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한국에서 중학생이 수업시간에 자는데 깨웠다고 여교사를 폭행했다. 쓰러트린 선생님을 올라타고 마구 폭행했다. 선생님은 안면 함몰로 수술을 받았다.

중이병 (中二病)이라는 말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또래의 사춘기 청소년들이 흔히 겪게 되는 반항, 불만, 가치관혼란과 같은 심리적 상태를 빗댄 말이다. 중2만 돼도 스승이 꾸중을 하면 대들거나, 인권침해로 경찰에 신고한다.

청소년들이, 자녀들이 무섭다고 어른들은, 부모들은 걱정에 한숨이다. 세태를 반영하듯 소위 <올바른 자녀교육>이라는 책도 서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한다.

훌륭하신 분들이 집필한 <올바른 자녀교육>이라는 책을 보면, 부모는 학업성적을 우선시하며 지식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 보고, 듣고, 읽는 것을 분석함으로써, 건전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라고 한다.

물질 (돈)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한다. 베푸는 미덕과 예의와 바른 말과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허지만, 이는 지극히 원론적이며 교과서적이고,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절대 다수의 부모들은 밥 먹고 살기에도 벅차다. 동틀 무렵에 집을 나서 해질 무렵에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돌아온다.

먹고 살기에 힘겨운 부모들에게 ‘올바른 자녀교육’은 뜬구름잡기다. 차분하게 마주앉아 가르칠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 ‘올바른 자녀교육’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희망고문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한 어린 소년이 학교에서 편지 한 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무도 이 편지가 우리의 삶을 바꿔놓을 줄 몰랐다. 아이는 선생님이 편지를 줬다며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잠시 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이며, 좋은 선생님도 없습니다. 당신이 아이를 가르쳐주길 바랍니다.”

엄마는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엄마는 항상 ‘너는 할 수 있다’고 소년에게 말했다. 엄마가 떠난 지 수년이 지나, 아들은 유능한 발명가로 성장했다. 어느 날 아들은 엄마의 유품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선생님이 엄마에게 보냈던 그 편지가 놓여있었다. 그는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우리 학교는 더 이상 이 아이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 퇴학처분을 내립니다.”

그는 편지를 읽고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다. “토마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변화 시켰다.” 진실된 격려 한 마디가 누군가의 삶 전체를 바꿔 버린 것이다.

그 애는 2003년 11월 12일생이다. 16살 소녀다. 그 애는 프라이머리 때부터 학교수업이 끝나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힙합을 배웠다. 때론 지치고 힘들어했다. 짜증이 늘어갔다. 그럴 때마다 그 애 부모는 ‘너는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10여년의 시간이 흘러 그 애는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열린 세계힙합대회에 뉴질랜드 힙합팀 대표 주전으로 출전했다. 세계 50여개국이 참가한 대회에서 그 애 팀은 세계 3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애는 수시로 학업 우수상도 받아온다. 근자에는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 할 곳을 찾았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지원서를 작성하고, 자기 소개서를 제출하고, 인터뷰에 합격해 근로계약서에 사인하고 땀 흘려 일한다.

그 애는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모은 돈은 가족이나 친구의 생일 또는 기념일에 선물을 사는데 쓴다. 그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 애는 견딜 줄 알고, 절약할 줄 알고, 나눌 줄도 안다. 그 애는 한국의 중2 또래다.

그 애 부모는 그 애에게 가르친 것이 없다. 힘들어할 때 격려하고,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그냥 당신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그것이 ‘올바른 자녀교육’이다. 단, 당신들의 삶이 올발라야 한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Previous article한밤의 정전소동
Next article세실리아 미혜 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