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힘’으로 4남매 키워낸 아방가르드풍 멋쟁이 어머니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매년 시행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신앙의 힘으로 1녀 4남 키워낸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참으로 감사드립네다. 우리 선희 오늘 소풍가는데 하나님께서 발길을 인도해주시라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 해주시라요. 선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늘 여호와의 법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로 크도록 해주시라요.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네다. 아멘!”
소풍가는 날, 신나서 잰거름으로 가는 나를 불러 세워놓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이렇게 기도해주시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도 어머니는 길가에 서서 이북말로 확신에 찬, 힘 있는 목소리로 기도를 하셨다.
그럴때면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에너지가 찌르르 찌르르 손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나직하면서도 힘 있는 어머니의 기도를 받으면 모든 불안이 사라지고 밝은 희망이 가슴을 가득 채우곤 했다. “나는 꼭 해내고야 말 것이다”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나에게 패배감이 자리잡을 곳이란 없었다.
어머니는 한 마디로 ‘신앙의 힘’으로 자식들을 키우셨다. 몸이 아플 때, 입학시험을 치를 때, 소풍가는 날, 생일날 등 특별한 날이든 학교 등교길이든 어머니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집 1녀 4남의 형제를 위해 늘 기도해주셨다.
내 기억이 닿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어머니의 새벽 기도, 자면서 듣는 나즈막한 어머니의 기도 소리는 나의 아침을 열어주는 하나의 시작이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 박금옥 여사는 기도를 참 잘하셨다. 어머니가 집안의 대소사 때마다 드렸던 예배의 기도문을 간략히 기록해두신 것이 있어, 일부를 간추려 어머니의 고희연 때 책으로 엮어냈다.
그 속에는 읽히는 글 하나하나마다에 어머니의 거룩한 신앙심과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흠뻑 배어 있다.
우리집은 다양한 예술가들이 공연하는 극장?!
‘자식의 운명은 늘 그 어머니가 만든다’는 나폴레옹의 말처럼 나의 운명도 어머니의 사랑이 충분한 자양분이 되었다. 극성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
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은 다수의 예술가들처럼 나는 눈물 젖은 빵을 씹거나 집안의 극심한 반대 등을 극복하며 예술가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나는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최근 나는 ‘한국 무대미술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선각자, 남자들도 제대로 해내기 힘든 분야에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당찬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곤 한다.
하지만 나의 성공 뒤엔 나의 어머니의 기도와 정성이 항상 함께 했다.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무대미술 분야의 선두자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모두 뛰어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으셨다.
마음이 약하고 소극적인 자세, 절제하는 자세, 문학적 자질은 아버지를 닮았고 음악적 미술적 자질은 어머니를 닮았다.
예술적 내용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바리’ 작품을 하면서 아버지가 나에게 준 영향이 얼만큼 큰 것인지를 발견하게 됐다.
모든 장면에서 열연적 심오한 철학적 추구를 하는 나의 모습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지리산 서남지구 전투사령관과 전북 도경국장 등을 지낸 아버지는 서예와 미술, 그리고 북장단에 뛰어났고, 어머니는 국악과 미술에 심취하여 스스로 가야금을 익혔다.
부모님은 수많은 국악인이나 미술가들을 초청하여 집안을 예술가들의 동고동락의 장으로 만들었다. 우리 집은 한 마디로 ‘다양한 예술가들이 공연하는 극장’이었다.
부모님은 주중열씨, 무궁화극단 등 각계 각층의 예술가들을 많이 후원했다. 연주할 공연장이 없으면 이들은 우리집 마당을 공연장으로 활용했다. 수많은 연극인, 영화인, 화가들이 우리집에서 먹고 자면서 공연도 하고 춤도 추었다.
예술가가 될 것인가, 법학도가 될 것인가
이렇듯 나는 어려서부터 예술과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극장, 음악회, 무용 등 예술과 관련된 공연이라는 공연은 다 볼 정도로 부모님은 늘 나를 데리고 다니셨고, 춤이든 가야금이든 뭔가를 가르칠 때면 꼭 명인들을 불렀다.
때문에 나는 다방면에서 이상적 예술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나는 ‘다재다능한 아이’가 돼버렸다.
공부를 잘해 대학교수, 글도 곧잘 써서 극작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 왔던 무용에도 재주가 있어 무용쪽으로도 진로를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무대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멕시코의 댄서 호세리몽이 바하의 프롤로그를 공연하고 있었는데, 이 공연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빈 무대에서 호세리몽의 몸짓 하나 하나가 생명의 리듬처럼 느껴졌다. 미칠 것만 같았다.
무대의 시공간이 우주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배우와 일치된 존재 시공간, 공간예술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구나!” 하며 작은 감동의 물결이 나의 가슴을 온통 메웠다.
이때부터 나는 공간예술에 크게 매료됐다. 건축이나 공간예술에 대한 관심이 점차 깊어지면서 공간을 만지는 학문이 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미국에 있는 삼촌이 무대미술 관련책자를 보내줘 무대미술이라는 분야도 조금씩 알게 됐다.
공간예술에 눈을 뜬 중학교 시절에 이어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극작가 돼야겠다는 꿈을 꾸곤했다. 주위에서 글을 잘 쓴다는 평을 들었던 나는 그 당시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글, 춤, 악기, 공부 등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했는데, 나중에는 재능이 많다는 것이 진로를 결정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됐다.
부모님은 평소 나에게 사회봉사를 매우 강조하셨다. 나의 노동, 시간, 땀, 기술, 생명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사회에 중요한 몫을 이루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특히 아버지는 내가 법학을 전공해 힘없고 배고픈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기를 원하셨다.
나는 예술가의 길을 갈 것인가, 법학도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예술의 세계에 마음이 더 끌리고 있었다.
“공부 잘하는 내 딸, 대학교수 됐으면 좋겠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얻은 결론은 영문학이었다. 이는 공간예술을 하든지 희곡을 공부하든지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이후 영문학은 나에게 있어 문학적 바탕을 쌓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예술을 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서울대에 가고 싶었지만 크리스천 학교를 권하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이화여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사실 내가 처음부터 나의 업으로 무대미술을 택했던 것은 아니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니 대학교수를 했으면 좋겠다”고 어머니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미국 유학 갈 때까지만 해도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공부하는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던 끼가 발동됐던 것이다.
68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나는 하와이대 대학원 연극과에 진학해 동양연극을 전공했다. 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했지만 ‘이 길이 내 길’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가슴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미술에 대한 갈망이 용솟음쳤다.
마침내 75년, 나는 뉴욕 폴라코프무대미술학교에 진학해 무대디자인을 공부했다. 그 학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무대미술 분야에서는 꽤나 이름이 있는 곳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생각에 40대에 무대미술 분야의 거장 체코의 라디슬리브 이코딜 선생님에게 사사를 받으러 갔다.
예술인은 늦게라도 자기 스승을 발견해서 좇아가야 한다. 스승이 없는 예술가는 없기 때문이다. 훗날 나도 제자들을 길러보니 스승은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느꼈다.
학교를 마친 후 나는 미국의 전문제작소와 극장 등에서 14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뭔가 정신적으로 고갈 돼가고 있음을 느꼈다. 예술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갈구하는 샘의 원천이 말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예술가로 성숙하지 못하고 성장이 정지된 듯했다.
아방가르드풍 멋쟁이 어머니!
또한 조국과 고향에 대한 향수가 병이 돼서 왔다. 한편 나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방황하며 살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념적으로도 반항하고 방황했다. 그래서 고국이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때 감옥에 가셨다. 아버지처럼 정직하고 의로우신 분을 감독에 가둔 박 정권이 나는 한없이 미웠다.
“고국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불의를 행하는 박 정권에 대한 적대감이 조국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차 올랐다.
아버지가 수감되자 우리집은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결국 옥고로 쓰러지셨다.
나는 14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감하고 짐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귀국해 몸져 누워 계시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는 “예술가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거냐?”라고 물으셨다. 평소 아버지가 강조하시던 내용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결론적으로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나는 아버지 앞에서 확실한 대답을 못했다.
이미 나는 마음 속으로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실 나는 개인 공부에만 신경쓴 부분이 없지 않았다. 조국에 대한 적대감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듯했다. 마음이 겸허해졌다.
사회봉사를 위해 나의 재능과 물질을 쓰라고 누누히 강조하시던 아버지, 나의 존재 이유를 사회 속에서 찾으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아버지는 끝내 옥고로 얻은 지병 때문에 1년 후인 84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남자처럼 씩씩하고 호탕한 성격이셨으며, 유머감각도 뛰어난 분이셨다. 어머니는 평소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거짓말을 했거나 예의를 지키지 않았을 때는 우리 앞에서 우셨다.
나의 어머니는 한 마디로 굉장한 분이시다. 어머니는 잘 생기셨고, 평양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신여성이시다. 아방가르드풍의 멋쟁이셨다. 운전도 잘 하셨고, 가죽 옷도 가장 먼저 입으셨다.
어머니의 자유분방한(?) 스파르타식 교육
어머니는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상은 아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숨어서 우는 그런 전통적인 어머니는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당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 맹렬 여성이었다.
어머니 당신이 먼저 앞서 뛰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뛰어야만 했다. 운동회 때도 같이 뛰면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 열성이셨다. 어머니의 열정은 나에게 유전이 됐다.
경성제국대학(현재의 서울대학교) 심상과를 졸업하신 어머니는 예술적인 교육은 전문가들을 부르셨지만 공부만은 직접 가르치셨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 교육도 어머니를 통해 주로 받았다. 외가쪽이 장로, 목사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변함 없는 충고자이자 스승이시다. 뭐든지 잘 모르겠거나 힘들면 어머니에게 여쭤본다. 어머니와 이야기하면 해결책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 인생의 동반자요, 좋은 친구였다. 좋은 선생님이기도 한 어머니는 삶을 통해 직접적으로 나를 교육하셨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과 함께 얘기했던 것 등 나는 모든 것들을 어머니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곤 했다.
동네 서점에도 어머니는 늘 같이 가셨다. 일본말로 된 책은 어머니가 읽으시고 얘기해주셨다. 이것 저것 좋은 것이라면 모두 함께 해주셨다.
나의 관심사가 곧 어머니의 관심사였다. 지금도 어머니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 어머니는 내가 하는 일, 읽는 책, 먹는 것 등 나의 모든 것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셨다.
물론 이것이 부담될 때도 많았지만 어머니의 애정은 실로 대단했다. 이런 까닭으로 솔직히 나는 가끔 갈등을 느꼈다. 다시 말해 어머니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어머니의 교육 방식은 스파르타식이었지만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무엇을 가르치시든 그 자체를 즐겁게 교육하셨다.
“이건 꼭 해야 돼!” 라고 억지로 교육한 적은 없다. 간섭이 아니면서 원칙에 대한 태도, 삶에 대한 태도를 직접 가르고 일방적으로 지시하기보다는 스스로 깨닫고 느끼는 방법을 택하셨다.
온몸으로 사다리 떠받치고 있는 어머니
어머니는 당당하고 자아가 강한 분이시다. 여자임에도 당당함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다.
현실적이면서도 강한 어머니와 낭만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나는 그래서 자주 충돌했다. 반면, 아버지는 나와 비슷해 부딪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와의 싸움은 대부분 성격차에서 오는 것이었는데, 그 싸움은 30분도 안간다. 어머니는 열정적이면서도 단순하셨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없다. 이러한 어머니의 행운의 성격을 나는 닮았다.
어머니로부터 열정을 이어받은 나는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먹지도 않고 일에만 전념하곤 했다. 무대미술을 위해 결혼까지도 과감히 포기했다. 그래서 쉰이 넘은 나이에 지금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높은 사다리를 올라갈 때면 “내가 왜 이 길을 택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어머니는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작업하는 딸이 혹시라도 다칠까 당신의 온몸으로 사다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무거운 페인트 통을 직접 나르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늘 나와 같이 호흡하는 나의 첫 번째 관객이었다. 나의 공연이 있는 날이면 항상 자리를 해주셨다.
국립극장에 어머니가 나타나시면 사람들은 “신선희 매니저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무대미술 연습장이나 제작장까지 직접 운전을 해서 나를 데려다주시고, 또 저녁 늦게나 작업이 끝나면 나를 데리러 오시곤 했다.
한국예술단 이사장이 된 후 나는 전보다 일도 만날 사람도 많아졌다. 그래서 요즘에는 어머니와 마감뉴스를 같이 보고 얘기하는 하는 정도가 고작이라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어머니는 여전히 교회 활동를 비롯해서 건강관리을 위해 수영을 하는 등 바쁘게 지내신다.
무대열정으로 잊혀진 연애감정
내가 우리나라에 돌아왔을 때 국내 무대미술 분야는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커리큘럼을 만들고 국제회의를 쫓아다니며 새로운 것들을 배워 나눠줬다.
그러기를 20여년, 요즘은 내가 무대미술의 일가를 이뤘다고 극찬해주시는 분들이 주위에 많지만 부끄러울 뿐이다.
후배 이학순씨는 이제 나와 겨루고 일할 정도로 알려진 사람인데, 무대미술 1세대가 벌써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어 크게 보람을 느낀다.
나를 향해 소리와 음악, 총체적 한국미의 장르를 개발한 예술감독, 제작자로 무대미술 부문에 있어서의 1인자라고들 하지만 솔직히 아직까지 예술을 총체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하고 있다.
낭만적이고 섬세하고 곱고 천진한 것이 예술의 본성인데 이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술은 위대한 형식보다는 진실한 내용,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이다. 마음에 감동, 자그마한 소중한 의미로 부각 되는 것이다.
예술은 보편적 진실이지만 다른 세계이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나는 무대미술에 흠뻑 빠져 있었다.
나의 모든 것을 무대미술에 쏟아 부었다. 제자를 기르고 인재를 양성하는데도 진이 다 빠지는데 인생의 동반자를 찾는데 쏟을 열정이 남아있지 않아서일까?
아니, 그쪽으로의 절실함이 적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독신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무대예술처럼 열정적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 생각의 간격을 내가 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무대미술에 미쳐 에로스적인 사랑이 없어서였을 터이다. 나는 무대 앞에만 서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연애 감정 또한 무대열정으로 인해 잊어버린다.
다시 태어나도 내 어머니의 딸로!
공연을 위해 무대제작에 들어가면 밤을 새기가 일쑤이다. 하루에 10시간 정도씩 한 달 정도 일을 해야 비로소 모습이 나온다. 그속에 혼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건 ‘세트’일뿐 ‘예술’이 아니다. 초혼의 세계가 바로 무대공간이다.
무대 작업이 시작되면 잠도 우선 순위에서 빠진다. 언제 무엇을 먹는지도 무시 당한다. 여성이 세트 디자인을 하기란 쉽지 않다. 항상 수십명의 거친(?) 남자 목수들과 일을 해야 한다.
실제로 나는 한숨도 안자고 48시간 동안 서서 작업을 진두지휘한 적도 있었고, 그러한 나를 보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우리나라 같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이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철저함과 혼을 불어넣는 예술가의 자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무대예술은 다른 분야보다 과학과 상당히 친하다. 무대예술은 아이디어 그 자체이다. 늘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 작업이다. 공간예술의 매력 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점이다.
예술가는 돈과 명예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 나를 거쳐간 사람들은 대부분 빠른 성공이나 많은 돈 등 세속적인 욕심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평소 “예술가로서 먼저 10년이 걸려도 물이 나오는 영혼의 샘이 돼야 한다. 예술가는 멀리 보며 장거리를 뛰고 하늘 높이 오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머니는 열정적인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늘 아름다운 것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셨다. 무엇이든 열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셨다.
어머니는 “여자가…”라든가 “나중에 시집가서…” 하는 식의 말을 단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으셨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훗날 저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을 단 한 번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의 어머니를 택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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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 기도하는 훌륭한 신앙인이 돼라
어린 시절 나에게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자장가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기도로 키우셨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 훌륭한 신앙인이 될 것을 강조하셨다.
- 정직하라
어머니는 지나치리만큼 정직을 강조하셨다. 평소에는 우리 앞에서 울지 않으시던 어머니는 우리가 거짓말을 했을 때는 눈물을 흘리시며 종아리를 치셨다.
- 남에게 먼저 베풀라
어머니는 “남에게 행복을 주고 베풀기 위해 투자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나무를 정성스럽게 기르면 열매를 맺고 그늘도 만들어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주듯, 남에게 베풀면 그것이 또한 자신에게 돌아온다.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것이다.
- 항상 당당하라
어머니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함이 자연스러웠다. 걸음걸이를 비롯해 말과 행동에 있어서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
- 비굴하지 말라
어머니는 불의에 대해 굽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다. 불의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시는 분이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시지 결코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으셨다.
-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라
어머니는 항상 당신보다는 내가 관심 있어 하는 일이 무엇이냐를 중시하고 도와주려 하셨다. 어머니는 우리를 향해서뿐만 아니라 늘 상대방이 관심 있어 하는 것, 상대방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얘기하신다.
-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함께 하라
나는 어머니와 공간예술에 대해 늘 토론하곤 했다. 어머니는 평소 공간예술과 극장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지만 최근에는 예술보다는 정치쪽에 관심이 많으시다. 큰동생인 신기남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웬만한 시사전문지는 다 읽으신다. 시사논평가나 전문 정치인 뺨칠 정도이다. 예술에도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자식의 모든 것을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 예술을 위해 살라
예술가는 돈과 명예를 좇거나 빨리 성공하려 해서는 안된다. 낭만적이고 섬세하고 곱고 천진한 것이 예술의 본성인데 이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술은 위대한 형식보다는 진실한 내용이다. 끊임없이 예술의 발전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려야만 예술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 제자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
참된 교육자는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는 자질이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감동해야 교육이 제대로 된다.
말 하나하나 신의 말씀처럼 생각하고 진리의 말씀처럼 느껴야 한다. 그것이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든 진실하다면 감동이 주어진다.
- 똑 같이 사랑하라
화목한 인간관계는 축복이다. 서로의 신의와 우애가 지속되려면 각자를 개성대로 똑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고 똑같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중요하다.
-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라
남에게 대접받으려면 먼저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마음에 새겨라. 늘 상대방 중심으로 생각하라. 나의 관심사보다는 상대방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필요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자세는 인간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 배움에는 정년이 없다
나는 40대에 체코에 사사를 받으러 갔다. 배움에는 나이가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늦게라도 자기 스승을 발견해서 찾아가야 한다.
예술가는 자기의 스승이 있어야 하며, 스승을 끊임 없이 사랑해야 한다. 스승 없는 예술가는 없다.
-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라
나는 간혹 글자도 읽을줄 모르는 일자무식인 사람들과도 함께 일을 하곤 한다. 극장에서는 이런저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그들을 편견 없이 대하며 그들을 통해 사람을 배운다.
- 열정 없이는 전문가가 될 수 없다
내가 우리나라에 돌아왔을 때 국내 무대미술계는 황무지 상태였다. 나는 그곳에서 땅을 갈고 조심스럽게 씨를 뿌려 가꿔나갔다.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무대미술에 빠져들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뜨거운 열정 없이는 결코 전문가가 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