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몸으로 버스종점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의 사랑이 내 등을 토닥인다
나는 요즘 물 주머니를 거의 하루 종일 끼고 산다. 오늘같이 새벽 성에가 차유리에 하얗게 얼어있는 것을 볼 땐, 보는 것 만으로도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호주의 유별난 겨울을 실감하게 된다. 새벽에 끓인 뜨거운 물 주머니로 어깨, 허리를 지진 후 마지막으로 운전석 뒤 구석에 고정시키면 엉덩이 부위를 통해 따끈함이 몸 위로 후끈 올라오게 된다. 겨울철 온돌방 아랫목의 따뜻한 감촉을 상상하며 하루의 평온한 시작을 온몸으로 맛본다.
01_미처 챙기지 못하면 아내가 뜨거운 물 주머니를 도시락처럼
올 겨울엔15년 가깝게 버스 운전하는 동안 훈장처럼 발생된 허리디스크가 양쪽 골반 통증으로 확대되면서 좀 심해졌다. 견디다 못해 수시로 물 주머니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출근준비로 미처 챙기지 못하면서 힘들어지자 아내가 뜨거운 물 주머니를 도시락처럼 챙겨준다.
매일 새벽에 점심도시락과 간식 준비만으로도 정신 없을 텐데 묵묵히 물 주머니까지 챙기는 아내를 볼 때면 미안함과 안쓰러움 그리고 책임감이 뒤섞여 밀려온다.
38년 전 아내는 소개팅 후 첫만남에서 나를 두 시간 가깝게 기다리고 있었다. 왜 기다리고 있었냐고 물으니 “약속을 했으니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아가씨는 처음이었다. 교직5년차에 야간대학에 입학하고 아내를 만나고 연애와 결혼을 했다. 신혼기간 내내 주경야독의 힘든 시절을 그녀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보냈다.
02_50이 넘은 사람이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막일을 하는 건
결혼 한 달쯤 되는 날, 나보다 자기 월급이 좀 더 많은걸 확인했는데도 결혼 전 전업주부 약속을 이행한 여자였다. 한마디로 단호하면서도 순진하고 무던하며 예쁜 여자였으며 홀어머니에 독자인 나는 유아독존 형이었다.
대학졸업정원제로 인해 믿을 사람이 없으니 밤잠을 아껴가며 치열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생긴 스트레스를 그녀에게 모두 풀었는데 아내는 이를 기꺼이 잘 받아주었다. 그래서 우리가정은 주변의 부러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IMF라는 도깨비 같은 사태가 몰아치면서 내 지위는 강탈당했고 초라해졌다. 돈도 사회적 배경도 없는 아빠의 두 아들만은 좀더 좋은 사회, 능력과 정직, 상식이 통하는 선진국에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결정한 게 이민이었다. 아내는 반대했다. 이미 50이 넘은 사람이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막일을 해야 하는 것이 불안했던 것이다. 속상하고 자존심은 상했지만 안정된 직장에 사표를 내는 것은 비합리적이라 보았고 그녀의 판단은 적중했다.
03_내 자존심을 극복하지 못해 그녀를 힘들게 한 셈
이민초기의 고생이 상상을 훨씬 넘어서면서 아내의 말을 안 들었으니 쌤 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아내는 “돈은 남자가, 여자는 집안일만…”이라는 남편의 생활원칙을 잘 따라주는 듯했지만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마켓상품 정리, 홈스테이 유치, 홈케어 등 한국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험한 일들을 했다. 통장에서 돈 빠져나가는 것을 줄이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인 것이다.
내 자존심을 극복하지 못해 그녀를 힘들게 한 셈이다. 다행히 두 아들의 성공적 정착은 우리 부부에게 큰 보람이 되었다. 편모의 장남인 나는 결혼 전부터 가족의 의식주만 해결할 수 있다면 성공한 가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선지 야간고등학교 재학 중 직업은 무엇이건 한가지 일에서 1인자가 되는 꿈을 꾸었고25년 만에 국가공인을 받았다. 그러나 학력을 이유로 1년간 불법 약탈된 내 자존감은 호주에서 모든걸 새롭게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빵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을 위해….
04_”오늘도 수고해요” 따끈따끈한 물 주머니를 불쑥 건네준다
그러니 아내와 다른 생각을 강행한 대가를 노년을 눈앞에 둔 지금 톡톡히 치르며 힘들게 감수하고 있는 셈이다. 새벽녘 나는 정신 없이 도시락가방을 둘러메고 현관문을 나선다.
아내는 빠르게 따라 나서며 “오늘도 수고해요” 하며 따끈따끈한 물 주머니를 불쑥 건네준다. “이걸 언제 준비했어?” 하며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예쁜 얼굴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초라하게 늙어가는 남편을 여전히 감싸주는 아내, 허리춤에 힘이 솟는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지친 몸으로 버스 종점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의 사랑, 따뜻한 손이 내 등을 토닥인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버스운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