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그리는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미술사상 최초로 ‘추상 수채화’ 정립한 20세기 현대미술의 3대 거장
1910년 미술사상 최초로 ‘추상 수채화’를 그리고, 그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여 추상화의 세계를 활짝 연 바실리 칸딘스키 (1866~1944)는 피카소, 마티스와 함께 20세기 현대미술의 3대 거장이라 불린다. 수백 년 동안 형태가 주도해온 미술사에서 획기적인 발상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미술 사조를 이룩한 추상화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
01_그의 그림은 보는 음악이라고도 한다
그는 “미술은 현실 세계 앞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 세계는 외적으로는 실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내적으로 우주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며 캔버스에서 대상 자체를 없애고 선과 색채만으로 화면을 구성해 기존의 회화의 개념을 해체하고 아무도 간 적 없는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의 그림은 보는 음악이라고도 한다. 볼 수 있는 음악의 세계를 그린 칸딘스키의 음악적 회화는 열정적이고 동적인 작품 속에 무한한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어 우리에게 기분 좋은 감동과 생기를 전해준다.
각각의 색채를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선율로 인지해 음악의 추상성을 화면에 색채의 선율로 환치시킴으로, 음악의 선율이 색채의 옷을 입고 춤추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음악과 미술이 같은 예술이라는 큰 틀에서 함께 조화를 이루며 빛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02_모네의 ‘건초더미’ 연작 본 순간 화가의 길 결정
칸딘스키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 첼로 등을 배우며 음악적 소양을 쌓았다. 5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이모의 손에 길러진 칸딘스키에게 이모는 밤마다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동화책을 읽어주며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을 키워주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소리를 들으며 색을 연상하고, 색을 보면 소리를 연상하는 재능을 가졌는데, 아마도 이런 능력이 후에 음악과 미술을 연결시키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칸딘스키는 명철한 두뇌로 모스크바대학에서 법과 정치, 경제를 전공했고, 1896년 학위를 받은 후 젊은 나이에 도르파트대학에 교수로 초빙되었지만 거절을 하고 미술가의 삶을 택하였다. 그는 남에게 법학을 가르치는 삶에서 얻는 기쁨보다는 예술을 창작하는데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미술에 대한 열망은 1889년 예르미타시 미술관에서 본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큰 감동을 느꼈던 칸딘스키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었고,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된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본 순간 그의 내면에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빛의 변화만으로 평범한 건초더미가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태어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길이 대학교수가 아니라 화가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03_소리와 색채 간 상징적 관계… 청기사파 결성
1896년 미술공부를 하러 독일 뮌헨으로 떠난 칸딘스키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1901년 팔랑크스 미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02년 팔랑크스 최초의 여성 제자인 가브리엘 뮌터를 만나게 되는데, 스승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료로 연인으로 1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주고받았다. 칸딘스키는 뮌터보다 11살이나 많았고 러시아에 두고 온 아내도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회피하지 않았다.
둘은 1904년부터 1908년까지 독일 무르나우의 오두막에서 함께 살았는데, 이곳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아름다운 무르나우의 풍경에 사로잡힌 이 연인들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야외에 나가 스케치를 하거나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뮌터’ (1904)와 같은 초상화, 인상주의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풍경화들이 있다.
그들은 파리, 베네치아, 튀지니, 네델란드 등 여러 곳을 함께 여행하며 서로의 작품세계를 확장시켜 나갔고, 1911년 칸딘스키가 청기사파를 결성하자 뮌터는 핵심 멤버로 활동하였다.
청기사파는 프란츠 마르크 등 9명의 예술가가 참여하여 추상미술 활동을 펼친 모임인데, 소리와 색채 간의 상징적 관계를 통해 새로운 미술을 창조해나가는 운동이었다.
또한 칸딘스키는 1911년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예술이론서를 발표하여 본인이 느끼는 음악과 미술의 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칸딘스키는 다시 돌아오면 그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거기까지였고, 1917년 칸딘스키가 러시아 장군의 딸과 재혼을 하자 뮌터는 평생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그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04_음악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
칸딘스키의 음악적 추상화를 향한 여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 가지 사건이 있는데, 그 최초의 사건은 모스크바 국립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한 것이다.
그는 음악을 감상하며 기이한 경험에 전율을 느끼게 되는데, 그때의 느낌을 “오페라의 관현악을 들으며 머리 속에서 내가 아는 모든 색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색들이 춤을 추며 그림이 되는 경험을 하였다”라고 표현했다.
음악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영감이 떠오르고, 색채와 소리, 그림과 음악의 관계는 관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실체로서 그에게 다가왔다.
“색채는 피아노 건반이요, 눈은 피아노의 줄을 때리는 망치요, 영혼은 여러 개의 선율을 지닌 피아노이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기 위해 합목적적으로 건반을 두드려 연주하는 손과 같다”라고 칸딘스키는 말한다.
이러한 칸딘스키의 사상은 순수한 선과 색채만으로 음악의 선율을 표현한 작품 구성 (1913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칸딘스키의 작품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색과 선의 향연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교향곡 연주를 듣는 듯 웅장하고도 섬세하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림 속에서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트럼펫 등 여러 가지의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한 환상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05_색의 퍼레이드가 조화 이뤄 밝고 경쾌한 음악을
또 하나의 사건은 1908년 어느 날 일어났다. 평소와 같이 야외 스케치를 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칸딘스키가 작업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거기에는 저녁 노을을 받아 빛나는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무엇에 홀린 듯 그림 앞으로 다가간 칸딘스키는 이 독특하고도 환상적인 작품이 다른 사람의 그림이 아니라 거꾸로 놓인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고 만다.
자신이 그린 작품이 거꾸로 세워진 채 노을을 받아 새로운 색채와 형태로 보였지만, 그 그림을 바로 놓고 보자 말을 그린 자신의 그림임을 인지하게 되었고, 사실을 알게 되자 아무리 거꾸로 세워봐도 더 이상 처음에 느꼈던 감동은 느낄 수 없었다.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뇌리에 박히자 그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된 것이다. 이 사실에 칸딘스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의 예술세계에 큰 전환점이 된다.
이전의 작품들은 인상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풍경화들이었지만, 1909년 그려진 ‘코헬 풍경’은 대상물의 생략이 잘 드러나 있는데, 거리나 집, 산 등 모든 형태가 하나의 색면과 선으로 표현되어 추상화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작품이다.
푸른 산과 다홍색의 얕은 등성, 노란 들판, 연하늘색 길 등 아름답고 다양한 색면들이 이루어내는 색의 퍼레이드가 조화를 이루어 밝고 경쾌한 음악을 듣는 듯한 작품이다.
06_무조음악의 추상성과 자신의 추상화가 동일한 길 추구
그리고 1911년 쉰베르크의 무조음악 (중심이 되는 조성이 없고, 12음계를 균등하게 사용하는 현대 음악)과의 만남에서 칸딘스키의 추상화로 가는 여정은 완성을 이룬다. 쉰베르크의 음악과 자신의 그림에서 동질성을 찾은 칸딘스키는 그 감동을 음악회 다음날 ‘인상3’에 담았다.
중앙의 검은 색면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그렸고, 오른쪽에는 넓게 노랑색을 펴 발라 기쁨과 희망을 나타냈다. 왼쪽 하단부에는 무심한 붓터치와 다양한 색으로 관중들을 표현했다.
쉰베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음악 속 각 성부들은 각각의 독립된 생명체들인데, 그것은 내가 내 그림에서 추구하려는 것과 똑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화음과 멜로디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기존의 음악에서 벗어나 12개의 음에 고유의 생명을 입혀 음악의 새 시대를 연 쉰베르크의 무조음악과 자신의 추상화가 추구하는 선, 점, 색채의 자율성이 같다 즉, 무조음악의 추상성과 자신의 추상화가 동일한 길을 추구하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칸딘스키의 추상화 역시 등장하는 모든 도형과 선이 주인공이고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조화를 이룬다. 1911년 제작된 본격적인 추상화 ‘즉흥’은 일반적인 서양화가 바탕과 선을 함께 그려 대상을 표현하는데 반해 바탕과 선을 따로 그려 바탕은 바탕대로 선은 선대로 각기의 주체를 가지고 화면에 공존하고 있다. 이 선과 색채의 분리는 그의 추상화가 시작되는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07_선과 기하학적 형태들만이 음악의 선율 표현
1921년 다시 독일로 돌아온 칸딘스키는 1933년까지 수많은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을 배출한 학교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칸딘스키는 원과 직선, 삼각형, 사각형 등 기하학적 요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무정형적인 그의 회화는 점점 기하학적 도형으로 채워지게 된다.
1923년 제작된 ‘구성 7’을 보면 중첩된 원들과 선, 삼각형과 사각형, 반원 등 기하학적 형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역동적인 색채의 향연으로 음악의 이미지를 표현하던 이전의 작품들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색채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오로지 선과 기하학적 형태들만이 음악의 선율을 표현하고 있다.
칸딘스키는 많은 기하학적 도형중 원을 가장 즐겨 그렸는데 ‘여러 개의 원’ (1926년)은 그의 원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그에게 원은 가장 겸양하는 형태이면서도 자기주장을 하는, 간결하면서도 무한히 변화하며, 안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불안정하기도 한, 무수한 긴장을 갖고 있는 하나의 긴장이라고 말한다.
예술 이론가답게 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매우 깊이 있고, 그의 작품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하는 말이다.
1926년 추상미술예술론 ‘점, 선, 면’을 발표한 칸딘스키는 미술은 단지 그려서 눈을 기쁘게 하는 아름다운 존재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확장시키고, 잊고 있는 부분을 떠올리게 하며, 살아가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의 예술관을 집대성한 말이 아닐 수 없다.
08_영원한 연인 가브리엘 뮌터, 칸딘스키 작품 보존에…
1933년, 당시 독일을 지배하던 나치는 ‘바우하우스’를 폐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미술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57점을 압수했다. 또다시 칸딘스키의 수난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칸딘스키의 작품을 사랑하고 현대미술에 있어 추상화의 가치를 높게 본 미국의 철강재벌 상속인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솔로몬 구겐하임이 구겐하임재단을 세워 그의 작품을 150점 가량 사들였고, 이때 구입했던 칸딘스키의 작품들은 후에 그 유명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이 세워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이가 그의 영원한 연인 가브리엘 뮌터이다. 그녀는 어려운 시절 나치를 피해 지하와 벽 속에 그의 작품과 청기사파 작품을 보관했었다.
죽기 얼마 전인 1957년, 그녀는 평생을 보관해왔던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작품 90여점과 자신의 작품 등 300여점을 독일 렌마흐하우스 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칸딘스키는 나치의 탄압에 프랑스로 이주해 여생을 보냈는데, 만년의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 시대의 기하학적 추상과 원의 시대를 탈피해, 형식과 색채에 의한 서정적이고 환상에 넘치는 음악적 화면을 완성한다.
1939년 그려진 ‘구성 9’는 검은색 바탕의 화면에 핑크, 노랑, 그린 등 세련되고 아름다운 색들이 변형된 기하학적 형태들을 채우고 있다. 이 추상적인 도형들은 생동감 넘치는 색조로 인해 더욱 생명력과 운동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음악의 운율을 들려준다.
‘구성 7에서 보여지던 창백하고 정적인 운율은 좀더 풍부해진 색채와 형태들로 인해 마치 밤하늘에 펼쳐지는 불꽃 축제와 신나는 팡파르를 듣는 듯 우리의 마음을 부풀게 한다. 여러 미술사조 속에서 자신만의 추상세계를 개척해 나간 화가의 완숙미가 느껴진다.
또한 ‘푸른 하늘’ (1940년)은 화가가 말년에 그린 작품으로 좀더 자유롭게 표현된 형태와 맑고도 온화한 색상에서 화가의 의식의 흐름과 관조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작은 미생물과도 같은 형태들이 푸른 하늘에 부유하고 있는데, 다채로운 색채와 자유로운 형태들의 모습, 자연의 순수한 에센스를 표현한 듯한 구성은 마치 작가의 심상을 표현한 듯하다.
09_누구나 볼 수 있지만 아무나 볼 수는 없는 의미 담아낸 미술
처음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이 무질서한 색깔의 나열이 어떻게 그림이 될 수 있느냐고 비웃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대중들의 인식이 바뀌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저 점과 선과 면만으로 그렸다고 추상화가 되지는 않고, 화가의 지성과 감성이 깃들지 않으면 그것은 한낱 장식품일 뿐이라는 칸딘스키는 탄탄한 데생과 이론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는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아무나 볼 수는 없는 의미를 담아낸 미술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의 의미를 제시했다.
몬드리안이 계획된 공간의 분할을 통해 선과 색의 완벽한 단순화를 추구했다면, 칸딘스키는 추상화란 보편적이고 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상의 외면만이 아니라 내면의 모습까지 화면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물질의 배후에 있는 정신적 실재성인 내적 필연성을 강조한 그는, 그림이란 개성, 스타일, 순수성 및 영원성이라는 불가사의한 필요조건으로 구성되는데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내적 필연성이라 생각했다.
일생에 걸쳐 추상화를 창시하고 개발하며 끊임없이 변화해온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한 천재의 지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음악적 추상을 보고 있노라면 보들레르의 시 ‘음악’이 떠오른다.
음악은 때때로
바다처럼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출발한다
창백한 별을 향해
자욱한 안개 밑으로
때로는 끝없는 창공 속으로
돛대처럼 부푼 가슴 앞으로 내밀고
밤에 묻혀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나는 탄다
나는 느낀다
신음하는 배의 온갖 정열이 진동함을
순풍과 폭우, 그리고 그 진동이
나를 흔든다
광막한 바다 위에서
음악은 때로는 고요한 바다
내 절망의 거대한 거울
* 다음 호에서는 ‘생각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천재 조각가 로댕과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