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혼혈가수 박일준이 TV에 나온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머리는 완전 곱슬에 얼굴은 까맣다. 학창시절에 그는 ‘깜둥이, 몽키, 흑돼지’라고 놀림을 받았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발로 걷어차고, 도시락도 빼앗기는 심한 차별을 당했다고 했다. 영상을 보다가 문득 놀림 받는 한 소녀가 떠올랐다.
캐나다 밴쿠버공항에서 가이드와 미팅을 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록키산맥을 가기 위한 투어였다. 여행객 18 명은 서로 인사하며 4 박 5 일의 안전여행을 다짐하였다. 우리를 태우고 다닐 대형버스가 왔다. 일행 중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여자가 내 옆으로 왔다. 그녀는 나의 팔을 끼면서 “제일 연장자인 것 같으니 안전한 앞자리를 주면 어떻겠냐?”고 일행에게 물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지만 박수로 통과되었다. 당황한 나는 고개를 숙여 답례하였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여동생 부부와 같이 온 린다였다. 말소리가 크고 쾌활한 그녀는 팀의 반장이 되었다. 운전사인 톰에게 커피와 간식을 사다 나르고, 가이드 설명에 ‘excellent’라며 맞장구를 치면서 분위기를 잘 이끌었다.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커피를 들고 라운지에 앉아 일행과 담소를 나누었다. 결혼날짜를 정하고,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여행을 엄마와 함께 왔다는 멋쟁이 청년이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은 어떠냐?”고 린다에게 물었다. 그녀는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한국에서 당한 것에 비하면 미국은 차별도 아니다”라면서 머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린다는 한국에서 14 세까지 살았던 화교였고, 중학교 3학년 무렵에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쫓겨났다고 했다. 화교였다고? 모두 놀랬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는 물론이고 한국 역사, 정치까지 잘 알고 있었기에 믿기 어려웠다. 대구에서 음식점을 하는 부모님과 그곳에서 태어난 그녀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한국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고, 치마를 들추면서 ‘짱개 짱꼴라’라며 놀렸다. 어떤 애는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머리에서 냄새 난다고 달려와서 머리를 잡아 다녔다. 부모님 가게에서도 한국인 손님들이 ‘뙈놈 주제에’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녀는 방 커튼을 내리고 부모님 몰래 펑펑 운 적이 많았다. 어린 사춘기 소녀가 겪었을 수치심과 분노가 얼마나 컸을까? 분위기가 한동안 무거웠다.
유투브를 검색해보니 1975년 월남 패망 이후, 박정희 정권은 화교들의 재산권과 소유권을 박탈하는 정책을 폈다. 경제적인 영향력과 이익을 넓혀 가던 중국 화교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원인이었다. 서울 북창동의 차이나타운에서는 중국인들이 인종차별정책이라고 비난하였지만 할 수 없이 자식들을 데리고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한국정권은 자국의 유익을 위해서 취한 외교적인 정책이었지만, 이런 상황을 알 수 없었던 린다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으리라.
자연스럽게 주제가 인종차별로 흘러갔다. 수십 년을 디아스포라 (diaspora)로 살면서 겪은 차별들을 쏟아냈다. 다문화국가인 호주에서 사는 나도 씁쓸한 경험담을 말했다. 단풍이 곱게 물든 블루마운틴 등산을 마치고 나니 춥고, 속이 출출했다. 햇빛이 잘 드는 이탈리안 카페를 발견했다. 카운터에 있던 웨이트리스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손님도 없는데 10 분, 20 분을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다. 물이라도 달라고 카운터에 갔더니 눈길도 주지 않은 채 ‘Self Service’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물만 마시고 그냥 나와버렸다. 그녀의 냉랭한 태도는 이민자가 이민자를 차별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한국에서 온 여자분은 한국이 다문화사회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했다. 한국인 100 명중 외국인 수가 4 명이 된 게 현실이지만 거기에 비하여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부족하다. 특히 농어촌이나 수도권 변두리에서 편견, 차별에 대한 안타까운 사건들이 자주 일어난다. 심한 차별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이 자해하거나, 불량학생이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최근에는 외국인 근로자 유입과 국제결혼의 증가로 다문화가정의 청소년이 더 증가하고 있다.
특히 어린 나이에 겪은 차별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된다. 그들을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고,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 중요할 것 같다며, 중학교 교사답게 학교의 인종차별을 들려줬다.
미국의 경찰들이 흑인을 구타하는 장면들을 뉴스에서 종종 본다. 인종차별은 현재에도 일상에 만연되어 있다. 인류역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차별의 문제는 항상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개인이나 한 나라가 해결할 수 없는 세계적인 관심사이며 뜨거운 감자이다. 빈부의 격차로 가난한 나라에 대해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으로, 남녀 성의 차별로, 전쟁으로 식민지화된 나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같은 이유로 누군가에게 차별 받는다. 차별을 넘어서는 따뜻한 인류애, 인종차별과 편견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나의 상상 속에만 있지 않기를 바란다.
린다는 강하면서도 정이 많다. 눈이 하얗게 덮인 광활한 록키산맥을 설빙차로 순회할 때다. 옷이 얇다고 패딩점퍼도 빌려주고, 추울 땐 뱃속이 든든해야 된다며 큰 간식가방을 들고오더니 골라서 먹으라고 했다. 겸연쩍어하는 우리에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자신들은 역사적인 흐름에 어쩔 수 없는 희생자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태어난 대구를 세 번이나 방문했다면서, 고향처럼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니 ‘lucky’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에메랄드 보석처럼 아름다운 호수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의 린다, 씩씩하게 잘 있겠지?
글 / 이정순 (글무늬문학사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