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에게

경화야, 유일아!

나는 희생 배려 양보 같은 단어들은 유토피아 (Utopia)에서나 체험할 수 있는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단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단어들은 입만 열면 고고한 체, 지식인인 체, 순수한 체 코스프레를 하는 인생들이 통상적으로 내뱉는 가식적인 레토릭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단어들은 나에게는 억지스럽고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너희들을 처음 만난 것이 8년전이었다. 그때 너희들은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사랑으로 함께 살자는 약속을 하고 가정을 꾸렸었다. 너희들은 초등학교 때 만났다고 들었다. 서예반에서 함께 붓글씨도 배웠다고 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서로를 엿봤다면서? 너희들의 만남은 운명이다. 어느 날 경화가 말했다지. “유일아, 너 나한테 장가와라. 그러면 너는 행복할 거다.”

그래, 그런 마음으로 꽃처럼 살면 된다. 꽃은 다툼이 없다. 행복은 다툼이 없는 거다. 꽃은 피고 지는 것을 서두르지도 않는다. 꽃은 피어야 할 곳에 피어야 할 때에 어김없이 그 자리에 피어있다.

유일아, 경화야!

나 작은애비가 이번에 너희를 만난 것은 너희들 첫째가 태어나고 6년만이다. 그 사이에 너희들은 사랑의 목표가 아닌 사랑의 결실 셋을 보듬고 있었다. 큰 하나는 ‘은율’ 작은 하나는 ‘한율’ 그리고 더 작은 셋째는 뱃속에 품고 있었다.

결혼을 해도 하나도 키우기 힘든 세상이라고 무자식 상팔자라며 자식에게 설음 받은 부모들의 자학적인 한숨을 흉내 내면서 자식 갖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결혼도 포기한다는데 너희들은 셋을 품었으니 생명의 축복이다. 경하한다.

너희들은 버겁고 귀찮은 일들을 서로 먼저 찾아서 하더구나. 소소한 일들도 배려하고 양보하더구나. 너희들의 삶은 짜증이 없더라. 부부는 너희들처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양보하고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부끄럽게도 나는 그리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사는 것이 바빴기 때문이었을까?

그래 맞다. 상대를 생각할 줄 모르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에고이즘에 빠져있는 사람하고는 길게 함께 갈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주름살투성이가 돼서도 헤어지는 황혼이혼이라는 얄궂은 일이 생겨나는 거다. 그런 일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을 위하는 인간들에게 찾아오는 거다.

아는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풍경은 늙어버린 부부가 두 손을 꼭 잡고 석양을 향해 천천히 걷는 뒷모습이다. 그것은 사랑과 희생과 배려와 양보가 만들어낸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그림자다.

은율이는 여섯 살 초등학생이 되었고 한율이는 한 살 반이고 셋째는 만삭이고, 유일이는 건축가로서 세상일에 쫓기니 경화 혼자 어쩌나 염려했는데 너희들을 돌보는 천사들이 곁에 있더구나. 은율이 한율이 셋째의 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천사로 있더라. 아닌가? 천사가 할아버지랑 외할머니로 변신한 건가?

손주들 돌보는 일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노년을 살지 말라고 떠들어대는 이 세상에서 너희들을 조금이라도 돕겠다고 새벽같이 일어나 온 집안을 정리하고 쓸고 닦는 것이 일상이 된 할아버지와, 온종일 손주들 돌보느라 손목이 저려서 붕대를 감고도 손주를 어르면서 웃음 가득한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사랑을 보았고 희생과 배려도 보았다.

나는 희생 양보 배려라는 것들은 복잡하고 먼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분들의 모습에서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것들은 추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체적이더라. 그런 것들은 유토피아에서나 존재하는 것들인 줄 알았는데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인간들이 곳곳에 널려있는 지금의 세상에도 맑게 숨쉬고 있더구나.

하루 한 달을 한 해를 사랑으로 살아가는 그분들에게서 그렇게 보았고 느꼈다. 그분들에게 깊은 감사함을 잊지 마라. 그래야 사람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대상은 추상이 아닌 실체가 아닐는지. 그렇게 절감했고 깨우쳤다.

경화야, 유일아!

은율이 한율이와 머잖아 세상을 마주하면서 ‘아! 눈부신 풍경이야’라고 말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셋째를 품어 안고, 그 생명들을 감싸는 너희들과 그분들을 보면서 소중한 삶의 의미와 가치는 참으로 가깝게 있음을 알았다.

나는 항용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괜찮게 살았어!’라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내가 살아가는 곳으로 돌아오는 하늘 아래서 새삼스레 배려하고 양보하면서 사는 것이 진정 괜찮게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남은 세월이라도 그렇게 살자고 마음에 새겼다.

따사로운 삶을 살아가는 너희들과 그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래, 우리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바쁘지 않게 살아가자.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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