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이라는 역사 코미디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삼국통일을 목표로 신라는 김유신장군이 지휘하는 5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로 진격했다. 백제 계백장군은 신라군의 10분의 1에 불과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진을 쳤다. 신라와 손잡은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은 서해 바다로 배를 타고 들어와 백제를 공격하기로 했다. 백제의 운명은 추풍낙엽, 풍전등화였다.
백제 의자왕은 어전에서 왕족들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회의를 열었지만 싸울 군사도 무기도 변변치 않아 공허한 말싸움만 이어졌다. 그러던 중 왕자 하나가 나섰다.
“아부지요, 나한테 묘수가 있당게라”
“뭣이여?
“소정방이 헌테 뇌물”
”뇌무~울?”
“아, 그란디, 이짝에서 멕일라고 혀도 저짝에서 야멸차게 거절해 뿔먼 어짤 것이냐?”
“고것이 바로 뇌물의 묘미여라. 한번에 덥썩 받아 처묵는 것은 뇌물 축에도 못 끼제라. 허허~ 이사람이, 이거 참, 험시롱 거절하는 과정 속에서 이심전심으로 통해 불고 그냥 모든 것이 아쌀하게 정리 돼 부는 거, 고것이 바로 뇌물의 진수랑게요. 고기도 묵어본 놈이 안다고 뇌물도 묵어본 만큼 아는 거지라.” 코미디영화라고는 하지만 대사에 뼈가 들어있다.
뇌물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눈에 띄는 뇌물이 있고, 눈에 띄지 않는 뇌물이 있다. 눈에 띄는 뇌물은 현금, 수표, 명품 백, 목걸이, 향수, 화장품 등등 실물들이다. 눈에 띄는 뇌물은 증거로 남는다. 이런 뇌물을 먹는 쪽은 초짜이거나 아니면 ‘감히 누가 나를 건들어?’라며 위세 당당한 권력자이거나, 그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권력버러지들이다.
눈에 띄지 않는 뇌물은 권력, 승진, 영전, 자리보전 같은 무형의 것들이다. 뇌물의 고수들은 눈빛과 표정과 말투로 이심전심 통한다.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이짝이나 저짝이나 입만 다물면 모든 것이 아쌀하게 정리돼 버린다.’ 그렇지만 세상사 모르는 것, 이짝에서 입을 열어버리면 저짝은 패가망신할 수도 있다. 그래서 뇌물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속 편한 거다.
대한민국 대통령마누라가 눈에 띄는 뇌물을 덥석 받았다가 들통이 났다. 뇌물 먹인 이짝이 300만원이 넘는다는 고가의 명품 디올백을 포함해 화장품세트랑 샤넬 향수를 먹였다고 불어버렸다. 나라가 뒤집어졌다.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진실을 밝히라고 들고 일어났다.
대한민국 법은 대통령이나 대통령가족이 뇌물을 받으면 해당기관에 신고하게 돼있다. 그 물건은 대통령기록실에 보관하게 되는 거다. 그런데 대통령마누라가 쓱싹해버린 거다.
뇌물사건이 공개되자 ‘여사님’은 자신의 입에 굳게 지퍼를 채워버렸다. 그러자 호가호위하면서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원칙도, 염치도, 양심도 ‘그게 뭔데~’ 하는, 낯가죽 두꺼운 권력떨거지들이 앞장서서 입에 거품을 물고 악다구니 처대면서 ‘여사님’의 무죄를 주장했다.
명품 백과 화장품세트 향수 모두 ‘뇌물’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거다. 그건 여사님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라고 우겨댔다. 그러자 이짝에서 그 물건들은 자신과 관련된 모종의 상황에 도움을 부탁하는 대가성이었다고 실토했다. 그런데도 뇌물인지 선물인지 판단하는 정부기관에서는 이짝의 대가성 실토를 뭉개고 선물이라고 확정해버렸다.
대한민국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에는 뇌물은 법을 위반한 것으로 처벌대상이지만 선물은 감사의 표시로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다는 거다. 그러니 여사님은 무죄라는 논리다. 여사님과 이심전심으로 아쌀하게 정리했다.
국민들은 그것이 뇌물이 아니고 선물이라면, 힘있는 자에게 먹이고 싶은 뇌물은 힘있는 자의 마누라에게 먹이면 선물이 되는 거냐고 되물었다. 권력떨거지들은 불리하고 난처하면 으레 보여주는 주특기인 마이동풍 우이독경 입 닫고 귀 닫았다. 국민들은 이현령비현령 (耳懸鈴鼻懸鈴)이 돼버린 대한민국 법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이냐며 분노했다.
눈에 띄지 않는 뇌물 먹이는데 경험이 풍부한 저짝들은 ‘고기도 묵어본 놈이 안다고 뇌물도 묵어본 만큼 아는 것’처럼 나라를 억지와 궤변의 비정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명품에 환장하는 해괴한 뇌물정부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25여년전 어느 날엔가 아들로부터 손지갑을 선물 받았다. 당시 명품이라고 널리 알려진 구찌 (GUCCI)였다. 나도 시중에 나도는 폼 나는 고가의 명품들을 갖고는 싶었지만 구입하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구입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사실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도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비싼 명품지갑을 선물해준 거다. 가슴이 퉁탕거리며 흥분했다.
한참 후, 아들에게 물었다. “그 비싼 걸 뭣 하러 샀냐?” 아들이 그랬다. “비싸지 않아요. 짝퉁이에요.” 나는 순간 당황하고 찌르르하고 울컥하고 뭉클했다. 그건 아들의 속 깊은 선물이었다. 아들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이었다. 짝퉁이면 어떤가? 나에겐 진품과 다름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손지갑을 사용하고 있다. 비록 세월이 많이 흘러 모양은 낡고 색깔은 퇴색되었지만 짝퉁일지라도 아직 헤지거나 찢어진 곳은 없다.
나의 것 외에는 곁눈도 주지 않고 짝퉁선물에도 감격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뇌물이고 무엇이 선물인지 안다. 서민들은 만져볼 수도 없는 명품을 뇌물이니 선물이니 하면서 멱살잡이하는 세상이 떫고 쓸쓸하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