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감싸 안는 한마디… “친구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 대신 죽었다”
종이비행기처럼 가벼워 보이는 주황색의 경비행기가 만년설로 뒤덮인 로키산맥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협곡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강의 줄기를 따라 가슴을 울리는 영화의 사운드 트랙은 관객을 작은 비행기 안으로 인도한다. 그곳엔 중년의 나이를 넘긴 빌리언에어 찰스 역의 앤서니 홉킨스와 사진작가 로버트로 분한 알렉 볼드윈이 보인다.
01_로버트
깎아 놓은 듯한 볼드윈의 잘생긴 얼굴이 역광을 받고 있다. 그 둘의 대화가 흥미롭다. 찰스가 로버트에게 자기를 어떤 식으로 죽일 계획이냐고 묻는다. 찰스에겐 패션모델의 젊은 아내 미키가 있다. 캐나다 현지 사진촬영을 위해 그녀의 전속 사진사인 로버트와 그의 일행들이 어제 별장에 짐을 풀었다.
살아 있는 요정이라고 불리는 엘리 멕퍼슨이 미키 역을 맡았다. 강물을 차고 뛰어오르는 잉어처럼 싱그럽고 활기찬 아내를 향한 주변 사람들의 주목과 찬사가 찰스에겐 달갑지 않다. 더구나 젊은 사진작가와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는 아내에 대해 찰스는 속수무책인 상태다.
그러던 중 로버트는 아직도 홀로 숲 속을 누비며 곰 사냥을 하는 인디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전설적인 그를 찾아 카메라에 담아보겠다고 모험을 나서며 찰스가 동행할 것을 권했다.
02_찰스
“삶이 참 고단하시겠어요.” 경비행기의 옆자리에서 로버트가 찰스의 신경을 건드린다. 무슨 소리냐고 묻자 찰스처럼 큰 부자로 산다는 것은 누가 친구이며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없이 많은 책임만 떠맡아야 하는 인생일 테니 그 얼마나 외롭고 고달프겠냐는 소리다.
젊음을 가진 남자의 도전이다. “전용기를 가진 남자를 동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내게서 부러운 점도 있잖아?” 부를 지닌 남자도 재빨리 도전장을 내민다. “음… 댁의 라이프 스타일이 맘에 든다고나 할까요. 여신 같은 부인도 부럽긴 하죠.”
“그래? 그럼 날 어떻게 죽일 건데?” 가뜩이나 아내를 누군가 채갈까 봐 예민해져 있는데 로버트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며 찰스가 던진 말이다. “무슨 그 따위 황당한 말을 하는 겁니까!” 하고 로버트가 펄쩍 뛰기도 전에 조종사가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철을 따라 이동하는 거위 떼와 비행기가 충돌했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꽃잎처럼 천천히 골짜기로 하강하던 동체는 두 동강을 내며 이름 모를 호수 속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조종사가 그 자리에서 죽고 로버트와 그의 조수 스티븐 그리고 찰스 이렇게 세 명의 남자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디 엣지’는 ‘전사의 후예’로 잘 알려진 리 타마호리 감독의 1997 년 작품이다. 이 영화는 대자연에서 길을 잃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었던 두 남자의 우정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관객에게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03_지혜로운 토끼
인디언들이 카누를 저을 때 사용하는 노 한 면에는 검은 표범이 조각되어 있다. 그렇다면 뒷면에는 무엇이 조각되어 있을까? 사고가 나기 전 별장에서 미키가 자기 남편은 모르는 게 없다고 으스대자 별장지기가 찰스에게 맞추면 5불을 주겠다고 내기를 해왔었다.
늘 진중한 호기심으로 책을 가까이하는 찰스는 표범 뒷면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는 토끼가 새겨져 있다고 답을 맞힌다. 왜 토끼와 표범이 짝을 이루느냐고 로버트가 묻자 크리 인디언들의 민속우화에 나오는 토끼는 표범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담배를 피우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거란다.
왜 토끼는 표범을 두려워하지 않냐고 누군가 또 물었다. 찰스는 토끼가 표범보다 지혜롭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준다. 얼어붙을 것 같은 호수에서 세 사람이 빠져 나왔지만 이제는 살아남아야 하는 문제가 절실하다.
캐나다의 앨버타 주가 남한 면적의 여섯 배가 넘으니 로키산맥 어딘가에 던져진 사람들을 구조기가 발견할 확률은 태평양에 떨어뜨린 숟가락 하나를 찾겠다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추위와 공포에 떨며 로버트와 스티븐이 절망스러워하자 찰스는 그들을 진정시키며 이야기를 건넨다.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는지 아느냐고. ‘어쩌다 내가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됐지? 나 바보 아냐?’ 그들은 수치심을 곱씹으며 절망 속에서 죽어간단다. 그런데 그들이 한 가지 안 하는 것이 있다는데 바로 생각하는 일이라고 한다.
04_서바이벌 게임
물론 영화 속 위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나도 산에서 잠시 길을 잃었던 적이 있다. 블루마운틴의 웬트워스 폭포에서 표지 한 개를 지나쳐 한 시간이 넘게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어두워지니 마음이 더 다급해졌던 기억이 난다.
영화 속 세 명의 남자들은 인디언의 통나무 집이 있는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순찰기가 그쪽을 살피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서다. 할 수 있는 한 찾는 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 있는 산의 봉우리 쪽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불을 피워 연기를 낼 계획이다.
그러다 로버트는 문득 추락 바로 전의 찰스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자신이 능력이 없어서 남의 아내를 넘보겠냐는 로버트의 항의가 시작됐다. 재산을 노리고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는 찰스의 대꾸에 ‘돈이 많으니 늘 그런 식으로 밖엔 생각을 못 하는거냐! 참 가엾다.’
부자들은 정말 못 말리는 족속이라며 로버트는 찰스를 대놓고 경멸한다. 겨울 산에서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적이 나타났다. 그리즐리 베어, 회색곰이다. 덤벼드는 곰을 피하던 찰스가 급류에 떠내려가는데 로버트가 필사의 힘을 다해 건져냈다.
힘을 약간만 덜 썼다 해도 찰스가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로버트가 자기를 살렸다는 것이 찰스는 믿기지 않는다. ‘네가 날 살려줬어! 네가 날 살려줬어!’ 목숨을 건진 일보다는 아내에게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감격이 더 크지 않았을까.
기쁨과 고마움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찰스의 태도가 쑥스러웠는지 로버트는 ‘스티븐이 보고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고마우면 나중에 맛있는 거 사주면 되잖아요.” 두 사나이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배고픈 곰은 그러나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자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결국 다리를 다쳐 피를 흘리는 스티븐에게 덤벼드는 회색곰을 찰스와 로버트는 막아내지 못한다. 스티븐을 잃고 곰에게 쫓기면서 두 남자에게 가장 다급한 일은 곰을 죽이는 일이었다.
찰스는 옛 인디언들의 지혜를 빌린다. 먼저 죽창을 단단히 꽂을 수 있는 바위가 쌓인 곳으로 곰을 유인한다. 창과 함께 싸울 듯이 가까이서 곰의 성을 돋구다가 놈이 덮치려는 순간 재빠르게 죽창을 바위틈에 꽂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곰이 자기의 무게에 의해 스스로 죽창에 찔리게 하는 방법이다. 불가능하다고 징징대는 로버트를 어르고 달래 결국 두 사람은 곰을 잡고야 만다.
05_이대로 이곳에…
이들의 행보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프로도의 여정만큼이나 멀고 험하다. 인간의 발로 걷기엔 절대로 끝날 수 없는 넓고 광활한 산맥 사이를 오르내리고 강을 찾아 골짜기를 헤매면서 자연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찰스가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말을 꺼낸다.
‘빌리언에어’라는 타이틀 속에 묶였던 자신의 삶이 그다지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 자연에 묻혀 사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강줄기 옆에 자리 잡은 한 채의 오두막을 발견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몇 자루의 총과 카누가 있는 것이 살았다는 희망으로 두 사람을 들뜨게 했다. 바로 그때 불을 피우려고 종이조각을 찾던 찰스는 자기의 주머니 안에서 로버트가 자신의 아내와 불륜 관계라는 확실한 증거인 영수증 하나를 발견한다.
미키와의 관계가 발각되자 로버트는 예전에 품었던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고 찰스에게 총을 겨눈다. 그러나 찰스는 피하지 않고 로버트를 향해 똑바로 다가온다. 배신감이 죽음보다 더 큰 무게로 찰스에게 살아갈 의미를 앗아간 것 같다.
다가서는 찰스에게 밀려 뒷걸음질 치던 로버트는 곰을 잡기 위해 파놓은 오두막 옆의 웅덩이에 빠져버렸다. 웅덩이 속에 박아 놓은 죽창은 용케 피했지만 로버트는 다리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한다.
06_돌아가야 하나
로버트를 웅덩이에서 끌어내어 응급조치를 해주고 카누에 태운 후 찰스의 힘겨운 여행이 계속되는데… 강기슭 바위 위에서 잠시 쉬며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인생의 어리석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로버트는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이렇게 끝나는 자신의 운명이 억울하단다. 톱 모델의 전속사진사가 삶에서 이룬 것이 없다는 한탄은 찰스와 자기의 처지를 비교하며 늘 어딘가에서 갈증을 느꼈을 로버트의 빈곤한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찰스에게 다시 돌아가면 무엇을 할 거냐고 묻는데 찰스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답한다. 로버트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그에겐 살아서 돌아가도 면목이 없는 인생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회의와 두려움이 있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찰스는 자기가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한다.
아내를 마주해야 하는 고통이 그를 기다릴 테니. 자기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로버트는 가슴 아픈 회한 속에서 목이 메어 자기의 잘못에 용서를 구한다. 로버트의 눈을 지긋이 들여다보며 찰스는 자기를 두고 죽지 말라고 다독인다.
그때 그들을 찾는 구조기가 저 멀리 떠돌며 모습을 드러냈다. 찰스가 있는 힘을 다해 옷가지를 흔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리니 막 그곳을 떠나려던 정찰기가 방향을 틀어 다가온다. ‘로버트, 우리 드디어 여기서 나가는 거야!’ 로버트를 부축하려 돌아섰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07_모든 공로를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중요한 요소가 몇 가지 있단다. 그 중의 하나는 일이 성사되었을 경우 상대에게 공을 돌리는 태도라고 한다. 둘이 같은 일을 이루어낸 후에 각자가 그 일의 구십 퍼센트를 자신이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니 놀랍지 않은가?
‘당신의 친구들은 어떻게 죽은 거죠?’ 찰스를 기다리던 기자들이 그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 질문을 받고 찰스는 잠시 생각한다. 나라면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스티븐은 곰에게 당했고 로버트는 날 죽이려다 그만 웅덩이에 빠진 걸 제가…” 찰스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이 자기를 구하기 위해 대신 죽었다고 답변했다. 이십 년 전에 본 영화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이 마지막 말 때문이다. 구차한 설명을 일축하며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한마디.
필립 얀시는 크리스천 영성에 관한 책을 집필해 기독교인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는 목사이자 작가이다. 그가 쓴 책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의 첫머리에 나오는 감사 말에는 편집자의 제안으로 원고의 50%를 줄었다는 사실과 함께 구체적으로 받은 도움의 내용이 적혀 있다.
그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자신의 글을 과감하게 수정했는지 보여준다. 그의 글이 크게는 뼈대부터 소소하게는 문학적 표현까지 누군가의 손을 거쳐 출판됐다는 고백이다. 그렇다고 그 책을 도움을 준 사람들 쓴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나도 글을 쓰고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기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고 의견을 듣는다. 그 중 몇몇 사람들은 큰 그림 속에서 전체의 구성과 주제를 바로 잡아 완성도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그런데 조사 등을 빼거나 더하는 사사로운 지적 한두 개로 글 전부를 손본 것처럼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간혹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억울하다는 감정이 얼마간 내 마음을 짓누르던 때가 있었다. 그때 구원처럼 떠오르던 영화가 ‘디 엣지’였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수고와 애쓴 공을 타인에게 넘겨야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내 친구들은 나를 위해 죽었습니다’ 찰스가 했던 말이 이렇게 가끔 내 기억 속에 되살아나 준다면…. 숨이 끊긴 로버트를 품에 안고 그의 이마를 가만히 쓸어 내리는 앤서니 홉킨스의 손길이 잊히질 않는다.
글 / 박해선 (글벗세움 회원·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