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회화의 여명 밝힌 근·현대 화가 7인 장욱진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할 줄 모르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않은 예술가
한국 현대미술 화단에서 한국적 추상화를 확립한 거장으로 추대 받는 영원한 동심의 화가 장욱진 (1917-1990)은 ‘나는 심플하다’라는 말로 자신을 규정지었다. 그 말 속에는 화가의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심성과 삶을 향한 따뜻한 시선, 자신의 가슴 속 깊이 존재하는 가장 진실한 심상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그려내려는 자세가 숨어있는 것 같다.
01_순수하고 토속적인 감성 추상화시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그는 대상에 대한 과감한 생략과 단순화된 형태로 독창적인 조형성을 추구했고, 순수하고 토속적인 감성을 추상화시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이룩했다.
해, 달, 새, 나무, 가족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상의 모습은 어린아이와도 같이 맑은 그의 영혼을 통해 아름다운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마치 한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그의 작품은 단순하고 소박한 표현으로 대상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잔가지를 걸러내고 그 본질을 직시해, 선 하나하나에 거대한 생명력이 실려 있는 것만 같다.
02_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 보여 공부보다 그림을 더 열심히
장욱진은 충청남도 연기군 송용리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여 공부보다는 그림을 더 열심히 그리던 학생 장욱진은 경성제2고보 (경복고등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하다 퇴학을 당하고 후에 경성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7세에는 성홍열을 앓아 몇 년을 쉬었기 때문에 늦은 나이로 다시 시작해 1937년 전 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1939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도쿄 데이코쿠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이 시기에 그는 평생의 반려이자 뮤즈인 아내 이순경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서울 계동의 학자 집안에서 역사학자 이병도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환쟁이와의 결혼을 마다하지 않았고, 박사만 7명을 배출한 쟁쟁한 처가의 홀대에도 굴하지 않고 맺어졌다.
5남매의 어머니이자 가장으로 평생을 헌신하며 장욱진을 뒷바라지해온 이순경과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으나 오로지 그림으로 밖에는 표현하지 못한 화가의 결합이었다.
03_1947년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신사실파’ 결성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유학2세대 군에 속했던 장욱진은 1944년부터 일제에 강제징용을 당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해방 후에는 박물관 직원과 미술교사로 일하며 미술활동을 이어나갔다.
1947년에는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해 한국미술의 근대화를 추구했는데, 신사실파란 눈에 보이는 사실을 닮게 그리는 사실화에서 탈피해 사실과 주관의 접목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대상을 표현하려 한 시도였다.
서양에서는 이미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등 여러 시도가 행해지고 있었고, 이러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고자 한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대는 본격적인 형태의 단순화를 시도한 시기이다. 1957년 그려진 ‘얼굴’은 아이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찬 원으로 묘사되었고, 조그만 동그라미, 삼각형, 일자선의 단순한 도형과도 같은 선으로 눈, 코, 입이 표현되어 있다.
목은 가느다란 선으로 하단의 몸통과 연결되어 있어 마치 하늘에 떠있는 풍선처럼도 보인다. 머리 위에 모자처럼 얹혀있는 집, 거꾸로 선 집 등이 단순한 선과 면으로 표현되어 대상의 추상성을 드러내고 있다.
자유로운 상상과 기하학적 조형방식은 파울 클레나 호안 미로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이 단순화된 아이의 얼굴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동심을 일깨워주고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보는 화가의 순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04_세속의 모든 때 훨훨 벗어 던지고 오로지 예술 위해 고독 속으로
그는 천성이 예술가였다.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예술가. “화가의 존재방식은 오직 그림으로 표현될 뿐이다. 화가의 글은 오히려 군더더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다.”
저서 <강가의 아틀리에>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오로지 그림을 위해 주위의 모든 환경과 현실을 뒤로 한 채 묵묵히 그 고독한 길을 걸어간 그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가 아닐까?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 교수로 재임했지만 전업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사직하고, 1963년부터 12년간 덕소의 강가 언덕에 자그마한 시멘트 집을 화실로 삼아 홀로 앉아 달 한번 보고 술 한 잔 마시며 붓을 잡았다.
세속의 모든 때는 훨훨 벗어 던지고 오로지 예술을 위해 고독 속에 풍덩 빠져들어 사랑을 노래하고 삶을 노래하며 구름에 달 가듯이…. 덕소 이후에도 수안보(1980-1985), 신갈(1986-1990) 등 산골 화실에서 온전히 그의 삶을 예술을 위해 바쳤다.
05_집과 가족 주제로 한 그림 가장 많이 남긴 화가
한국 근 현대화가 중 집과 가족을 주제로 한 그림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 장욱진에게 가족의 존재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덕소화실에서 6.25전쟁 후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나며 더욱 더 가족의 끈끈한 애정을 느낀 것 같다.
가족이 생각나면 언제라도 맨발로 혜화동으로 달려가 사랑의 허기를 채우곤 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의 가족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그림을 통해 서로 이해된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라며 여러 작품 속에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담았다.
1972년 그려진 ‘가족도’와 1973년과 1979년 제작된 ‘가족’ 등 그의 가족을 그린 작품들은 거의 조그만 집안에 옹기종기 모여 밖을 내다보는 듯한 구성이다.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 단단히 결속하고 있는 가족 간의 사랑과 끈끈한 유대감의 표현은 보기에도 따뜻하다.
1988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다양하고 선명한 색채로 산과 길, 나무 등 주위 풍경을 많이 표현하였다. 푸른 하늘에 떠있는 붉은 태양, 강렬한 초록색의 나무와 주황색 길, 연두색 산중턱에 자리 잡은 아담한 집은 한편의 동화와도 같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식구들의 평화로운 모습에서 말년에 얻은 평화와 관조를 느낄 수 있다.
06_”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다“
그림에 빠진 남편을 대신해 5남매를 키우고 책방을 열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내는 1970년 그려진 그의 작품 ‘진진묘’에서 자애로운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진진묘는 아내 이순경의 법명이다. 평생을 그를 위해 묵묵히 헌신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녀가 없었더라면 그의 화가로서의 생도 없었을 것이라는 절절한 깨달음이 아내를 보살의 모습으로 그려놓은 것 같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 외에는 술독에 빠져 사는 남편을 살뜰히 보살피고, 예술을 한답시고 혼자 시골화실에 처박혀 사는 사람에게 주말마다 반찬을 해다 나르는 생활이 얼마나 그녀를 힘들게 했는지 알았나 보다. 그의 그림에는 대가 없는 헌신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가로수’는 1978년 작품인데 한 가족의 평화로운 한때를 보여준다. 짙고 풍성한 나뭇잎을 뽐내며 우뚝 서있는 네 그루의 가로수와 그 위에 올망졸망 지어진 집들, 그리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산책하는 본인과 아내, 자식, 또 그가 식구로 생각하는 강아지와 소까지….
어슬렁거리며 한낮의 여유로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나무 위로 지어 올린 집은 마치 그들만의 안식처를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높이 올려놓은 것 같다. 단순한 형태와 안정적인 구도, 시원한 녹색 속에 드러나는 장욱진 특유의 순수하고 정감 있는 표현은 그의 심상에 존재하는 가족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리라.
07_말년에 다가갈수록 점차 수묵화의 분위기 띄는
그의 작품에서 원근법이나 비례는 철저히 무시될 뿐만 아니라 오로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사물들은 새로운 크기와 관계를 쟁취해 화가가 그리는 화폭 속 또 다른 세상에서 살아 숨쉰다.
그곳은 작가가 창조한 자기만의 심상의 세계이다. 단순한 선으로 표현된 사물들은 입체감과 공간성을 초월하고, 서양화와 동양화의 경계를 허문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선은 한 획 한 획이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선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진 것 같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민화적 요소, 그 조형성과 상징성 역시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해학적으로 다가온다.
말년에 다가갈수록 점차 수묵화의 분위기를 띄는 그의 작품은 캔버스에 유채라는 서양화의 재료를 사용해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듯한 붓질과 물감을 얇게 닦아내어 물에 번진 듯한 효과로 한국의 정서를 담아내었다.
형태 역시 점점 단순화되어 가지만 그가 1950-1960년대 그렸던 서양화의 기하학적 패턴이 주는 형태의 단순함과는 결을 달리해, 좀 더 해학적이고 무언가 숨통이 트이는 여유, 삶을 관조하는 듯한 무심함이 붓 끝에 담겨있는 듯하다.
08_1983년 그려진 ‘풍경‘은 단순함과 절제의 미학을
1981년 그려진 ‘나무’를 보면 황토색 등성 위에 초록색으로 묽게 칠해진 투박한 나무가 서있고 풍성한 나뭇잎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한쪽으로 휘날리고 있다. 나무 위에는 몇 개의 선으로 표현된 두 채의 집이 가볍게 올라앉아 있고 가지 위로 까치가 앉아있다.
황토색 언덕 위에는 그와 아내로 보이는 두 사람이 있고, 두 등성 사이에는 아이가 놀고 있는데, 언덕 아래의 원두막과 더불어 시골에 놀러 나온 가족의 행복한 한때를 보여주는 것 같다. 녹색, 황토색, 연하게 매겨진 바탕색과 몇몇의 선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색상과 세부묘사의 절제를 통해 작가의 심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1983년 그려진 ‘풍경’ 역시 이러한 절제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끝을 둥글린 커다란 세 개의 삼각형으로 묘사된 산과 산 위에 떠있는 붉은 해와 푸른 달, 군데군데 흩어져있는 집들과 개, 새, 사람들이 아무 위화감 없이 화면에 녹아 들어, 작가 심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풍경으로 태어나고 있다.
마치 굵은 붓으로 한 번에 휙 훑어간 것처럼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 유방처럼 양쪽에 둥글게 솟아있는 언덕은 흐린 황토색의 배경과 더불어 단순함과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09_술, 담배, 친구 좋아하고 근심 걱정 없는 아이처럼 살다 간…
장욱진의 작품을 보면 시인 천상병의 시 ‘귀천’이 생각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과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술과 담배, 친구를 좋아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해맑게 웃으며 근심 걱정 없는 아이처럼 살다 간 장욱진과 천상병, 이 두 예술가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인생을 관조하며 순수한 열정으로 예술가의 혼을 불사른 점이 참으로 닮은 것 같다.
1990년 그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부인 이순경은 화가의 마지막 화실이었던 용인에 살며,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을 설립 후원하고 남편의 유작들을 관리했다.
후에 양주에는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이 지어지고, 그가 말년을 보냈던 용인의 화실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장욱진 고택으로 대중들에게 개방되었다. 1917년에는 장욱진 탄생 100주년 전시회가 열렸다. 그는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갔지만 남은 이들은 그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를 찾아 길을 떠난다.
* 다음은 비디오아트, 설치미술의 선구자 백남준과 함께 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