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적 추상의 아버지 피트 몬드리안
색과 선의 마술사… 수직, 수평, 삼원색, 무채색만으로 기하학적 추상 창시
피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1872~1944) 하면 빨강, 노랑, 파랑의 사각형이 떠오른다. 학창시절 미술책에 실린 그의 그림을 보며 사실화가 미술의 전부인양 알고 있던 나에게 넓고 새로운 또 다른 미술의 세계를 보여주고 추상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게 한 화가이다.
01_3차원적 공간 배제, 2차원적 평면의 순수성 극대화
색과 선의 마술사로 불리며 오로지 수직과 수평, 3원색과 무채색만으로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몬드리안. 우리가 살아 숨쉬는 3차원적 공간을 배제하고, 2차원적 평면의 순수성을 극대화시킨 그의 작품은 신조형주의로 불리며 추상화 계보의 선두에 우뚝 서있다.
그는 ‘차가운 추상,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하여 ‘뜨거운 추상’ 또는 ‘서정적 추상’의 창시자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화의 양대 산맥을 이룬 위대한 화가이다.
구체적인 형상에서 벗어나 단순한 면의 분할과 3원색의 배치만으로 세련된 이미지를 창조한 몬드리안의 자취는, 오늘날 현대 추상회화의 근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절제되고 도시적인 분위기는 현대 디자인과 인테리어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어 세계 곳곳에서 그의 화풍을 본 딴 ‘몬드리안풍’이라 불리는 회화, 디자인, 건축, 패션들을 만날 수 있다. 실로 시대를 앞서 간 화가, 시공을 뛰어넘은 화가라 아니할 수 없겠다.
02_신지학 이론은 몬드리안 신조형주의 탄생 밑거름
몬드리안은 1872년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근처의 소도시 아메르스포르트에서 엄격하고 독실한 카톨릭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이고 삼촌은 화가여서, 지적이고 예술성이 풍부한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삼촌에게 그림을 배우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20세가 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사자격증을 땄으나, 교사가 되기보다는 화가의 길을 택한 그는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몬드리안은 어릴 때 이성적이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영향으로 평생 신지학에 심취했다. 신지학이란 신의 지혜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인류의 평등을 주장하고 철학의 연구, 인간의 잠재력 발현 등 넓은 분야에 걸쳐져 있으며,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가 모든 것의 우의에 있다고 믿는 학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관통하는 신지학의 이론은 후에 몬드리안이 신조형주의를 탄생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03_피카소와 브라크 작품 접하고 순수 조형성 깨달아
젊은 날의 몬드리안은 고흐의 영향을 받은 인상파적 작품을 주로 그렸으나, 1911년 입체파의 대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을 접하고 회화란 사물의 외양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회화의 본질은 순수한 조형성에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으로 그의 그림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현대미술에 대한 갈망으로 파리에 건너간 몬드리안은 본격적으로 입체파를 연구하고, 화풍도 사실주의에서 점점 추상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1912년 그려진 ‘회색 나무’는 이러한 화풍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물의 존재가 가지는 영적인 본질과 물리적 형태를 결합해 한 화면 속에 녹여내기를 원한 몬드리안은 1908년 그려진 ‘저녁: 붉은 나무’와는 확연히 다른 화법으로 표현한 이 작품에서 나무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 나무 자체의 형상보다 나뭇가지들이 가지고 있는 선을 단순화 시키고, 선과 선 사이의 공간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면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그림이란 2차원의 평면 위에 표현되는 예술이기에 3차원의 공간을 그 안에 넣는 것보다는 순수한 2차원의 특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 작품은 그가 추상화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교두보가 되었다.
04_회화란 대상 묘사보다 회화 자체 언어 가지고…
입체파 화가들이 자연적인 형태들을 시각적으로 왜곡시키거나 세분하고, 캔바스 자체의 2차원성을 드러내려 원근법을 배제한 채 다양한 시점으로 바라본 대상을 동시에 한 표면에 묘사하려는 시도는 회화가 회화 자체로서의 대상물이 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회화가 지니는 2차원의 순수성은 몬드리안을 매료시켰다.
1914년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던 몬드리안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네델란드에 고립되었는데, 그가 브라크와 피카소에 의해 창조되고 발전되는 입체주의를 연구하는 동안 모든 사물의 형태가 근본적으로 수직과 수평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사물의 근원을 꿰뚫어 보는 성찰은 수직과 수평에 의한 표현으로 나타났다.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의 발현은 온갖 실험과 노력을 부어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이루어진 쾌거였다.
몬드리안은 회화란 어떤 대상의 묘사보다 회화 자체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수평과 수직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선과 색의 기본인 3원색만을 사용해 회화 자체의 생명력과 조형미를 표현하려고 했다.
05_작품 통해 우주적 진실 드러내기 원해
1915년과 1916년 사이 그의 작품은 이러한 기하학적 패턴으로의 전향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1915년 제작된 ‘검정과 흰색의 구성 NO. 10: 부두와 해양’은 수직과 수평의 격자무늬로 이루어져 있는데, 부두와 바다를 기호화하여 대상이 가지는 본질을 극도로 압축해 표현하였다.
그는 작품을 통해 우주적 진실을 드러내기를 원했다. 그는 수직선은 생기를, 수평선은 평온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고, 이 선들이 서로 교차하여 이루는 구성으로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17년 몬드리안은 그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테오 반 두스뷔르흐를 만나 함께 ‘데 스테일’ (the style) 운동을 펼쳐나간다. 이들은 추상 양식을 통해 예술 및 인간과 사회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균형과 조화의 법칙을 추구한다는 이념을 내세운 ‘데 스테일’ 그룹을 설립하고 동명의 정기 간행물을 창간했다.
이 운동은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양식, 인테리어, 스테인드 글라스, 가구 등 생활 전반에 걸쳐져 있었다. 몬드리안과 반 두스뷔르흐는 그들이 창간한 잡지에 기하학적 추상에 관한 여러 가지 글을 올리고, 신조형주의에 관한 이론을 펼쳤다.
1919년 파리로 다시 돌아간 몬드리안은 ‘데 스테일’과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반 드스뷔르흐가 그들의 이론에 대각선 요소를 도입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내자 수직과 수평만이 순수한 기하학적 추상의 필요요소라 주장했던 몬드리안은 결국 ‘데 스테일’을 떠나게 되었다.
06_자신의 틀 깨고 ‘이중선’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도달
그는 1926년 ‘신조형주의 일반원리’에서 “회화의 기본 요소는 3원색과 무채색의 직사각형 평면 또는 프리즘이다. 요소의 동등성이 중요하다. 크기와 색상이 동등한 가치를 가질 때 평형이 발생한다. 평형은 구성요소가 배치되는 비율과 생생한 리듬을 만드는 관계에 의해 실현된다. 모든 대칭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그의 작품원리를 설명한다.
1930년 그려진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은 몬드리안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자 그의 인생의 절정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완벽한 추상화의 교본과도 같은 작품이다.
수평과 수직선, 빨강, 파랑, 노랑의 3원색만으로 이루어져 극도의 절제와 엄격함이 주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조해냈다.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마저 자신의 신념에 맞게 개조해 3원색과 무채색으로 꾸미고 직사각형만 사용해 자신이 창조한 엄격한 규격에 맞는 자신만의 방을 만들었다.
1930년대 내내 자신의 이론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자신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 완성의 지경까지 다다랐을 때 몬드리안은 또다시 자신의 검정선을 모사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그는 자신의 틀을 깨고 ‘이중선’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진리와 이념을 향해 끝없이 도전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그의 삶의 방식은 존경을 넘어 경이로울 뿐이다.
07_가뭄의 단비같이 메마른 가슴 적시는 로맨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몬드리안에게도 가뭄의 단비같이 메마른 가슴을 적시는 로맨스가 있었다. 암스텔담의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몬드리안은 아가사 제트래우스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몬드리안과 같은 나이였지만 그보다는 한해 늦게 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암스텔담 예술가 협회에 가입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화가였다.
1906년 제트래우스는 자신의 작품을 향상시키기 위해 당시 뛰어난 실력을 지닌 몬드리안에게 배움을 청하고 미술수업을 받게 되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난 그들은 곧 연인관계로 발전해 서로의 사랑을 키워나갔다.
서로의 사랑이 절정에 다다른 1908년 모딜리아니는 그로서는 드물게 그녀의 초상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이 시기는 그가 후기인상파와 야수파를 섭렵하던 시기로 같은 해에 그려진 ‘햇빛 비추는 풍차’에서도 그 강렬한 화풍을 엿볼 수 있다.
1911년 입체파를 마주한 몬드리안은 파리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고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끝이 나버렸다. 그러나 친구와 동료로서의 관계는 계속되어 그녀는1914년 네델란드로 돌아온 그의 작품생활을 돕기도 하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편지로 안부와 작품 근황을 교류하는 인간적인 관계가 몬드리안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몬드리안의 나이 56세에 찾아온 또 다른 사랑은 리리 판다라는 20세의 여인이었다. 평소 자연적인 것을 배제한 그의 생활은 그녀로 하여 변화되고 화실에 꽃 화분을 장식해 모두를 놀래킬 정도로 그녀에게 깊이 빠졌다.
그러나 그의 불꽃같은 사랑은 깊이 빠진 만큼 허무하게 끝나버렸는데, 지인의 딸이었던 리리 판다가 부모의 극심한 반대로 네델란드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뒤늦게 찾아온 이 사랑은 이 냉철하고 청교도적인 신사의 최대의 일탈이었을 것 같다.
08_미국 망명… 유럽 현대미술가들과 미국 미술 발전시켜
1940년 나치의 마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귀화한 몬드리안은,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많은 유럽의 현대미술가들과 더불어 미국의 미술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역사와 전통 속에 오랜 세월 뿌리내린 유럽의 예술은 현대미술이라는 새순을 안고 통째로 미국으로 모종되어, 새롭고 거친 모험의 땅 미국이란 토양에서 더욱 더 자유롭게 가지를 뻗고 새로운 모습들로 발전해나갔다.
밝고 활기찬 분위기의 젊은 도시 뉴욕은 처참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탈출한 몬드리안에게 새롭고 경이로운 세상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재즈와 더불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이 도시에서 그는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1942~1943)’를 그렸다. 찬란한 색들이 춤추고 있는 듯한 이 작품에서 그의 이성을 옭아매고 있던 검은 선은 자취를 감춘다.
보다 자유롭고 감성적인 화면에서 그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은 오로지 색면으로 이루어진 수평과 수직의 띠이다. 자신의 틀을 부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비상을 향한 경이로운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빅토리 부기우기’는 1943년 시작했으나 끝을 맺지 못한 작품이다. 1944년, 71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한 모딜리아니가 2차대전의 승리를 기원하며 그린 그림으로, 제목에서 보여지듯 재즈뮤직을 사랑한 그답게 음악적 요소가 도입된 작품이다.
각각 다른 칼라의 작은 사각형들이 모여 이룬 색의 향연이 마치 신나는 재즈뮤직 같이 보이기도 하고, 일렉트로닉 조명처럼 반짝이며 춤추는 듯한 경쾌하고도 밝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가 평생 주장하던 검은색 선은 사라지고 각각의 색이 이룬 색 띠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그가 젊은 날 추구했던 냉철한 철학과 지식의 산물을 갈무리한 채 감정의 변화가 살아 숨쉬는 작품으로 차가운 사각의 기하학적 형태에 깃들인 해방과 환호,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09_그의 작품은 높은 곳에서 내려와 대중적으로 넓게 퍼져나가
자신의 작품을 우주의 진리, 근원을 표현한다고 믿은 몬드리안은 순수한 회화의 조형성을 추구해 높은 이상과 철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아이러니칼 하게도 그의 작품은 그 높은 곳에서 내려와 대중적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대중들은 그의 작품이 주는 간단명료하고 명쾌한 구성을 사랑했고, 어려운 해석을 필요로 하는 어떤 현대미술보다도 그들의 구미에 맞았다.
그가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은 말할 것도 없이 크지만, 또한 그의 작품은 이브 생 로랭의 패션을 비롯해, 핸드폰, 백, 쿠션, 컵과도 같은 소소한 생활용품부터 자동차, 자전거, 배 디자인, 건축, 인테리어 등 우리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어디로 눈을 돌려도 쉽게 ‘몬드리안풍’의 디자인들을 만날 수 있다.
“미의 가치가 잘 구현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창작주체 즉, 인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창작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를 만들어내는 인간이다. 예술의 최종 목표는 창작행위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갖춘 완전한 인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만인이 공감하는 예술을 창조해낸다. 예술의 최종 목표는 인간 완성이며, 완성된 인간이 만든 예술은 인간을 정화하는 능력을 가진다”라는 확고한 신념 아래 일평생 예술과 인생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며 구도자의 길을 걸어온 몬드리안….
2017년 네델란드는 ‘데 스테일’ 100주년을 맞아 헤이그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대대적인 규모로 몬드리안을 기념하였다. 결혼을 해 한 가정을 이루는 일보다 자신의 예술을 사랑했던 순수한 예술가, 그 구도자적 일생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서시’를 보낸다.
서시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면
네 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보라;
먼 곳을 배경으로 너의 집은 마지막 집인 듯 고즈넉하다:
네가 누구라도.
지칠 대로 지쳐, 닳고닳은 문지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너는 한 그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하늘에다 세운다: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
너는 세계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 세계는 크고,
침묵 속에서도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 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
* 다음에는 인상파의 아버지 마네와 함께 19세기 파리의 정취를 느껴 보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