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인사

미뤄왔던 한국 행을 결정하며 마음 한구석 응어리진 미련도 털어버려야지 하는 결심을 했다. 나이들어 친구를 잃는다는 건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이별을 하는 건…. 몇 십 년의 세월 속에 녹아있는 추억들이 떠올리기에도 아픈 기억들로 바뀌고, 마음 한 구석에 뻥 뚫린 구멍이 생겨버렸다.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는 여전히 힘들었다. 아홉 시간이 넘도록 좁은 좌석에 쭈그리고 앉아 비몽사몽을 헤매다 보면, 이제는 볼 수 없는 정수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몸도 힘든데 마음까지 힘드니, 이래서 내가 안 오려고 했는데….

하루를 꼬박 앓고 나서 이 일 저 일을 처리하고 나니 사흘이 금방 날라갔다. 그래도 3년 만에 친구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바쁜 일들을 대충 해치우고, 모이기로 한 목동으로 택시를 탔다. 차가 밀려 조금 늦게 도착한 아파트 주차장에 모자를 쓴 아줌마들 셋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활짝 웃는 웃음에 피어나는 주름이 마른 꽃같이 아름답다. “잘 지냈지?” 하는 안부와 “오래간만이야. 왜 이리 안 왔어?” 하는 시끌시끌한 환영인사와 함께 차에 오르자, 언제나 다섯이 꽉 차 빡빡했던 자리가 헐렁하게 느껴져 허전함이 몰려왔다. 물결을 타듯 부드럽게 파킹 장을 벗어나는 커다란 세단 위로 낙엽 하나가 내려앉았다.

우리는 대학선배인 부영 언니가 지은 펜션으로 향했다. 건축과를 나온 언니는 강원도 인제 쪽에 자기 취향에 맞게 멋진 펜션을 지어놓고, 은퇴한 남편과 함께 유유자적 전원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막내로 자라 동생들이 고프다며 대학시절부터 그렇게 우리를 챙기던 버릇이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서울생활을 접은 언니를 보러 우리는 해마다 가을이면 언니의 펜션을 찾곤 했다.

화려하게 색을 입은 야산들과 벌건 살을 드러낸 밭들이 누워있는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자 고즈넉한 산골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멋대로 뻗은 나뭇가지 끝에 붉은 단풍이 수줍게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잔잔한 계곡물에는 멀리 보이는 알록달록한 산등성이 비쳐 아른거리고 있다. “역시 가을은 한국이야.” 내 감탄사에 친구들이 까르르 웃었다.

정수가 그렇게 간 뒤로 한번도 못 들린 우리에게 언니가 반가움을 빙자해 욕을 한 바가지나 하며 우리를 맞았다. 나도 그 동안 한국에 못 나왔고 정수도 없으니 자연스레 삼 년간 발을 끊은 모양새가 되어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 하는 우리에게 “아직 단풍이 좋지? 오는 길에 많이 봤어? 호주는 단풍이 시시하다며…” 준비한 음식을 내었다. 우리 모두 일부러 짠 것처럼 정수 이야기는 빼고 수다를 떨었다. 나도 괜찮은 척 삼 년간 쌓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술도 한잔 걸친 채 늘어져 있다 보니, 산 속의 밤은 빨리도 찾아와 저 멀리 노을이 황금빛 비단으로 떨어지는 해를 감싸고 있다. 그 아름답고 처연한 색이 정수를 닮은 것 같아 울컥했다.

새내기때 만나 대학시절을 함께 보내고 각자 결혼을 해 가정을 일구면서도 우리 다섯은 주구장창 어울려 다녔다. 서로의 성인시절이 함께 녹아있어 누구 하나를 떼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우리의 첫 번째 이별은 내가 호주로 이민을 간 것이었다. 모두들 허전해 했지만 어느 해는 친구들이 호주로 여행을 와 집에 함께 묵으며 회포를 풀고, 나도 이민생활이 자리가 잡히자 해마다 한국으로 나가 그리운 얼굴들을 보곤 했다.

두 번째 이별은 참 갑작스럽게 왔다. 자식이 없어 남편과 여행을 다니는 게 취미였던 정수는 그 여행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운전을 하던 남편은 경상에 그쳤지만, 정수는 심하게 다쳐 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나는 그 애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연락을 받았다. 처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에 만나 언니네 펜션에서 까불고 놀던 애가 죽다니…. 나는 현실을 부정하고 정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버렸다. 한국에 나가면 묻어두었던 현실이 드러날까 미적미적 한 해 두 해를 그렇게 보내다 보니 3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늦은 밤, 잠이 안 와 뒤척이던 나는 패딩을 걸치고 모두가 잠든 방을 빠져 나왔다. 앞마당으로 나서자 차가운 밤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나는 조심스레 발자욱을 옮겨 숲으로 난 오솔길로 향했다. 강처럼 흐르는 검은 구름 사이로 낯을 숨겼던 달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자 창백한 달빛을 마주한 개가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운 달빛이 그림자를 머금고 뻗어나가다 뭉글거리는 구름에 쫓겨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밤기운에 취해 어슬렁거리다 눈을 드니 정수와 함께 놀던 고목이 앞을 가로막았다. 둘 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면 잠을 안자고 이 나무 아래 주저앉아 서로의 속내 깊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는데….

아름들이 고목의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울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가 어둠에 휩싸인 숲을 더욱 스산하게 했다. 저기 어디서 정수가 울고 있는 것 같아 거친 등걸을 쓰다듬자 여태까지 못 흘렸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흐느낌이 잦아들 무렵, 먹구름이 후드득 빗방울을 뱉어내더니 순식간에 쏴아 하고 소낙비가 쏟아졌다.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혹시라도 미끌어질까 조심조심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폭우 속에 얼룩진 그림자로 보이던 펜션 건물이 조금씩 선명하게 드러났다.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올 때처럼 갑작스레 그치자 물비린내를 풍기며 어둠에 잠겨 드는 오솔길로 향했다. 낮은 돌담 위로 미끈미끈한 이끼가 두드러기처럼 퍼져 있었다. 군데군데 무너진 돌담 위로 내려앉은 슬픔의 느낌은 가을비처럼 전신으로 스며들었지만, 한껏 쏟아낸 눈물로 조금은 후련해진 나는 이만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이 되자 반짝이는 햇살이 회색 빛 풍경에 크레파스로 칠한 듯 색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우거진 잡목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잎에 얹힌 빗방울을 감싸고 반짝였다. 창문을 열자 열심히 거미줄을 보수하고 있던 거미가 후두둑 도망을 간다. 거미줄에 맺힌 이슬방울도 반짝이며 흔들린다.

떠날 준비를 마친 친구들과 함께 냇가로 내려가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수에게 안녕을 해야겠다. 나는 붉게 물든 단풍잎을 따 물에 흘려 보내며 정수에게 말했다. “잘 가, 정수야. 내가 너무 늦었지?” 가만히 시냇물에 손을 넣고 흔들자 정수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시린 손을 털며 마음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정수에게 목에 걸려있던 인사말을 내뱉고 나니, 가슴에 뭉쳐있던 응어리가 쑥 빠져나갔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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