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주도, 액션 페인팅 탄생에 기여한 현대미술의 거목

초현실주의의 대가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는 독일의 화가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주도하고 액션 페인팅이 태어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현대미술의 거목이다. 그는 프로타주, 콜라주, 그라타주, 테칼코마니등 여러 가지 기법을 발명하고 이용하여 초현실주의가 현대미술의 주류로 크게 성장하게끔 만들었다.

 

01_현대회화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법들은 그에 의해 창시

세명의 증인 앞에서 아기예수를 체벌하는 성모마리아.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예술가 1926년, 유화

여러 가지 기법과 확고한 이념으로 무장한 채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아 일생을 달려온 화가. 초현실주의나 추상화나 할 것 없이 오늘날 현대회화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법들은 그에 의해 창시되고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프로타주 (나무나 돌, 잎사귀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떠오르는 흔적에서 보여지는 우연한 무늬나 질감으로 연상되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기법 )나 데칼코마니 (화면에 물감을 묻힌 후 반으로 접어 생기는 우연적인 이미지를 회화에 사용하는 기법), 그라타주 (뾰족한 도구로 캔바스 표면의 물감을 긁어냄으로 사물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 등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기법들이 그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기존의 법칙이나 편견에 매이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미지의 세계로 길을 떠나는 그에게 회화란 인생이란 바다를 항해하는 거대한 배이다.

일생 동안 수많은 작품 속에서 새로운 표현을 향한 끊임없는 시도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이룩한 그는 “미술이란 보고 베끼는 것이 아니다. 플라스틱 물건처럼 딱히 어떻게 정형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림을 탐구하는 것은 모든 시간마다 새롭다. 창안되고, 발견되고, 시현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02_인간의 존엄성 되찾기 위해 다다이즘으로 자신의 사상 표현

셀레베스 1921년, 유화

막스 에른스트는 독일의 퀼른 근교 브륄에서 태어났다. 카톨릭을 믿는 중산층 가정의 9남매중 셋째로 자라나 유년시절에는 교회 전통화를 그리는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어린 시절 에른스트는 새와 인간을 혼동하는 경험을 하는데 그가 아끼던 새가 죽은 날 누이동생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린 그림에는 새가 많이 등장하고 새를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해 반인반조 ‘로플로프’를 창조해 스스로를 이 괴조에 대입했다.

본 대학에서 정신의학과 철학을 전공하던 시절, 19세에 그려진 에른스트의 첫 자화상은 강렬한 색채와 거친 터치로 이루어진 표현주의적 작품인데 그는 이 그림을 그린 후 학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 들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으로 복무한 뒤 제대한 에른스트는 전쟁의 참상과 세상의 부조리함, 인간에 대한 회의로 극도의 허무주의로 변화해갔다.

“막스 에른스트는 1914년 8월 1일에 죽었다. 1918년 11월 11일, 그는 마술사가 되어 그의 시대의 중요한 신화를 찾기를 원하는 한 젊은이로 다시 태어났다”고 자서전에서 밝힌 것처럼 전쟁은 에른스트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었고 그는 절망과 회의의 늪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다다이즘이라는 예술운동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다다이즘이란 허무주의적이고 정통미학에 대한 거부에서 태어난, 반이성, 반문명, 반도덕 등 기존사회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부정하는 예술운동이다.

 

03_콜라쥬 기법들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자극

신부에게 옷 입히기 1940년, 유화

그는 장 아르프와 함께 퀼른 다다이즘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다다> 잡지를 출간하였다. 이때 만난 첫 번째 아내 루이제 슈트라우스는 유대계 부호의 딸로 예술사학자이자 언론인, 화가로 재능 있는 여인이었는데 1918년 결혼해 에른스트와 함께 다다이즘 운동을 하며 아들도 낳았지만 에른스트가 파리로 떠난 후 홀로 아이를 키우며 작품생활을 했다.

퀼른 다다전시회는 기존의 전시회들을 비웃는 듯 공중 화장실에서 열렸는데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에른스트는 다다이즘의 대표적인 표현방식인 콜라쥬를 이용하고 발전시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입체파의 파피에 콜레가 사진이나 종이를 오려 붙이는데 비해 다다이즘의 콜라쥬는 깡통이나 나무토막, 못 등 실제 사물을 화면에 접착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했다.

1919년 제작된 ‘오랜 경험의 열매: Fruit of a long experience’는 나무 판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공방이나 거리에서 버려진 것 같은 여러 가지 형태의 나무 토막들을 붙이고 유화물감으로 색칠을 한 작품이다.

또한 같은 해 제작된 ‘구름을 넘어서: Above the clouds’에는 나비모양의 실로 짠 레이스를 붙여 여인의 가슴과 몸통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콜라쥬 기법들로 표현되는 화가의 심상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지만 동시에 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04_전쟁과 현대문명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작품 전체에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이 인간들의 1923년, 유화

1900년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내놓은 <꿈의 해석>은 인간의 꿈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정신의학의 지평을 열었다. 그의 이론은 문학과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초현실주의운동이란 논리와 이성이 배제된,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을 끄집어내 그것을 화면에 예술로 표현한다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1921년 그려진 ‘셀레베스’는 에른스트의 초기 작품 중 가장 초현실주의의 의미를 잘 나타낸 작품으로 꼽힌다. 독일어로 된 원제는 ‘셀레베스의 코끼리는 끈적끈적 노란 기름을 흘린다’인데 가운데 거의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쇠로 만든 거대한 옥수수 저장통이 있고 그 구멍에서 구부러진 고무 파이프가 뻗어 나온다.

파이프의 끝부분은 소의 머리와도 같은 조형물로 변화한다. 그러나 이 저장통과 파이프를 자세히 보면 두꺼운 다리로 버티고 있는 코끼리의 몸체와 코를 연상할 수 있다.

철제로 만든 것 같은 기하학적 구조물이 서있는 풍경조차 현실의 풍경은 아니다. 하늘에는 물고기가 떠다니고, 저 멀리 검은 연기를 뿜으며 추락하는 비행기가 보인다.

화면 아랫부분에는 목이 없는 여인이 춤을 추고 있다.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왜곡되고 기이한 형태들이 주는 낯설음, 전혀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물들이 한 자리에 있음으로 야기되는 불안과 신비는 에른스트만의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고, 전쟁과 현대문명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다.

 

05_에른스트의 자화상이라고도 하는 ‘피에타’는 가장 유명한 작품

오랜 경헙의 열매 1919년, 유화

1922년 파리로 이주한 에른스트는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환상을 통해 작품을 창조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앙드레 브르통, 장 아르프, 아라공 등 문인들과 화가들로 구성된 초현실주의 그룹의 주축 멤버가 되었다.

1923년 그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 인간들의: Of this men shall know nothing’에서 기하학적 추상에 가까운 화면을 보여준다. 원과 삼각형 등 평면적인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두 사람과 작품 중앙의 사실적으로 묘사된 손이 화면에서 기이한 조합을 이루고 있고 쭉쭉 뻗은 선의 교차는 하늘 위의 남녀의 다리와 손을 이어주고 있다.

가운데 동그란 형태와 궤도를 돌고 있는 달과 같이 보이는 원은 지상의 기묘한 생명체와 더불어 남녀관계의 심오한 의미, 생명과 우주에 대한 고찰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실적인 묘사와 추상적인 형태의 결합은 화면의 초현실성을 드러내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반면에 같은 해 그려진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인물의 사실적인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한 중년의 남자가 중절모를 쓰고 무릎을 꿇은 채 젊은 사내를 안고 있다. 이것은 화가의 아버지가 에른스트 자신을 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에른스트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06_마리 베르테 오랑슈 만나며 그림도 팔리고 국제적 명성도

자화상 1909년, 유화

에른스트는 파리생활 초기 절친한 친구이자 예술적 동지인 시인 폴 엘뤼아르의 집에서 지냈는데 그의 아내인 갈라와 사랑에 빠져 깊은 관계가 되었다. 갈라는 후에 살바도르 달리의 뮤즈이자 아내가 된 여인으로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마성적인 매력으로 여러 예술가들을 섭렵한 이였다.

결과적으로 엘뤼아르에게 상처를 주게 된 에른스트는 그의 집에서 나와 홀로 지내게 되었는데 이때 사랑으로 다가온 여인이 프랑스 여류화가 마리 베르테 오랑슈였다. 그녀는 에른스트와는 열여섯 살 차이 나는 아름다운 초현실주의 화가로, 그녀를 만나며 에른스트의 그림은 딱딱하고 차가운 모습에서 곡선을 사용한 부드러운 형태와 다양한 색감으로 바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 수집가들에게 그림도 팔리고 국제적인 명성도 얻게 되었다. 1927년 루이제와 이혼 후 결혼한 두 사람은 1942년까지 결혼 생활을 했다.

1926년 작 ‘세 명의 증인 앞에서 아기예수를 체벌하는 성모 마리아: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예술가’는 196cm*130cm의 거대한 화면에 후광을 두른 성모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리고 있다.

이 기상천외한 발상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종교화에서 볼 수 있는 종교에 대한 엄숙함이나 경외와 같은 감정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에른스트가 이 작품에서 말하려는 것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기존 회화에 매를 들이대는 초현실주의 운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조그만 창문을 통해 이 장면을 들여다 보는 세 명의 목격자는 초현실주의의 창시자인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예술가이다.

 

07_무의식의 세계에서 본질적이고 진실한 것 찾을 수 있다 믿어

패각의 꽃 1929년, 유화

세계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 사이 격동하는 세계정세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변혁 속에서 문화예술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급격히 변화하였다. 타성에 젖은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로 예술계의 혁명을 꾀하는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 우뚝 선 막스 에른스트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보다 본질적이고 진실한 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 보다 깊은 내면의 심연을 바라다 보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형성된 기존의 가치관을 깨부수고 한계를 뛰어넘는 또다른 세상을 창조한다.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은 타인을 향한 위선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자유이다.

에른스트는 무의식에서 생겨나는 심상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으로 1925년 프로타주 기법을 발명했고 데칼코마니, 그라타주를 이용한 수많은 작품들을 그렸다. ‘대삼림 (1925), 푸른 숲 (1925), 그들은 숲에서 너무 오래 잠들었다 (1926), 빛의 바퀴 (1926), 패각의 꽃 (1929)’ 등 1920년대는 그가 초현실주의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고 실험한 여러 가지 기법들의 파노라마라고 보여진다.

 

08_레오노라 캐링턴 향한 그리움, 자신이 만든 기묘한 환상의 세계에

푸른숲 1925년, 유화

1937년 세계가 2차대전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갈 때 완성된 ‘화덕가의 천사 또는 초현실주의의 승리’는 스페인 내전 때 나치와 프랑코 총통에 의한 비인도적인 대학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무당처럼 화려하고 너플거리는 천으로 된 옷을 입고 팔다리를 벌린 채 살육의 춤을 추고 있는 괴조… 웃고 있는 새의 머리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1937년은 불안한 세계정세 속에서도 에른스트에게 사랑을 가져다 주었다. 46세의 중년이 된 에른스트와 이제 막 20세가 된 미술학도 레오노라 캐링턴의 만남이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타오르는 사랑은 그들을 눈멀게 했고 에른스트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지만 모두 버리고 남프랑스의 생 마르탱으로 내려가 함께 살았다.

그러나 행복한 시절도 잠시,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자 에른스트는 적국 시민이란 이유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가까스로 수용소를 탈출해 집으로 내려갔으나 이미 그녀는 전쟁을 피해 떠난 후였다.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선물한 캐링턴을 잊지 못해 에른스트는 오랜 시간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를 주제로 여러 그림을 그렸다.

1940년 완성된 ‘신부에게 옷 입히기’에서 중앙의 붉은 망토를 입고 있는 여인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 레오노라 캐링턴이고 새의 머리를 하고 창을 들고 있는 괴조는 에른스트 자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아마도 에른스트는 그녀를 향한 그리움에 자신이 만든 기묘한 환상의 세계에 그녀를 초대한 것 같다.

 

09_미국 대부호 상속녀 페기 구겐하임 도움으로 미국 망명

피에타 1923년, 유화

마침내 나치가 유태인 학살을 시작하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페기 구겐하임의 도움을 받고 그녀와 1941년 결혼해 짧은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다. 구겐하임은 미국 대부호의 상속녀로 유럽에서 현대미술을 하는 젊은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후원하고 그림을 사주는 거대한 미술상이었다.

많은 화가들을 미국으로 도피시키고 그들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게끔 도운 여인으로 아마도 그녀가 아니었다면 현대미술의 흐름이 그토록 빨리 미국으로 넘어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에른스트는 예전부터 그를 연모하던 구겐하임의 요청으로 결혼은 했지만 사랑보다는 함께 화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하고 미술관을 운영하는 비즈니스적인 면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황야의 나폴레옹’ (1941년)은 세계 제2차대전 중 미국에 정착해 그린 그림이다. 1941년은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해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작품을 2차대전의 연극무대라고 생각했다. 해변에 서있는 기묘한 현상들은 서로 다른 역사적 기원과 문화가 어우러진 조합으로 보인다. 작품의 신비로운 색감과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화가는 데칼코마니 기법을 사용한다.

캔바스의 특정한 부분에 물감을 퍼지게 하고 그 위를 유리나 질감이 있는 종이로 눌러 생성된 기포나 개울에 의해 유리나 종이를 떼어냈을 때 생기는 우연한 효과를 이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다. 또한 그 표면을 칫솔로 문질러 재구성해 산호나 이끼 같은 착시를 일으키게 했다.

 

10_에른스트에게 찾아온 마지막 사랑, 초현실주의 화가 도로시 태닝

화덕가의 천사 혹은 초현실주의의 승리 1937년, 유화

1942년 전시회를 준비하던 에른스트에게 찾아온 마지막 사랑은 초현실주의 화가 도로시 태닝이었다. 그들은 1946년 결혼해 아리조나주의 세도나에서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몄다. 1949년 태닝과 함께 파리로 돌아온 에른스트는 1953년 프랑스로 귀화했고 1954년 베니스 비엔나레 대상을 수상해 국제적 명성을 누렸다.

평생 많은 여인을 사랑했고 결혼도 여러 번 했지만 마침내 85세로 인생의 닻을 내릴 때까지 수십년 간 곁에 있어준 여인은 도로시 태닝이었다. 일생 동안 미술에 매달려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하며 새로운 시도로 예술계의 변혁을 이끌어온 위대한 예술가 막스 에른스트. 그의 인생에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의 시 ‘예술가’를 바친다.

 

예술가

 

나는 분노에 대한 그의 사고를 자랑한다

바위에 대한 그의 완고함을

푸른 사과의 본질에 대한 그의 판단을

 

그는 그 자신이 짖는 모습을 보고

짖어대는 개

단지 그렇게 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것에 대한 증오

감사나 칭찬을 기대하는 심리의 천박함.

그것은 그에게 도둑질을 의미했다.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의 용기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욕을 먹는 의원처럼. 그의 이마는

사과와 산을 뒤로 하면서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지역을 여행한다.

 

 

* 다음에는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의 세계로 떠나보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Previous article끝물
Next article상담사로 일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