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조각, 회화에 접목시켜 감각적이며 현대적인 독특한 화풍 개발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목이 길어 슬픈 여인’의 초상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 조각의 유니크한 형태를 회화에 접목시켜 감각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독특한 화풍을 개발, 자신을 따라다니던 가난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이룩하였다.
01_어떠한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고 독창적 화풍으로 내면세계 그려
가늘고 긴 목, 긴 타원형의 얼굴에서 비춰지는 고아한 아름다움과 기품, 그리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우수와 고독은 그의 작품 전반을 흐르고 있다.
특히 그가 그린 누드화는 형태의 사실적인 묘사나 명암을 배제하고 데포르망 (형태의 변형이나 확대)시킨 인체와 간결한 선으로 표현된 아웃라인, 절제되고 우아한 색감으로 기존에 존재했던 여타의 누드화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누드화가 가지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그려내기보다는 내면의 감성과 그 인물이 주는 분위기를 표현하여 작품 속 여인의 모습에서 그녀가 느끼는 감성의 향기가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 같다.
모딜리아니가 조각에서 떠나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시기는 5~6년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기간에 314점의 작품을 남겼다. 현대미술의 어떠한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고 독창적인 화풍으로 대상의 내면세계를 그려낸 그의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02_티노 디 카마이노 조각에 감명 받아 조각가 되기로 결심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리보르노라는 작은 항구 도시에서 유태인 상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광산 사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10대 초반에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점차 가난 속에 내던져졌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병을 달고 살았던 모딜리아니는 어려서는 아버지의 보살핌 덕에 좋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며 그런대로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온갖 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열세 살 때는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지경에 이르러 의사마저 곧 죽으리라는 선고를 내렸지만 간신히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기도 했다.
가장을 잃은 그의 가족을 돌봐준 외할아버지 덕에 모딜리아니는 14세에 리보르노미술학교에 입학해 데생과 회화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가 되던 해 그는 또다시 폐결핵이라는 당시로선 끔찍한 병마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치료를 위해 좋은 공기가 필요했던 그는 요양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카프리, 로마, 피렌체 등 여러 도시를 여행했는데 여행지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이탈리아의 고대미술을 많이 접하였다.
이때 얻은 고대미술에 대한 깊은 조예는 후에 그의 작품의 토대가 되었고 특히 티노 디 카마이노의 조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음해에 피렌체미술학교에 들어가 조각가의 꿈을 키우던 모딜리아니는 1년 후 그가 19세 되던 해 베네치아미술학교에 입학해 현대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03_조각대신 판매하기 쉬운 회화… 1914년 이후 회화에만 전념
1906년, 당시 현대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 몽마르트르에 정착한 모딜리아니는 피카소의 아틀리에 ‘세탁선’에 드나들면서 피카소, 브라크 등과 교류하며 예술가의 삶을 시작했다.
모딜리아니는 태동하는 입체파, 야수파, 후기 인상주의 등 격변하는 미술사조의 중심에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다른 화가들에 비해 인지도도 낮고 작품도 팔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09년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브랑쿠시를 만난 모딜리아니는 그가 만든 현대조각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브랑쿠시는 전통적인 조각을 재해석해서 재질의 느낌과 조형미를 살린 추상적인 작품으로 유명했는데 이후 모딜리아니의 조각 작품에서 보여지는 추상성과 조형성은 브랑쿠시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모딜리아니는 4~5년간 조각, 특히 두상의 조각에 몰두했는데 1912년 조각한 ‘여자의 머리’는 석회암 조각으로 길게 늘어난 타원형의 얼굴과 목을 가진, 아프리카 조각과 현대 조각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는 인간의 얼굴이 가지는 가능성을 극대화시켜 그 속에서 드러나는 기하학적 조형미를 표현하려 한 것 같다. 작품 전체에 내면을 향한 관조가 깔려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후에 그리게 될 그의 회화작품 역시 그가 조각에서 추구해온 조형미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허약한 몸으로 결핵까지 앓았던 그에게 조각은 너무나 힘겨운 작업이었다. 작업을 할 때마다 날리는 돌 가루는 그에게 치명적이었고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더욱이 조각은 대중들의 수요가 거의 없었기에 작품의 판매도 안 되었다.
그러자 그의 딜러였던 폴 기욤이 그에게 조각대신 판매하기 쉬운 회화를 하라고 조언했고 모딜리아니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1914년 이후에는 회화에만 전념했다.
1915년과 1916년 사이 그려진 ‘신부와 신랑’이라는 작품은 입체주의와 기하학적 추상이 혼재되어 있는 작품으로 조각에서 회화로 연결되는 현대적인 조형미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04_세련된 매너, 화려한 언변으로 사교계의 귀공자로 군림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매너, 화려한 언변으로 사교계의 귀공자라 불렸던 모딜리아니는 여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가난과 고독 속에서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술과 여인을 벗 삼아 그림을 그리던 이 젊고 멋있는 화가에게 몽마르트르의 여인들은 기꺼이 모델을 서주었다.
대부분이 매춘부나 세탁부 등 파리의 밑바닥 인생을 사는 여인들이었다. 잠든 여인을 그린 ‘누드’ (1916년)라는 작품을 보면 벌거벗은 여인이 눈을 감고 비스듬히 기대앉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여인은 대담하게 음모를 다 드러낸 채 그려졌는데 그 당당한 노출과 잠든 여인의 무심한 표정이 주는 상반된 감성은 우리에게 누드의 선정성을 떠나 기이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검붉게 칠해진 얼굴과 밝은 색으로 칠해진 몸통의 대조 역시 재미있게 다가온다. 얼굴에서 고단한 인생 속에서 잠시의 휴식을 취하는 여인의 애잔함이 묻어 나오는 반면 여인의 당당하고 풍만한 육체는 건강한 생명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검은 선으로 테두리 쳐진 여인의 모습은 배경의 거친 터치와 확연히 분리되어 더욱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다.
05_1917년 12월, 파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
1917년 12월 파리에서 열렸던 모딜리아니의 개인전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이 되었다. 마침 화랑의 건너편이 경찰서여서 화랑의 쇼윈도에 전시된 누드작품들이 음란성을 이유로 단 하루 만에 강제철거 당하고 만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누드 표현방식은 기존의 누드화가 주는 인상과는 판이하게 달랐기에 당시로서는 생소하게 받아들여졌고 적나라하게 음모까지 그려낸 그의 작품이 그들의 눈에 선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발표된 누드 작품들은 모딜리아니 사후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제 가치를 찾아갔다. 현재 그의 누드 작품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이 되었고 1억불이 넘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1917년 그려진 ‘누워있는 누드’ 2점은 각각 1억 5720만불, 1억 7040만불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거래되었다.
살아생전에는 한 푼의 생활비를 얻기 위해 작품을 헐값에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그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는 비극적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의 짧은 생애가 애처롭게 만 느껴진다.
‘침대의자에 앉아있는 누드 (아름다운 로마의 여인)’ (1917)는 100cm*60cm의 대형 캔바스에 그린 유화이다. 자줏빛 배경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팔로 가슴을 가린 채 다리를 외로 꼬고 수줍은 듯한 자세로 앉아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아하고 차분한데 그 속에서 여성의 관능미는 빛나고 있다. 모딜리아니의 특징인 인체의 데포르망이 적절하게 사용되어 누드의 풍만함이 더욱 강조되고 여인의 눈을 보면 눈동자와 흰자가 거의 같은 색으로 표현되어 정확한 초점을 알 수 없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아득한 시선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1999년 소더비 경매장에서 176억원에 팔렸던 이 작품은 11년 후 723억 5000만원에 팔려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06_열네 살 어린 잔 에뷔테른과의 운명적 사랑
1917년은 모딜리아니에게 운명의 사랑을 안겨주었다. 33세의 모딜리아니가 열네 살이나 차이가 나는 19세의 잔 에뷔테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 순결하고 아름다운 영혼에 매료되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 외에는 술과 여자와 마약에 푹 빠져 살던 그에게 에뷔테른과의 만남은 구원이자 빛으로 다가왔다. 이 순수하고 어린 아가씨는 흠모의 눈으로 모딜리아니를 따랐고 그의 예술과 영혼에 깊이 매료되어 아무 대가 없는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게 되었다.
잔 에뷔테른은 부유한 집안의 미술학도였는데 미술에도 재능이 뛰어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를 나이 많고 가난하며 방탕한 유태인 화가에 불과한 인물로 여긴 그녀의 집안에서는 그녀의 사랑을 한때의 치기 어린 불장난으로 치부하고 극렬하게 반대했으나 어느 누구의 반대도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에뷔테른은 가출을 해서 모딜리아니와 함께 살다 20세가 되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작품을 사주는 사람이 없어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가난이 그들의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잔의 초상화를 수없이 많이 그렸는데, 작품마다 그녀를 향한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시선이 녹아있는 것 같다. 그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지?” 라고 묻는 잔의 물음에 모딜리아니는 “네 영혼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네 눈을 그릴 거야”라고 답한다. 사랑하는 그녀의 내면 구석구석을 알고 싶어하는 그의 말대로 그들은 영혼의 일치를 이루었을까?
07_둘째아이 임신 그리고 친정부모에 의한 강압적 이별…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에뷔테른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행복 속에 살고 있었지만 얼마 안가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육체를 좀먹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의 예술혼은 더욱 크게 피어나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작품을 하였다. 절망 속에서 아름다운 희망의 꽃이 피듯 그에게 예술은 인생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다.
이후 요양을 하며 모딜리아니의 병세도 호전되고 잔도 딸을 출산하였는데 잔을 너무도 사랑했던 모딜리아니는 태어난 딸에게 엄마와 똑같이 잔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마도 이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닐까?
그러나 가난은 그들을 떠나지 않았고 둘째아이를 임신한 잔은 추위와 배고픔에 아기가 잘못될까 싶어 뱃속의 아기를 위해 잠시 친정으로 가 있게 되었다. 이 잠시간의 헤어짐이 그들에게 영원한 이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잔의 부모는 친정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모딜리아니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단속했다. 모딜리아니가 잔이 보고 싶어 친정 집으로 찾아갈 때마다 부모의 강압으로 그들은 만나지 못했고 그는 집밖에 멍하니 앉아있다 돌아오곤 했다.
08_이틀 후 잔도 친정 집 6층에서 떨어져 모딜리아니 곁으로…
홀로 남겨진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손 쓸 길 없이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남긴 ‘자화상’ (1919년)을 보면 두꺼운 갈색 코트를 입고 회색 목도리를 두른 채 오른 손에는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팔레트가 들려져 있다. 병색이 짙은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 안에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1920년 1월, 며칠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모딜리아니가 걱정이 된 이웃사람들이 문을 따고 들어가 쓰러져 있는 그를 파리 자선병원으로 옮겼으나 이틀 만에 결핵성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모딜리아니가 죽었다는 소식에 잔은 집을 뛰쳐나와 달려갔지만 반기는 것은 싸늘하게 식은 시신뿐이었다. 죽은 몸을 붙들고 미친 듯이 울부짖는 잔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온 세상이었을 모딜리아니의 죽음은 곧 그녀 인생의 끝이었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과 비통함이 그녀를 좀먹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그녀는 이틀 후 친정 집 6층에서 떨어져 모딜리아니의 곁으로 갔다.
09_2020년은 잔과 모딜리아가 함께 떠난 지 100년 되는 해
올해는 그들이 떠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그들은 나란히 잠들어 모딜리아니의 묘비에 새겨진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은 그를 데려가다’와 잔 에뷔테른의 ‘모딜리아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영원한 반려자’라는 비명으로 그들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살아생전 불타오르는 예술혼과 사랑으로 하나가 된, 한 예술가와 그의 반려이자 뮤즈의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고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들의 지독하고도 아픈, 그러나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사랑에 ‘에드가 앨런 포우’의 ‘아나벨 리’를 바친다.
-중략-
하늘의 천사들도 하늘에서
우리보다 반도 안 되는 사랑,
그 행복감에
나와 아나벨리를 질투했지요
바닷가 이 왕국 사람이면
모두가 알 이런 이유 때문에
구름 속에서 바람이 튀어나와
나의 아나벨리를
추위에 떨게 하고 죽게 했지요.
하지만 우리의 사랑
우리보다 나이 많은 자들의 사랑보다
우리보다 더 현명한 자들의 사랑보다
더 강렬한 사랑이었기에
하늘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령들도
나의 아름다운 아나벨리의 영혼으로부터
나의 영혼을 떼어놓을 수 없었지요
달은 뜰 때마다
내 아름다운 아나벨리의 꿈을 꾸게하고
별들은 반짝일 때마다
내 아름다운 아나벨리의 눈을 보게하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밤새도록
바닷가 이 왕국에 누워있네
그녀 무덤 옆에
내 사랑, 내 생명, 내 신부 옆에,
바닷가 이 왕국에,
소리 나는 바닷가 그녀 무덤 옆에
* 다음 호에서는 현대 추상화의 아버지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음악의 선율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