 남신들은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며 서로 엉키어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너스의 발치에는 비둘기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신들은 철썩이며 그들의 육체를 핥고 지나가는 파도에서 육체적 쾌락을 느끼는 것 같다. 공중에 떠오른 실크천을 붙들고 장난치는 아기천사들이 날아다니는데, 시원한 푸른색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적나라하게 펼쳐진 살색의 향연이 억눌린 본능을 자유롭게 풀어논 듯 보여, 관능과 자유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또한 부셰는 전원생활의 낭만이 가득한 시골풍경이나 목동들의 모습을 그렸는데, 그것들은 사실에 입각해 그린 것이라기 보다는 그 시대 귀족들과 부르주아등 상류사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심어진 전원생활로, 낭만이 가득 찬 환상 속의 세계로 보여진다. 그 속에 농민들의 삶의 고통이나 어려움은 담겨있지 않다.

‘여름의 목가’ (1749년)에서는 아름다운 농촌 여인들과 잘생긴 목동이 가축들 사이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쉬고있는 목동들’ (1761년)에서 꽃을 꺾어 여인에게 주는 목동과 그에게 기대어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양치기목동의 실상과는 매우 다르지만 우리에게 달콤한 환상을 선사한다.

 

06_최초의 여인 누드화 ‘금발의 오달리스크’

비너스의 몸치장 1751년, 유화

1751년작 ‘금발의 오달리스크’는 최초로 그려진 그때까지 금기시되었던 평범한 여인의 누드화이다. 많은 화가들이 금기를 깨게 한 이 작품은 마네의 ‘올랭피아’와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의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오달리스크는 술탄의 하렘에 있는 여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동방의 왕을 시중드는 여인을 그렸음에도 그림 속의 여인은 금발의 하얀 피부를 가진 유럽의 여인이 모델이다. 저 먼 나라의 풍습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그 밑바닥에는 몸을 파는 여인들을 향한 은밀한 성적 판타지가 숨겨져 있다.

작품에는 황금색 소파와 하얀 시트, 쿠션이 보이고 그 위에 아름다운 여인이 알몸으로 엎드려 있다. 엎드려 있는 여인은 소파 팔걸이에 한쪽 팔을 걸친 채 누군가를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반쯤 벌린 채 쿠션 위에 널브러진 여인의 다리와 구겨진 시트는 마치 방금 정사가 끝난 듯 묘하게 색정적이다.

엎드린 여인의 등과 엉덩이, 다리가 이루는 완벽한 곡선은 여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황금빛 소파와 이불이 여인을 둥그렇게 둘러싼듯한 구도가 여인의 하얀 살결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주인공인 여체의 묘사도 완벽하지만, 배경이 되는 소파와 시트, 이불의 디테일이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정교해, 화가의 훌륭한 묘사력을 엿볼 수 있다.

부셰는 1743년작 ‘블루 오달리스크’를 비롯해 여러 점의 오달리스크 시리즈를 남겼다. 이들의 작품에서 부셰는 인간의 숨겨진 성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위선의 껍질을 벗겨내고 억제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예술가로서 진솔한 모습을 보여준다.

 

07_‘퐁파두르 핑크’라 부르며 따라 해 유행

비너스의 승리 1740년, 유화

부셰를 이야기하려면 루이15세의 연인 퐁파두르 부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계급의 여인임에도 왕의 사랑을 받아 왕후보다 더한 권력을 가졌고, 문화와 예술의 중심에 서있었다. 부셰는 그녀의 미술선생이자 실내장식가, 미술 컨설턴트로 그녀의 곁에서 함께 권력을 향유했다. 사실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부흥은 이 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56년에 그려진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초상’에서 그녀는 한손에 책을 들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미소를 띠고 있다.  핑크빛으로 물든 입술과 뺨은 생기를 머금고 있어 화려한 장식 속에서도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있다.

수많은 리본과 러플, 꽃으로 장식된 청록색의 드레스는 그녀의 로코코적 취향을 반영한다. 그녀의 목에 둘러진 초크와 가슴부분을 채우는 커다랗고 풍성한 리본들, 치마에 수놓아진 꽃들은 파스텔톤의 핑크색으로 보색인 청록색 원단과 대비되어 더욱 뚜렷하게 빛난다.

이 색상은 약간의 그레이가 섞인 톤 다운이 된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은은한 핑크로 현재까지 옷감과 화장품, 공예품등 많은 예술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퐁파두르 부인은 이때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핑크색을 처음으로 개발해 사용하고, 사람들은 이 핑크색을 ‘퐁파두르 핑크’라고 부르며 따라 해 유행을 시켰다.

 

08_퐁파두르 후작부인 초상화중 가장 훌륭한 작품

쉬고 있는 목동들 1761년, 유화

이 작품에서 부셰는 인물을 보다 뚜렷하고 화사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배경의 색을 브라운과 그레이를 적절히 배합해 장중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그렸다. 부인의 뒤로 화려하게 세공 된 시계와 아기천사 조각상이 장식된 책장이 보인다.

이것은 그녀 뒤에 위치한 거울에 비친 방 저편의 모습이다. 커다란 거울 숙의 사물들은 약간은 흐릿하게, 거울의 황금색 프레임과 커텐과는 다른 명도로 처리되어 있다. 방 건너편에 있었을 책장을 거울을 통해 보여줌으로 화가는 퐁파두르 부인의 지적인 성향을 살포시 드러내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단순히 미모에서 나온 것만이 아님을 어필하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배치는 부인의 앞섶에 달려있는 수많은 리본과 드레스를 장식하고 있는 많은 꽃들이 과하게 튀어나오는 것을 잡아주어, 지나치게 화려하고 경박할 수 있는 패션에 함몰될 수 있었을 그녀의 아름다움을 지켜준다.

여인의 발치에는 장미꽃 두 송이가 놓여있고, 그녀의 애견이 자리잡고 있다. 이 것은 루이15세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충성심을 나타내는 장치라고 한다. 애견의 뒤쪽으로 많은 스케치와 악보들이 쌓여있어 그녀의 음악과 미술에 대한 조예를 드러내고, 탁자 서랍에 꽂혀있는 깃털 펜과 탁자 다리 밑에 놓여있는 백과사전은 그녀가 가지는 정치적 위치와 높은 식견을 상징한다.

한마디로 부셰는 이 초상화 한 점에 풍파두르 후작부인의 내적, 외적 아름다움을 집대성해 표현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그가 그린 여러 점의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초상화중 가장 훌륭한 초상화로 인정받고 있다.

 

09_믿음 부족해 흔들리는 베드로 향한 예수님의 사랑 표현

여름의 목가 1749년, 유화

성서를 주제로 한 여러 작품 중 ‘물 위를 걸어가려는 베드로’는 1766년 생 루이 대성당의 제단화로 제작되었는데,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일화를 그림으로 옮긴 작품이다.

성서의 내용은 이렇다. 예수님이 호수 위를 걷는 것을 본 제자들이 유령이라며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제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갔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불자 두려워져서 물에 빠지려 하자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고, “이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을 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부셰는 예수가 손을 내밀어 베드로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을 묘사했다.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물 위에 베드로는 엉거주춤 서서 예수의 손을 잡으려고 한다. 예수님은 붉은 옷에 푸른 로브를 걸치고 베드로를 향해 인자한 얼굴로 손을 내밀고 있는데, 두 발은 마치 땅을 디딘 양 굳건하게 물 위에 서있다.

몰아치는 파도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구름, 흔들리는 배 위에서 예수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어우러져 극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예수의 머리 위 하늘에는 밝은 빛과 어두운 구름이 어우러진 사이로 아기천사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믿음이 부족해 흔들리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신성이 잘 표현된 작품인 것 같다.

 

10_신고전주의 사라지고 부셰 작품은 다시 인기 회복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초상 1756년, 유화

1765년 부셰는 루이15세 궁정의 수석화가로 임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교장이 되어 영광의 정점에 올랐다. 평생 회화 1천점과 드로잉 1만점을 그리며 예술을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간 화가 인생의 달디단 열매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하며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부셰는 1770년 그가 사망한지 10년도 안되어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전쟁과 경제위기로 불안한 정세 속에 싹튼 계몽주의와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신고전주의자 다비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사치스러운 귀족 성향의 로코코 미술은 철저히 짓밟혀 부셰는 많은 욕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신고전주의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부셰의 작품은 다시 인기를 회복해 현재까지 그의 로코코적 표현법은 실내장식이나 공예, 악세사리등 많은 분야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정치나 사회적으로 어떤 성향을 띠었든 간에 자신이 살아간 시대의 낭만적인 정서를 표현한, 화가로서의 천재적인 재능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이 아닐까 싶다.

 

 

* 다음에는 추상표현주의 화가 빌럼 데 쿠닝을 만나보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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