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 우리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 모두 박수근 (호: 미석, 1914-1965)을 지칭하는 수식어이다. 그는 투박하고 소박한 한국의 질그릇 같은 작품 속에 빨래터의 아낙네들, 시장사람들, 아이 업은 여인의 모습 등 평범한 서민의 일상을 그렸다.

 

01_한국적 주제 서민적 감각으로 담은 한국의 밀레

한국적 주제를 서민적 감각으로 화면에 담아 한국의 밀레라고도 불린다. 회백색을 주조로 한 단조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질감을 개발해 화강암 마티에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을 완성한 그의 천재성은 현대의 우리가 보아도 놀랍다. 가장 한국적이며 가장 현대적인 작가라는 평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02_정규교육 없이 스스로 쌓은 그림 실력과 천재성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농가에서 위로 누나만 셋이 있는 집의 아들로, 어렸을 때는 귀하게 자라났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뒤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스로 공부를 하였다.

그림을 좋아하던 그는 12세가 되었을 때 밀레의 ‘만종’ 원색 도판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자신도 커서 저런 훌륭한 화가가 되리라 결심하고 더욱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때 일생을 화가로서 살겠다는 삶의 방향을 정한 듯싶다. 강원도 양구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던 교장 선생님과 주위의 도움으로 강원도 인제군에서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였다.

박수근은 1932년 열아홉의 나이에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를 출품해 입선함으로 화가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1943년까지 10번이나 선전에 입선하였으니 정규교육 없이 스스로 쌓은 젊은 날의 그림 실력과 천재성이 놀랍다 여겨진다.

 

03_프로포즈를 낭만적인 손 편지로…

박수근이 21세 되던 해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시고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춘천에 있던 박수근이 재혼한 아버지의 집에 다니러 왔다가 그가 혼인을 하고 자리잡고 살기를 바라던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권유로 이웃집 처녀 김복순을 보고 마음에 두게 되었다.

빨래터에서 어머니와 빨래하던 그녀를 몰래 쫓아가 유심히 지켜본 그는 그녀를 평생의 배필로 점 찍고 편지를 썼다.

 

“-중략-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 승낙하여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는 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얼마나 진솔하고 아름다운 고백인가! 요즈음으로 치면 프로포즈를 낭만적인 손 편지로 한 셈이다. 그의 진실하고 솔직한 성품,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편지이다.

 

04_1953년 국전에 으로 특선, 1954풍경과 ‘절구 입선

이후 박수근은 1940년 결혼을 하였고 평양시청에서 일하다 강원도 금성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는데 떨어져 살 때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쓰던 이 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평생을 두고 이어져 박수근의 예술적 원동력이 되었다.

행복했던 시기, 그는 아내와 아들을 그린 ‘모자’ 그리고 ‘실을 뽑는 여인’ 등 사랑하는 아내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1945년 해방 후 금성학원은 공산당의 치하로 들어가고 감시를 받던 그는 1950년 6.25 전쟁이 나자 가족과 헤어져 남한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혈혈단신 남쪽으로 내려온 박수근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예술의 끈을 놓지 않고 전라도 군산에서 막노동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다음해에는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등 계속 고되고 험난한 미술가의 삶을 살았다.

1952년 드디어 가족과 재회한 그는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조그만 집을 가족의 보금자리로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초상화를 접고 그가 염원했던 순수회화에 매진, 1953년 국전에 ‘집’으로 특선을 하고 1954년에도 ‘풍경’과 ‘절구’를 출품해 입선하였다.

 

05_어머니 품 같은 소박하고 질감 있는 표현양식

1954년 캔바스에 유채로 그린 ‘빨래터’ 는 박수근 특유의 저채도의 색상과 거칠고 두꺼운 느낌의 마티에르를 사용해 화강암 같은 표면 질감을 내는 화풍의 초기 작품으로 그전의 사실적인 작품에 비해 현대적인 조형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소박하고 질감 있는 투박한 표현양식은 우리에게 어머니의 품과 같은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1950년대 어렵고 힘든 삶의 질곡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 고되고 힘든 우리의 어머니, 아내, 누나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고 빨래터에서 열심히 빨래를 두드리며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깔깔대며 작은 수다를 떠는 한낮의 일상이 정겹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2007년 45억 2000만원에 낙찰되어 국내 최고가를 기록했는데 위작 논란에도 휩싸였지만 미술경매회사와 미술잡지사 사이의 논란은 법원의 진품판결로 종지부를 찍었다.

가난한 서민화가의 작품이 이토록 고가로 거래되었지만 생활고로 싼 값에 그림을 넘겨야 했던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는 아무 혜택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06_삶의 고단함과 역경 딛고 일상에 뿌리내린 생명력을

박수근은 나무와 여인을 주제로 연작형태의 작품을 그렸는데 그 중 1956년 그려진 ‘나무와 두 여인’은 벌거벗은 고목을 중심으로 아기를 업은 여인의 뒷모습과 함지박을 인 여인의 옆모습을 그렸다.

하드보드에 유채로 그린 28cm*19.5cm의 자그마한 이 작품은 단순하고 투박한 선과 긁거나 덧칠해 만든 독특한 마티에르로 인해 마치 돌 벽에 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우는 아기를 달래려는지 아기를 업고 서성이며 무언가를 이고 바삐 걸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그 시대 정겨운 우리네 삶의 한 페이지 같다.

특별할 것도 없는 어느 하루의 평범한 일상이 그들을 내려다보는 압도적으로 거대한 고목의 무심함과 조화되어 삶의 고단함과 역경을 딛고 일상에 뿌리내린 여인네, 아니 우리 모두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은 박완서의 소설 ‘나목 (1970년)’의 모티브가 된 작품으로 PX에서 경리를 보던 박완서가 당시 미8군에서 초상화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박수근을 만나고 그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후에 그녀의 첫 작품 <나목>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박완서가 <나목>에서 “-중략-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있는 나목 –중략-“라 표현한 것처럼 그의 작품에서 나무는 전후 한국의 자화상, 고통을 극복해 가는 인내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차가운 하늘로 뻗어 온몸으로 봄을 갈구하는 기다림과 희망의 나무… 마치 전후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삶에 깊이 뿌리내린 민초의 끈끈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현실을 견뎌내는 화가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 같다.

 

07_인간의 선함과 진실함 그려야 한다는 평범한 견해

1950년 후반에서 1965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말년은 자신의 화풍이 확립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은 시기였다. 1959년, 1960년에는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고, 1962년에는 국전 심사위원으로 추대되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이들의 이미지를 그린다”라고 한 것처럼, 그의 평생의 주제는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를 따스하고 선한 시선으로 진실하게 그려냈다.

서양화의 기법이 한국에 들어온 뒤 많은 화가들이 일본이나 유럽에 유학을 가 서구의 조형어법을 배워 오고,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정서를 무시한 채 오로지 서구의 다양한 화풍에만 환호하던 시기, 그는 누구에게 사사 받은 적도 없고 한국 밖을 나가보지도 못했지만 순전히 독학으로 이룬 독창적 표현방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가치를 발견한 이는 미국인들이란 사실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까?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연을 쌓은 미국인들이 그의 그림을 보고 독특한 동양의 정서에 매력을 느껴 그림을 사가고 물감을 보내주었다.

특히 당시 문정장관의 부인이 그의 그림의 상설전시와 화랑을 주선해주었고 작품이 미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자 후에 주한 미 공군 사령부가 주최한 박수근 특별 초대전이 열리게 되었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 박수근은 이렇게 외국에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08_정식 미술교육 못 받았어도 밀레처럼 위대한 화가가…

2002년 마침내 박수근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그의 생가가 있던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에 그가 즐겨 사용하던 회백색의 화강암으로 지어진 이 미술관은 넓은 대지의 박수근 공원과 함께 멋진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이름 없고 가난한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자 일생을 바친 화가.” 박수근 미술관에 새겨진 헌사이다. 그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밀레처럼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전쟁과 가난 등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가 마침내 세계가 인정하고 한국인이 사랑하는 위대한 화가로 우뚝 섰다.

 

09_서양화 기법 사용, 가장 한국적인 우리의 정서 빚어내

서양화의 기법을 사용해 가장 한국적인 우리의 정서를 빚어낸 그는 생전에 그 흔한 개인전 한번 열어보지 못하고 51세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가난과 싸우며 고단한 삶을 살았기에 건강 또한 악화되어 신장과 간이 나빠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백내장을 앓았지만 시기를 놓쳐 병이 악화된 후에야 수술을 받게 되어 결국엔 시신경이 끊어져 왼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 가난 탓에 한 눈을 잃고 한 눈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했던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모든 괴로움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말년의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관조와 정감의 세계는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부술 수 없는 그의 예술혼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 다음 호에서는 미인도의 여류화가 천경자 편으로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셀 유 (글벗세움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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