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인 정재만 어머니 김순림 여사

선생님께는 어미에게보다 더 잘해야 한다, 공연마다 손수건 준비하던 어머니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옹기집에 팔려간(?) 딸부잣집 둘째 딸

자식이 철들어 효도하고 싶을 때 부모님은 이미 곁에 계시지 않고 부모님 생전에 효를 다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돌아가신 후에는 어쩔 수 없는 불효자가 된다 했던가?

어머니 돌아가신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금년에도 자연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작년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건만 어머니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이제 나는 앞서 말한 효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아들, 생전에 어머니께 해드린 것보다는 못 해드린 게 더 많아 가슴 아픈 불효자식이 됐다.

나의 어머니 김순림 여사는 충남 천안 태생으로 딸 부잣집 둘째 딸이셨다. 어머니는 요리와 살림솜씨가 뛰어나 일찍부터 아홉 자매와 부모님의 끼니를 책임진 ‘살림밑천’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비록 부엌일이 고되고 젖먹이 동생들 돌보느라 낮잠 한 번 잘 수 없는 처지였지만, 어머니는 이모들과의 어린시절을 늘 행복했던 기억으로 갖고 계셨다.

어머니가 스무 살 되던 해, 그 시절의 많은 딸들이 그러했듯이 어머니 역시 가난을 피해 매파를 따라 나섰다.

“시댁 살림이 넉넉하다”는 매파의 말에 이끌려 정든 고향과 부모님을 떠난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의 심중에는 외가에서 당신 입 하나라도 줄여야겠다는 생각만이 간절하셨단다.

아버지는 대대로 천주교를 믿는 집안의 자손으로 5대째 옹기를 만들고 계셨다. 추측컨대 천주교가 박해 받던 시절,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궁여지책으로 옹기를 굽게 된 것이 우리 일족의 뿌리이자 옹기와의 인연이 아니었던가 싶다.

아무튼 타고난 옹기쟁이 아버지와 알뜰한 살림꾼 어머니의 만남은 천생연분인듯 처음부터 손발이 척척 맞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성들여 옹기를 구워내면 어머니는 그곳에 장을 담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즐겨 하셨다.

 

인내와 효심으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시절 나의 추억들 중에는 수많은 옹기들을 윤이 나도록 닦고, 몇날 몇일 공들여 장을 담그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생생하다. 아버지의 옹기 솜씨와 어머니의 음식솜씨는 그렇게 궁합이 맞았다.

뿐만 아니라 두 분은 자연에 대한 생각에도 공통된 부분이 많았다. 동물들과 꽃을 무척 사랑하신 아버지는 늘 집안을 풍성한 자연의 모습으로 꾸미셨다. 어머니 역시 생명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소중히 여기셨다.

두 분 덕에 우리집 마당에는 언제나 사계가 뚜렸했다. 봄이면 토종닭, 개, 토끼 등이 여기저기에서 뛰놀고 집안 곳곳에는 소박한 들꽃이 피어났으며 여름이 되면 무엇이든 두 배로 양이 늘어났다. 가을이면 제각기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해 떠나고 겨울이면 조용한 자연의 침묵과 쉼.

돌이켜 보면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신 것이 내가 부모님께 받은 것 중 가장 큰 선물이었던 것 같다.

내 모든 춤의 반복되는 모티브 ‘자연에 대한 순응’. 이 화두의 근원지는 바로 그곳, 시골집 마당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운명은 애당초 어긋나 있었다. 배고픔의 고통을 가져간 대신 평생 잊지 못할 정신적 아픔이 행복의 이면에 숨어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이미 결혼후 상처(喪妻)한 경험이 있었던 것. 혼례를 성사시키려는 매파의 농간으로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삶을 포기하려 할 만큼 깊은 절망에 빠지셨다. 그 상처가 오죽 크셨으면 당신이 돌아가실 때, “아버지와 합장하지 말아 달라”는 유언까지 남기셨을까.

어지간한 여성이었으면 ‘사기 결혼’ 운운하며 매정하게 뒤돌아 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못하셨다. 만일 당신이 친정으로 돌아갔을 경우 가족들이 받게 될 고통이 당신이 감수해야 할 고통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얼마 후 어머니는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자신의 모진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아홉 명의 자식들은 어머니의 그러한 인내와 효심 덕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억척스런 아내, 부지런한 옹기장사로 변신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옹기에 대한 집념이 강한 분이셨다. 어린 내 눈에도 평소 집에서 보던 아버지의 모습과 옹기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뭔가 달라 보였다. 가마터에 서계시는 아버지에게는 감히 응석을 부릴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어머니의 산후조리를 하고 있을 때도, 어머니가 옹기를 이고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실 때도 아버지는 질 좋은 옹기를 위해 가마터를 좀처럼 떠나지 않으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열정은 후일 내가 무용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진정한 우리 춤의 멋을 찾아가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친정에서 익힌 가사일과 여성스러운 품성 대신 억척스런 아내, 집념 강한 어머니, 부지런한 옹기장사로 거듭나셨다.

아버지가 구운 옹기를 장에서 쌀과 생필품으로 바꿔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여러 지역들을 쉴새 없이 돌아다니셨다.

그러다 보니 집안살림은 자연히 나를 비롯해 머리가 굵어진(?) 동생들의 몫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 일찍 시작한 부엌일 덕분에 나는 재롱을 잘 부린다거나 딱지치기를 잘 한다는 소리보다는 “어린 것이 된장국 끓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라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랐다.

그즈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종종 마을 성황당 앞과 민가에서 벌어지는 굿판이었다.

주로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아버지의 가마터로 향하던 도중 굿판과 마주쳤는데 그럴 때면 모든걸 잊고 해가 질 때까지 굿판을 구경하곤 했다.

그중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녀의 하늘거리는 의상과 춤사위였다. 허공을 향한 몸짓들, 어깨사위를 할 때마다 펄럭이며 나부끼는 장삼자락, 간드러지는 버선코의 움직임은 마치 한 마리 나비가 날아 다니는 것처럼 황홀했다.

엄숙한 무녀의 춤사위는 장마철에 불어난 강물처럼 위엄 있어 보였고 흥겨운 노랫가락은 강렬했다. 나는 집에 와서도 곧잘 그 흉내를 내곤 했는데, 무녀의 춤은 해볼수록 재미가 더해가는 놀이였다.

 

무녀 춤사위 흉내에 미소 짓던 어머니

대개 큰 굿은 이틀이나 사흘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나는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와 일단 잠을 자는 척 하다가 식구들이 잠들면 다시 밤길을 달려 굿판으로 가곤 했다.

얼마 후 내 행동을 눈치 채신 어머니는 무녀의 춤사위를 흉내 내는 내 모습이 제법이라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렇게 잠시나마 내 가슴이 환해질 만큼 어머니의 밝은 표정을 봤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신부가 되길 원하시는 아버지, 의사가 되길 희망하시는 어머니의 뜻을 비껴갔다.

중학교 때는 신부가 되려고 했던 적도 있었으나 곧 ‘부르심’의 방향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뇌리에 깊게 박힌 무녀의 동작, 허공을 맴돌던 옷자락이 지도 신부님의 풍성한 제의와 겹쳐 보이는 정신적인 혼란이 몇 달간 계속되었다.

내가 신부의 길을 포기하자 부모님께서는 무언의 격려를 보내주셨다. “하루 속히 네가 가야 할 새 길이 나타나길 바란다”며 나의 방황을 지켜 봐주셨다.

몇 달후 내가 찾아낸 길은 바로 춤의 길이었다.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큰 이모 생신 때 우연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게 됐는데 이를 지켜보던 친척이 “춤에 소질이 있으니 무용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무용이라는 예술 장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춤을 공부하는 무용이란 학문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큰 이모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산길 내내 나는 어깨가 들썩거렸다. 마치 장님이 개안(開眼)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몸 속에서 울리는 춤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다시 소리를 내는 즉, 춤의 메아리가 시작됐던 것이다.

 

꽃 행상으로 끝없는 뒷바라지

그러나 내가 춤에만 몰두하기에는 너무 각박한 현실이 닥쳤다. 아버지가 옹기 만드는 일 대신 펼치셨던 사업이 별안간 망해버렸던 것.

나와 동생들은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을 만큼 궁핍해진 생활 속에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때 우리 가족들 중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분명 어머니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결코 좌절하지 않으셨다.

옹기 대신 꽃을 팔기 위해 어머니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서초동으로 가셨다. 꽃이 가득 담긴 함지를 머리에 이고 만리동, 마포, 공덕동 등지를 돌아다니는 ‘꽃 행상’이 시작됐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매일 밀린 수업료 독촉이 심했지만, 자식들의 끼니 걱정에 쉬는 날 하루 없는 어머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동작동 국립묘지 (지금의 국립 현충원) 앞으로 어머니를 마중 나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고등학생인 내가 들기에도 벅찬 짐의 무게. 어서 돈을 벌어 어머니의 그 무거운 짐을 벗겨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런 내 심정을 알아채신 어머니는 공부를 제대로 못 시켜 미안하다며 나를 차라리 부잣집 양아들로 보내려는 노력까지 하셨다.

꽃을 사러오는 손님 중 형편이 넉넉해 보이는 아주머니들만 보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 아들이 공부를 아주 잘해요. 초등학교 때 이승만 대통령께서 두 번씩이나 상을 주셨을 정도라우. 내가 양아들로 줄테니 데려가서 잘 키워보세요. 반드시 세상에서 난 놈이 될테니까.”

손님과 어머니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동생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나를 다른 집에 양아들로 보내시려는 것이 서럽거나 원망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당신의 피와 살이나 다름없는 자식과 생이별을 감수하면서까지 공부를 가르치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 어떤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부모의 도리를 다하려는 강한 책임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네가 좋아하는걸 막을 순 없다!”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정은 한 가지. 이미 발을 들여놓은 무용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머니가 친정을 떠나실 때 결심하셨던 것처럼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손꼽히는 무용가 송 범 선생님의 연구소로 들어가 춤을 본격적으로 배워보기로 했다.

내 결심을 들으신 어머니는 “제대로 먹이지도,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너 좋아하는 걸 막을 수 있겠느냐. 집안 걱정은 잊어버리고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날 저녁, 집을 떠나면서 오랜만에 매달려본 어머니의 등은 어느덧 무척 단단한 나무처럼 변해 있었다.

문득 여덟 살 때 다리를 다친 나를 업고 2년간이나 병원을 오가시던 어머니의 여린 등이 떠올라 목이 메어왔다.

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의 그 딱딱한 등은 내가 지칠 때마다 힘을 북돋워주는 역할을 한다.

송 범 선생님께 승무 지도를 받는 동안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춤 어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됐다. 바로 내게 ‘벽사춤’을 계승해 주신 한영숙 선생님이시다.

그 당시 나는 춤의 마력에 깊이 빠져 있었다. 눈을 뜨면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단 한시도 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연구소에서 춤을 배웠지만, 집에서 쉴 때도 내 팔과 다리는 춤을 추길 원했다.

연구소에서 연습하는 나를 보신 한영숙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당신 춤을 배워보겠냐며 물으시더니 송 범 선생님께 나를 양자로 달라고 하셨다.

 

“선생님께는 어미에게보다 더 잘해야 한다”

자신이 키우던 제자를 다른 동료에게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송 범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승낙하셨다. 제자의 더 많은 공부를 위해 기꺼이 남에게 보낼 만큼 나를 아끼고 계셨던 것이다.

벽사춤은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몸 안의 기를 갖고 추는 품격 높은 춤이었다. 가장 흥겨운 정점에서 흔들리지 않고 멈출 수 있는 절제미를 지녔고, 움직임을 위한 정중동의 기법이 우수하며 기승전결이 뚜렸했다.

한영숙 선생님께 벽사춤을 계승 받는 동안 나는 질량의 확대, 힘의 분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한 연습에 골몰했다. 흔히 우리 춤은 도가 넘치면 천해지고 동작이 약하면 딱딱하다는 평을 듣곤 한다.

벽사춤 역시 힘의 분할에 실패할 경우 춤사위 전체에서 풍기는 담백한 맛이 사라진다. 이를 익히는데 연습보다 더 큰 왕도는 없었다.

한영숙 선생님께서는 거르기 쉬운 아침식사 걱정까지 해주실 정도로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한 선생님의 나의 아침식사 챙겨주기는 내가 결혼한 후에까지도 이어져, 나는 아침밥을 두 번 먹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푸짐한 밥상을 볼 때마다 나는 어머니와 동생들 얼굴이 떠올라 쉽게 넘어가지를 않았다.

때때로 내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참다 못해 집으로 달려가면 어머니는 반가움 대신 “선생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느냐”고 걱정하시며 “선생님께는 어미에게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또 행여 집안 걱정 때문에 내가 춤 연습을 게을리할까 싶으셨던지 그날만은 반찬을 더 만드시고 동생들에게도 집안의 어려운 얘기는 일절 하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곤 하셨다.

 

‘춤 어머니’ 뒤에서 큰 힘 돼주신 어머니

누구나 외롭고 힘든 고학시절, 그럼에도 나는 그 시기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뜻 깊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때로는 엄한 스승으로, 때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지도해주신 한영숙 선생님, 그리고 멀리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정신적인 힘 때문이었다.

이러한 두 분의 은혜 덕분에 나는 한영숙 선생님의 혼이 담긴 벽사춤의 제3대 계승자가 될 수 있었고, 한 선생님의 조부이시자 벽사춤의 창시자인 한성준 선생님의 춤 솜씨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 폐막식 총괄안무, 세계잼버리대회와 대전 엑스포 개․폐회식 안무, 프랑스, 독일, 이태리, 이스라엘, 폴란드 등 유럽순회 공연, 프랑스 디종국제무용제 금상 수상, 폴란드 민속제 안무상과 인기상 등의 영광은 모두 이러한 두 어머니의 뒷받침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성과였다.

나의 어머니야말로 우리 전통 무용에 담긴 우리네 정서, 즉 한과 설움, 인내와 끈기 등을 몸소 실천하며 사신 전형적인 한국 여성이셨다.

그래서 공연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내 춤의 가장 든든한 팬이자 후원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립무용단 수석 무용수였던 아내 박문자를 며느리라기보다 친딸처럼 아껴주신 것도 아내의 춤에 담긴 혼을 사랑하셨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결혼 후 내가 어머니의 은혜에 얼마만이라도 보답하고자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오고자 했을 때,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킨 어미가 무슨 낯으로 너한테 신세를 지겠느냐”며 어머니는 끝내 혼자 사시기를 고집하셨다.

명절 때나 생신 때도 어머니는 우리집에서 하룻밤 넘게 묵어가는 것을 꺼리셨다. 이는 “남에게 신세지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중 하나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매달 드린 생활비조차 꼬박꼬박 모아 1천만원을 만들어 다시 아내에게 주실 정도로 절약정신이 강한 분이셨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는 “내가 서울에서 죽어야 너희가 부조라도 받아 장례비로 쓸텐데…” 하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셨다.

 

공연 때마다 객석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던 얼굴

나는 지금도 맛있는 음식을 보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샘솟는다. 생전에 단 것을 입에 댄 적이 없으셨던 어머니에게 산해진미를 충분히 대접해드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루 여섯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술과 담배도 안한다. 자가용 승용차 대신 지하철을 이용해 숙명여대 출강이나 삼성무용단 출퇴근, 그리고 벽사춤아카데미 등을 오가고 있다.

이렇게 모인 내 땀과 피는 제자들에게 큰 힘이 될만한 벽사춤 교육기관과 무용자료관을 짓는데 쏟을 예정이다.

아울러 70세 이상 되신 ‘무용계 원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리 국내 무용계를 위한 발전적인 교류를 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공연때 관객들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 역시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공연 때마다 눈물이 난다”며 늘 손수건을 준비해 오곤 하셨다. 특히 일본 도공의 이야기를 그린 ‘혼이여, 혼이여’라는 작품을 공연했을 때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다.

아마도 아버지의 삶과 작품 주인공의 삶이 비슷한 데가 많아 남다른 감회가 있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공연 때는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는데 저렇게 잘 한다며”며 친구분들과 몇 번을 다녀가셨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 깊이 깨달았던 것은 내가 둘째 아이를 잃었을 때였다. 둘째는 비록 1년여를 살다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가족들에게 많은 선물을 남겨주었고, 나의 춤이 보다 예술적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둘째 아이를 잃고서 어머니에 대한 살풀이, 아버지의 비운에 대한 살풀이, 먼저 떠난 자식에 대한 살풀이를 어렴풋이나마 머리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큰 아들 용진이는 동생을 잃게 되면서 가족의 소중함은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춤의 길을 새로 발견해 나의 대를 이어 벽사춤 제4대 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은 무엇보다 나로 하여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는 모티브가 되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 아직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실 어머니! 하심(下心)의 춤, 희생의 춤, 누구나 쉽게 젖어들 수 있는 춤으로 꼭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겠습니다. 어머니, 이 불효 자식과 손자 용진이의 춤을 계속해서 지켜봐주십시오!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남에게 신세지지 말라

어머니는 아무리 어려운 처지라도 남에게 신세지는 것은 곧 빚을 지는 일이라 하셨다.

부득이 하게 신세를 진 경우라도 그 상황에서 갚을 기회가 있다면 잠을 줄여서라도 일을 해서 갚고, 그도 어려우면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꼭 갚아야 한다.

 

  1. 근검절약하라

옹기와 꽃을 팔아 가계를 유지하신 어머니는 버리는 물건이 없었다. 이는 어머니에게서 가장 무섭게 배운 진리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근검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내가 무용가로 성공한 이후 매달 드려온 용돈조차 근 10여년을 꾸준히 모아 무려 1천만원을 며느리에게 건네주실 정도였다.

나 역시 그러한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생활에 실천,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지하철을 이용한다.

 

  1. 인심을 잃지 말라

어머니는 사랑방에 가득한 머슴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일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도 무상으로 쌀을 꿔주셨다.

쌀은 나간 것의 반에도 못 미친 양만 돌아왔지만, 인심을 잃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며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후에 우리 형제들이 고향에서 사업을 일으키자 이웃들이 선뜻 나서서 도와주는 일이 많았다. 부모님께서 뿌린 온정의 씨앗들을 자식들이 거둬드린 셈이다.

 

  1. 부지런하라

일은 만들어서라도 해야 하는 것이 어머니의 생활수칙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 배운 부지런함 덕에 나는 지금까지 6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다.

 

  1.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

어머니는 늘 불의는 마약과 같아서 한 번 빠지게 되면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고 강조하셨다.

편법도 마찬가지. 실제로 불의와 타협하고 편법을 잘 쓰는 예술가는 그 한계가 금세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1. 말보다는 실천을 먼저 하라

자신이 실천하지 못한 것은 남에게도 어렵게 마련이다. 반면, 말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 해서 실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도 금물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도 공부하라는 말보다는 부모가 직접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강조하셨다.

 

  1. 항상 남을 위해 기도하라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하는 기도는 소용이 없다고 믿으셨다. 내가 먼저 남을 위해 기도해야 남도 나를 위해 기도하는 법이라며 남의 어려운 점을 먼저 살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어머니의 기도는 나와 다른 무용가들을 위한 것이었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가지

 

  1. 끈기를 지녀라

요즘 무용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폐중 하나는 춤에 대한 조급함이다. 어떤 춤이든 빨리 익혀서 끝내고 또 다른 것을 배우려 한다.

하지만 춤은 순서를 다 배웠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극기와 기교 단련을 통해 자신만의 춤으로 푹 삭아졌을 때 비로소 한 춤의 과정이 끝나는 것이다.

 

  1. 하심을 체득하라

분명 지금 무용계를 이끌어가는 대선배들은 지금의 무용과 학생들처럼 조기교육과 완벽한 체계를 통해 춤을 익힌 분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아니 아무리 가르치려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이 존재한다.

이 분들에 대한 하심(下心),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출 때 자신이 높아진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1. 타 예술 분야와의 교류를 가져라

춤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한 연기 연습과 국악 연주 기회를 많이 넓혀야 한다. 자신의 춤이 언제 어느 때 어느 예술과 결합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 춤을 생활화 하라

춤은 연습실이나 무대에서만 추는 것이 아니다. 밥 먹으면서 혹은 친구와 만나는 곳에서 춤을 떠올려야 한다. 한 마디로 춤 속에 빠져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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