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셋째 형님

내 셋째 형은 나하고 두 살 차이다. 어려서부터 형이자 친구처럼 따라다녔다. 또래들과 싸움이 벌어지면 셋째 형은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국민학생 때 셋째 형과 나는 방안에서 주먹에 수건을 감고 복싱 연습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복싱 연습을 하다가 셋째 형이 날린 어퍼컷에 턱을 맞아 혀를 깨물어 혀가 찢어졌다. 지금도 혀에는 흉터가 선명하다. 양치할 때 흉터가 보이면 셋째 형이 보고 싶다.

내가 열두 살 즈음이다. 신문보급소에서 셋째 형이 다른 아이와 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형과 싸우는 상대 등위로 튀어올라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 작은 주먹이 무슨 타격이 될까 만은 나는 달려들었다.

어느 날 새벽, 항상 셋째 형과 나를 데리고 다니는 둘째 형이 장티푸스라는 병으로 앓아 누워있었다. 셋째 형과 나 둘이서 신문보급소를 향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시발택시’ 첫차가 출발을 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셋째 형은 시발택시의 좁은 뒤 범퍼에 올라타자고 했다. 그러면 신문보급소가 있는 삼각지까지는 금방 갈 수 있다고 했다. 셋째 형과 나는 출발하는 시발택시 뒤 범퍼에 올라탔다.

셋째 형은 시발택시 지붕을 움켜잡고 잽싸게 두발로 범퍼 위로 올라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데 나는 출발하는 시발택시 속도를 맞추지 못해 아랫배만 걸치게 됐다. 시발택시는 달렸고 셋째 형은 올라타라고 했다. 한데 올라타려고 발을 땅에 대면 발이 하늘로 솟구쳤다.

나는 그런 자세로 버티다가 삼각지 택시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삼각지 육군본부 정문 앞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셋째 형은 ‘엉기야!’라며 내 이름을 외치면서 달리는 시발택시에서 뛰어내렸다. 캄캄한 새벽 아스팔트 위를 셋째 형과 나는 나뒹굴었다. 셋째 형은 엉금엉금 기어와 나를 더듬으며 괜찮으냐고 소리쳤다. 턱이 찢어져 피가 흐르면서도 형과 나는 서로 붙잡고 괜찮다고 했다.

셋째 형은 봄이면 경단을 받아 팔았다. 빈 병을 모아 고물상에 팔기도 했다. 여름방학이면 새벽 신문배달을 마치고 후암동에 있는 ‘후광당’에서 ‘아이스케키’를 받아 팔았다. 나도 셋째 형을 따라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아이스케키 녹지 말라고 얼음을 채워 넣은 통은 너무 무거워 짊어지고 다니다 보면 옆구리 살갗이 벗겨져 쓰렸다. 그럴 때면 셋째 형은 내 옆구리에 수건을 받쳐줬다.

셋째 형은 육군보안사령부 병장 만기제대 했다. 지금의 국군방첩사령부다. 처음엔 최전방부대에 배치됐었다. 겨울에 어머니가 둘째 형과 같이 면회를 갔다. 후줄근한 군복에 부러진 칫솔을 군복 상의 주머니에 꽂고 나온 셋째 형을 면회한 후 어머니가 한숨으로 드러누웠다.

큰 누님이 나섰다. 큰 누님 친구인 보안부대 사령관 김재규 부인에게 하소연해 하루아침에 셋째 형은 보안사령부로 전출됐다.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그 김재규 부인이다.

셋째 형은 보안부대에 근무하면서 고향의 한 여인을 찾아갔다. 어릴 적 뒷동산에서 함께 놀던 소녀였다. 함께 놀다가 나무그루터기에 정강이를 크게 다쳐 흉터가 남아있는데 그 여인을 찾아가 흉터를 보여주면서 “이 흉터를 기억하냐?”고 물었고 여인은 뿅 갔다. 그 여인이 내 셋째 형수다. 셋째 형이나 형수에게는 완벽한 첫사랑이다.

셋째 형이 보안부대 근무하면서 형수 아랫집인 전남도지사 집으로 전화를 걸어 형수를 바꿔달라고 하면, 도지사부인이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가 “영애야! 서울서 전화 왔다”고 형수 이름을 고래고래 소리쳐 불렀다.

셋째 형수는 권총 차고 으스대는 군인아저씨에게 폭싹 속았다. 군인아저씨는 도지사 부인이 놀라서 전화를 바꿔줄 정도로 권력도 세고 부자인 줄 알았다. 형수 아버지도 누구의 자식이니 괜찮다고 셋째 형을 두둔했다.

그런데 결혼해보니 완전 빈털털이였다. 가진 것이라곤 속된말로 달랑 그거 두 쪽 뿐이었다. 부엌 딸린 방 한 칸 겨우 얻어 살림을 시작했다. 힘든 삶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가난하지만 찌들지는 않았다. 사랑으로 버티면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셋째 형의 삶은 버거웠다. 택시운전을 했지만 사납금 채우기도 힘들었다. 어느 한날은 택시 손님을 찾아 헤매다가 통금위반으로 파출소로 끌려갔다. 당시는 밤 12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라고 해서 시민들 활동이 정지됐다. 지금처럼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 셋째 형수는 셋방살이하는 집 앞 바위에 걸터앉아 걱정과 불안과 한숨으로 형을 기다리며 온밤을 꼬박 샜다.

한때는 여자중고등학교 가정실습시간에 필요한 재료를 납품하는 사업을 했다. 옷감 물들이는 사업도 했다. 그러나 사업의 기교도 밑장 빼기도 할 줄 모르는 순진한 셋째 형은 눈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살이에 어두웠다. 거기에다 여유자금 없이 맨몸으로 부딪치는 사업은 번번히 고전이었다. 형수가 함께 뛰어들었다. 고되고 서러운 세월이었다.

지금? 자식 셋 다 키워 분가시키고 형수와 형 둘이서만 산다. 버티고 버텨 장만한 보물처럼 아끼는 아파트의 거실은 광장이며 방 3개다. 소변은 반드시 앉아서 봐야 하는 화장실 겸 욕실 2개다. 그만하면 대궐이다.

무더운 여름에만 잠깐씩 작동시키는 20년된 에어컨은 아직도 씽씽하다. 자가용차 OPIRUS는 16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새 차 같다. 쉰살 된 선풍기는 늙어서 고개를 잘 못 가누지만, 그래도 조용조용 잘 돌아간다.

나에게는 나 죽어서도 잊지 못할 두 형님이 있다. 눈부시게 푸르른 날처럼 내 두 형님의 하루하루가 웃음꽃 피우길 소망한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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