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선물

“이모, 내 지갑이 없어졌어! 어떡해?” 다급한 하율이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까지 서려 있었다. 시드니 왓슨스 베이 (Watson’s Bay)에 도착해 막 페리에서 내리려던 순간 들려온 말이었다. 완벽하게 짜여 있던 여행일정이 그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걸까?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며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페리 위에서 사진을 찍다가 지갑이 바다로 떨어졌거나 배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던 벤치에서 일어날 때 바닥에 흘렸을 가능성. 어떤 경우든 상황은 최악이었다.

지갑을 되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몇 백 불의 현금, 은행카드 그리고 교통카드까지 들어 있는 가죽지갑. 만약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면 다시 찾을 수 있는 확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우리는 그 결론에 도달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느다란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기대와 절망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이십 대의 시간과 중년의 시간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뿐 하율이와 나는 결국 섞일 수 없는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삶은 저마다 다른 시간으로 흘러간다.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조차 서로 달랐다.

평소처럼 영어로 대화를 이어가자 하율이는 갑자기 영어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한국말로 말해달라고 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게 신나고 좋다며 수다를 떨더니 막상 이런 패닉 상황 앞에서는 외국어 실력도 무력해지고 만다. “몇천 불 잃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라고 위로하자 하율이는 “나한텐 그게 큰돈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나는 조카에게 이곳에 오자고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야, 꼭 보여주고 싶어’ – 그런 내 마음을 읽었던 걸까. 마지못해 따라 나설 때부터 이미 뭔가 잘못된 건지도 몰랐다. 여유를 갖고 천천히 여행하길 원하는 그녀의 스타일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걸 보여주고 싶었던 내 계획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하필 그 순간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인 것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바닷가에 비치는 노을을 보여주며 잘 여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안심시켰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장 온라인검색을 시작했다. 서큘러 키 (Circular Quay)에 있는 분실물신고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안내 받은 대로 신청서를 작성해 참조번호를 받았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인생에서는 예고 없이 고개를 들게 마련이다.

나름대로 마음을 다스리며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조카를 보니 짠한 마음이 일렁였다. 아름다운 바다와 자연의 풍경은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늦었기에 일단 저녁을 먹고, 다음 페리를 타고 돌아가 분실신고센터에 들러보기로 했다. 오후 4시까지만 운행되는 공공 페리는 이미 떠난 뒤였고 저녁에 운행되는 민간 페리는 따로 요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도 이날 처음 알게 되었다.

조용한 저녁의 서큘러 키에 도착하자 하율이는 지갑을 잃어버렸던 곳으로 정신 없이 달려갔고 나는 한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분실물센터에 근무하는 직원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하율이의 지갑을 한 직원이 발견해 보관 중이라는 것이었다. 분실신고가 접수되어 있었고 지갑은 확인 후 바로 돌려주겠다고 했다.

믿기 어려운 작은 기적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현금과 카드, 오팔카드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지갑을 받아 든 우리는 선물을 보상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 땅 호주에서는 여전히 남을 돕고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느낀 하루였다. 영국에 있는 아들도 “거기서나 가능한 일이야”라며 멀리서 함께 기뻐해주었다.

삶은 결국, 잃고 되찾는 여정의 반복이라는 것을. 우리가 손에 쥔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지만 그 과정을 지나며 마음은 더욱 단단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어져 간다. 진정한 가치는 그 물건 자체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해준 믿음, 그리고 다시 만남의 기쁨을 안겨준 세상의 온기 속에 있었다.

앞으로 또 무언가를 잃게 되더라도 하율이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그녀를 더 넓고 깊은 세계로 이끄는 삶의 초대일 테니까. 사라짐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이 건네는 또 하나의 따뜻한 선물임을 이제 그녀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글 / 송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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