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눈치를 보는 것과 센스 있다는 것의 차이는…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는 불편할 수도, 누군가에게는 시시해서 이야깃거리도 아닐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얼마 전 친구와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에서 담근 갓김치를 곁들인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공원관리자가 바람청소기로 깎은 잔디를 정리하고 있었다.
01_흥분해서 말을 못 잇는 내게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 둘은 날리는 먼지를 피해 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간식으로 가져간 복숭아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던 중 느닷없이 친구의 행동이 너무 뜻밖이어서 나는 ‘느닷없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녀가 먹고 난 복숭아씨를 훌쩍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잔디가 곱게 깔린 공원에서 더구나 조금 전 청소가 막 끝난 상황이 아닌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질겁을 하는 나에게 “썩으면 다 거름이 될 텐데 뭐가 문제야?”라 응수한다.
먹고 난 씨를 버리라고 차 뒤 트렁크에서 빈 통 하나를 가져다 놓은 걸 못 본 걸까? 호주의 산이나 바다를 다니다 보면 아기들이 떨어뜨린 공갈 젖꼭지나 머리핀이 가끔 눈에 띄기는 한다.
그러면서도 흔하게 굴러다닐 것 같은 음료수 깡통 한 개를 보기 어렵다. 잔디에 던졌다고 해도 당황스러울 텐데 더군다나 주차표시가 되어 있는 차도로…. “음식물을 그렇게 버리면 쥐나 벌레가 꼬이고…” 흥분해서 말을 못 잇는 내게 친구는 되려 ‘별일 다 보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쓸데없이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얼마 동안 나는 큰댁에서 살았다. 큰어머니가 당신 막내딸과 나를 비교하면서 은근하게 눈치 주던 기억이 지금까지 또렷하니, 남의 눈치 보는 성격이 그 시절 형성됐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겠다.
02_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타고난 내 기질이었던 듯
그런데 큰어머니에게 눈치를 받았던 근원적인 이유야말로 내가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큰집 식구들에게 ‘시설스럽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성질이 차분하지 못하여 말이나 행동이 부산하다’는 의미다.
다락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가 큰어머니에게 얼마나 정신 산란한 존재였을까. 내가 어리기도 했고 언제나 내 편을 들어 주셨던 친할머니가 살아 계시기도 했지만 사촌 동생 미경이가 늘 조신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걸 보면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타고난 내 기질이었던 것 같다.
이민도 친척 집에 가서 지내는 것처럼 기존의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걸 몸으로 체득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 내 어떤 행동에 대한 호주 사람들의 은근한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시절이 꽤 길었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른 뒤에야 그것이 눈치를 주려는 시도라는 걸 알았다. 커피숍이나 백화점 점원도 한 사람과의 볼일이 끝난 후라야 다음 손님을 맞는데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서도 나는 내가 원하는 속도로 용건을 처리하려고 했던 탓이다.
물론 나도 내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간단한 것 한 가지만 물어보면 되는데 그 짤막한 질문 하나를 위해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03_불특정 다수인보다는 친구 향한 배려심이 우선해야 했는데…
한국에서는 설렁탕 다섯 개를 쟁반에 받쳐 들고 비지땀을 흘리는 종업원에게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여기 깍두기 빨리 주세요!” 펄펄 끓는 뚝배기가 쏟아지는 날에는 대형사고가 날 판인데도 “아예! 지금 나갑니다!” 손님들의 성화에 골을 내기는커녕 사물놀이 꽹과리에게 징이 화답하듯 종업원의 장단을 맞추는 소리가 신명 난다.
멀티 타스크가 가능한 대한민국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는 손님들에게 이리도 신속하게 대처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몸짓으로 담당자의 주의를 끌려는 호주에서의 나의 시도는 그들이 내게 눈길도 주지 않는 것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남의 눈치를 보는 것과 센스 있다는 것의 차이를 김창옥 강사가 ‘포프리쇼’에서 정의 내린 적 있다. 센스는 자존감이 확고한 상태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고 눈치는 내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서 주변을 살피는 것이란다.
그런데 삶에서는 그 경계선이 늘 모호하다. 하지만 공원 어딘가에서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인 그 누군가보다는 내 친구를 향한 배려심이 우선해야 하지 않았을까.
환경을 생각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친구를 무안하게 했던 나의 태도는 공중도덕이 결여된 아시안이라는 호주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 싫은 나의 눈치 봄이었다. 늦은 나이에 남의 나라에 와서 늘어난 내 눈치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지금부터 시작이다.
글 / 박해선 (글벗세움 회원·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