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삶

80대 초반의 일본인 코이치와 30대 초반의 이란인 안나는 카운슬에서 운영하는 무료 영어교실에서 만난 클라스메이트이다. 이들과 함께 4년 전 영어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안나와는 책을 주제로 자주 이야기 했었기에 나의 독서모임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코이치는 몇 년 전 미니 스트로크를 겪고 난 후 약해지는 인지력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도움을 주고자 독서모임을 제안했다. 젊은시절 신문사의 해외파견 기자로 일했었던 코이치는 첫 번째 책으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추천했다.

중학교 아님 고등학교 때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100권의 권장도서 읽기 비슷한 방학숙제로 노인과 바다를 접했다. 얇은 두께의 책을 보고 기대하며 읽었지만 끝의 허무함에 명작이란 모두 이렇게 난해한 건지 의아해했던 것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많은 책들 중 100 위 안에 든 책의 내용이 고작 한 노인의 고기잡이 이야기가 다라니! 그 이야기의 끝은 또 얼마나 어이없게 시시한지!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게 피곤한 몸을 낡은 침대에 눕히고 좋은 꿈을 기대하며 잠에 빠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밋밋한 늙은 어부의 실패한 고기잡이 이야기에 실망이 전부였던 책이었다.

코이치는 젊은 시절 노인과 바다의 무대인 쿠바의 해변마을을 방문했었다고 한다. 보관하고 있던 쿠바신문에서 오려 둔 헤밍웨이의 사진이 실린 기사를 가져와 보여주기도 했다. 코이치가 공유한 정보들은 안 좋은 기억을 주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에 거부감을 줄여 주었고 무엇보다 번역이 아닌 원문의 글을 읽는다는 도전에 가슴이 뛰었다. 한 주에 단지 20 페이지씩 읽고 함께 모여 돌아가며 7 페이지씩 낭독을 하고 떠오른 생각들을 이야기 하기로 했다. 글을 소리 내어 읽고 기억나는 부분을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는 방법은 나이 든 분들의 인지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어디에서 듣고 적용한 것이다.

독서량이 많지 않았고 매주 토론할 주제를 정해야 했기에 좀더 세세한 부분에 집중하며 매 문장들을 주의하여 읽었다. 그전에는 마놀린의 존재는 기억의 저편 귀퉁이에 미미하게 매달려 있었다면 이번에는 10대의 어린 소년으로서 나이든 산티아고에 대한 애정과 행동에 눈이 많이 갔다. 부모들은 산티아고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소년은 산티아고와 애정 어린 우정을 쌓으며 그의 필요를 기꺼이 챙겼다. 84일 간의 공백을 깨고 노인이 잡은, 비록 뼈만 남은 청새치지만 그의 성취에 누구보다 큰 자부심을 느끼며 지친 노인을 보살핀다. 지쳐 잠든 노인 곁에서 험난한 사투의 결과로 상처투성이가 된 손을 붙들고 울음을 흘리는 대목에서는 소년의 말랑한 심장에 감동이 올라왔다. 나이를 초월한 깊은 애정과 우정을 나눌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러운 점이었다.

공감도 이해도 불가능했던 10대 때와는 다르게 50 대에 읽은 노인의 이야기는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배 주위를 스쳐가는 바다새들에게 건네는 노인의 독백이나 삶의 터전인 바다에 대한 사랑, 제한된 상황에서도 경험에 근거한 냉정한 판단 등 묵직한 걸음으로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에 마음이 가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그만큼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쌓아온 경험들이 노인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젊은 어부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배와 비교되는 낡고 오래된 배와 도구에도 불구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거나 부족한 소유를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진 것이 더 좋다는 환상이나 자기암시와 같은 정신승리도 하지 않았다. 3일간에 걸친 물고기와의 사투에서 보여지는 노인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전문성에서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책을 읽어갈 수록 처음에 그렸던 가난하고 늙은 어부인 산티아고는 점점 삶의 무게를 이해하고 인생의 심술 앞에 겸손할 줄 아는 하지만 굽히지 않는 신념을 지키며 삶에 최선을 다하는 멋진 사람으로 바뀌었다.

많은 저서에 그의 경험과 아픔 그리고 시대의 비판을 담았던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이야기로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인생이란 바다에서 오랜 시간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내일을 기약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라고, 그러다보면 기다리던 행운이 왔을 때 준비되어 있을 거라고 조언하고 싶었을까? 오랜 기다림 뒤에 찾아온 귀중한 기회에서 기대한 만큼의 성공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위로하고 싶었을까?

한가지는 확실하게 나의 마음에 다가온 것이 있다. 노인은 허투루 어부의 삶을 살아 오지 않았다. 마을의 어부들도 인정하는 낚시에 있어서는 젊은 시절부터 남다른 성취를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여정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노인에게 자존감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리라. 겉으로 보여지는 도드라지는 결과가 다가 아니라 내면에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산티아고는 내가 지향하는 노인의 삶을 보여주었다. 가지고 태어난 재주가 적어 보여지는 그리고 보여줄 수 있는 결과가 초라할지 모르지만 매일의 삶의 맛을 느끼며 자존감 있게 늙어가는 노인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삶의 닻인 나의 신념이 바른 기초 위에서 잘 고정되어 있는지 살피며 그 신념에 어울리게 살아가려 노력할 것이다. 훗날 나이를 더 먹고 난 후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게 된다면 지금의 산티아고와는 다른 그를 만나리라.

그때는 비슷한 길이를 살아온 그와 나의 삶을 비교하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나의 한걸음 한걸음이 그의 발자취와 그다지 많이 다르지 않기를 희망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나의 하루를 걸어간다.

 

 

글 /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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