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를 타고 계속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출입금지’ 표지판을 본 내 심장이 석고처럼 굳어진다. 경고판에 겁먹어선 안 된다. 아하, 역시 나는 운이 좋다. 해풍이 웃자란 풀잎을 밀어 눕히자 아가리를 벌린 개구멍이 나타났다. 하지만 초록색 안내판이 그 뒤를 막아선다. ‘위험, 100m 앞 절벽’ 상식으론 이해가 가지만 내 운명과 절벽과는 가까운 인연이 아니다. 삐딱하게 버티고 선 유칼립투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배를 땅에 비비며 기어간다면 무사히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오늘 같은 날은 경비들이 이곳까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가방을 먼저 밀어 넣고 개처럼 구멍에 머리를 박는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든다. 출입하는 사람들로 자동문이 열린 탓이다. 나도 모르게 코를 땅에 박고 숨을 죽인다.
올라갈수록 절벽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생각과 달리 숨통을 끊어버릴 것처럼 언덕이 가파르다. 땀이 하수처럼 흘러내린다. 유칼립투스 가지 사이론 태양이 무너지듯 기울고 있다. 그늘이 점점 넓어지는 걸 육안으로 확인하며 살짝 고개를 들자 세미나실의 넓은 실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헉, 리조트의 5층 연회장이다. 등 뒤엔 수평선이 자를 댄 것처럼 펼쳐져 있고, 자칫 발을 잘 못 딛기라고 하면 그대로 절벽행이다. 이건 위성사진 정보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경탄할 광경이다.
손차양을 만들어 외눈에 어른거리는 물체와 실내 상황을 훑어본다. 정교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금괴 모형 테이블을 향해 탐욕스럽게 광선을 쏘아댄다. 금방 공장에서 찍어 온 것 같은 황금색 의자들, 드레스 입은 여자들과 정장의 남자들,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크리스털 술잔에 입술을 적시며 입이 찢어지게 웃어대는 장면, 내가 볼 수 있는 최악의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갑자기 내 심장이 도끼날처럼 짜릿하게 일어선다. 긴 모래톱 꼴의 주차장으로 검은 오토바이 두 대가 부르릉 거리며 들어오고 있다. 그 위에선 경비행기가 공회전을 하며 엉덩이를 낮추고, CEO가 도착한 것이다.
해가 수평선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주변을 덮어버리기 전에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 실수를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얼빠진 걱정이었다. 바다를 에두르고 있는 거대한 사막의 끝, 리조트를 에둘러 불야성을 이룬 조명은 마치 오로라 같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우주정착지라는 착각이 든다. L제약회사의 CEO가 왜 이곳에 리조트를 세웠는지 이해가 간다.
고통이 다시 되살아난다. 진통제 기운이 떨어진 틈을 타고 고통이 몸을 저격해 온다. 진통제를 우적우적 씹는다. 점점 환각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뇌에서 경련이 일어난다. 그러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모호한 적의와 혐오감을 담은 노래 ‘네드 켈리’ 영화음악이 울려 퍼진다. 내 심장을 타격하는 야릇한 음률에 나는 몸서리친다. 십대 시절 불량친구들과 어울렸던 기억이 떠오르는 걸 보면 진짜 환각증상이 일어난 것이다. 아내가 평소 담배를 피우며 듣던 시무룩하고 희미한 살해 충동이 느껴지는 발라드 노래도 들린다. 아, 어디서 마리화나 냄새도 난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생각에 빠진다. 이곳이 스마트 천국인가.
가방의 지퍼를 열어 라이플의 부품들을 하나씩 꺼낸다. 장님처럼 손가락의 촉을 세우자 인조기능을 장착한 것처럼 마디마디가 기능하기 시작했다. 껍질이 없는 나전선을 고압선에 설치하는 평소 내 손가락의 재능과 같다. 스스로 감탄한다. 개머리판, 스프링, 캐리어, 이잭트, 해머, 리시버, 방아쇠, 스프링, 격발용 핀, 나사…… 내 손가락은 순교자처럼 조립 해 나간다. 영화에서처럼 순조롭다. 조립 끝. 철컥 철컥 시험하는 공이치기 소리에 내 심장이 오그라든다. 한 발 또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세발의 장전도 끝. 완벽하다. 한 발은 너를 위한 또 한 발은 나를 위한, 한 발은 신을 위한, 나는 차갑게 미소 짓는다. 내 차가운 심장과 뜨거운 블릿의 조합, 멋지다.
천천히 총구를 내 가슴에 찌른다. 쿨하게 죽을 것이다. 너를 쏘는 연습에 몰두하느라 나를 쏘는 훈련을 잊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너를 보낸 후에 연습한들 늦었다고 말 할 자는 없다.
몸을 굽혀 너의 차 운전석에 방아쇠를 정조준 한다. 계속 멋지다. 가방을 세워 라이플을 비스듬히 세워놓고 잠시 휴식을 하기로 한다. 잊은 것이 없는지 점검할 시간이다. 맞아, 아내에게 문자를. 당신과 나는 소확행(小確幸). 컥컥. 쳇, 섹스도 그럭저럭 잘 맞았잖아. 오, 하느님, 담배를 끊으려다 목숨을 끊은 아내가 꿈에서만이라도 한 번 깨어날 순 없는 걸까요?
섹스가 끝난 아내는 고개를 바짝 뒤로 꺾고 담배를 빨았다. 내가 위협을 하면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해 꼬리를 내린 개처럼 피식 피식 웃었다. 발기가 꺾일 때마다 화를 냈고 끝내 아내를 구타했다. 송전탑에 올라갔다가 부주의로 고압선에 감전되었을 때 얻게 된 발기부전의 콤플렉스는 주먹이 되어 아내에게 날아갔다. 아직도 그 때 터진 혈관의 빨간 반점이 허벅지에 남아 있다. 코피가 터진 아내에게 그 피로 금연 혈서를 쓰게 했고, 아내가 보는 앞에서 피우던 담배를 변기에 처넣었다.
내가 아내를 죽인 것이다. 담배 피우는 아내가 견딜 수 없었다. 섹스 후 아내가 담배를 빨아댈 때마다 성적불만 때문이라는 생각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맥주를 잔뜩 마시고 취해 잠이 들었다가 요기에 일어나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던 날이었다. 자정이 지난 시간에 변기에서 건져낸 담배를 쪼그리고 앉아서 빨아대고 있었다. 오싹했다. 그 순간 와락 뺏은 담뱃불로 그녀의 손가락을 지졌다. 짙은 보라색 매니큐어손톱 밑에서 지 지 지 직 살점 타 들어가던 소리가 아직도 보인다.
CEO와 술잔을 들고 대범하게 미소 짓고 있는 너를 본다. 내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다. 내 입술에 붙어버린 노래가 터져 나온다.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 나는 죽으러 너는 살러.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신만이 알고 있다.”
너의 술잔에 죽음의 무늬가 녹아들고 있다. 그건 너의 운명이 서서히 굳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설마 내가 이곳에 온 것을 네가 알아챈 것은 아니겠지? 불빛 아래 서 있는 넌 미라 같다. 내 결혼식에 입고 왔던 너의 감색양복에도 음울한 그림자가 어룽거린다. 네가 돌아서서 출입문 쪽으로 걸어온다. 내 안에서 살기가 작동한다. 방탄통유리를 부수고 뛰어 들어가 너를 해치우고 싶다. 몸이 저절로 앞으로 기운다. 그 때 누군가 네 앞을 막아섰고 너는 완벽하게 지워졌다. 넌 나한테 죽은 사람이야. 넌 죽었어.
머리 위에서 나뭇잎이 최후의 호흡처럼 달달 떨고 있다. 설명회는 자정 전엔 끝날 것이다. 나는 라이플을 지키며 덤불숲처럼 초조하게 기다려야 한다. 숨을 쉴 때마다 내 입김에서 시체냄새가 풀풀 날린다. 내 위장에서 올라온 하수처리장 같은 악취다.
밤이 되자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진다. 라이플을 다리사이에 끼우고 두 손바닥에 입김을 후후 불어서 서로 비빈다. 언제 네가 나타날지 모른다. 조준경을 들여다보면 망원경에 한 점 너의 실루엣이 보인다. 너의 잿빛 실루엣에 여러 번 방아쇠를 당길 뻔 했다.
갑자기 EXIT 문이 열리고 대회장에서 터져 나온 소음이 총성처럼 공기를 흔든다. 긴 스커트 자락을 치켜들고 제 그림자를 밟으며 걸어 나오는 여자를 피해 나는 재빨리 유칼립투스 뒤로 몸을 숨긴다. 지구의 중력에 익숙하지 않은 유인원처럼 어색하게 휘청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라이터를 켜서 마리화나에 불을 붙인다. 손에서 빨간 불꽃이 ‘어두운 꽃’처럼 살아났다 죽는다. 짧은 순간, 눈이 작고 턱이 짧으며 납작한 얼굴과 이마가 좁은 파마머리, 무어의 아내다. 좋아! 이건 계획에 없었던 돌발적 상황이다. 그녀는 연기를 뱉으며 겁도 없이 절벽을 향하고 있다. 자, 이제 시작이다. 1초가 지날 때마다 그녀의 숨소리, 발소리가 선명하게 내 귀에 울린다. 내 심장에서북소리가 쿵쿵댄다. 그녀는 나를 지나쳐 간다. 스프링처럼 탱탱하게 그녀의 뒤로 다가간다. 마리화나에 취해 비틀대느라 내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나는 머리채를 당기고 개머리판으로 목을 누른다. 그녀가 채 소리를 지르기 전에, 풀밭으로 밀어 배위에 올라타 앉는다. 내가 누군지 그녀는 알아보지 못한다. 여자가 몸부림을 치고 발길질을 하지만 잡풀이 얼굴을 막아 쉽지가 않다. 대회장을 쳐다보며 허리에 둘둘 말린 전선을 푼다.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을 촘촘하게 묶어나간다. 풀을 뜯어서 입에 재갈을 물린다. 일 미터 지점에서 유칼립투스가 여자를 부르고 있다. 밑동에 묶인 여자는 계속 헛발질을 한다. 나는 두 번째 전선을 풀어서 그녀의 두 발을 묶는다. 이러한 작업은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전선의 용도는 너를 겨냥한 것이었고, 내 준비는 철저하고 완벽하다.
갑작스런 벵골 불꽃이 솟아올라 하늘이 환해진다. 불길하게도 실수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너의 아내를 확인하려고 눈길을 주다 불꽃의 폭발에 놀라 라이플을 떨어뜨리고, 그걸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때 돌멩이를 밟는 바람에 미끄러지면서 자빠졌고, 푸석한 흙이 꺼지면서 나는 추락한다.
나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다. 비명 소리를 삼키며 지상에서 폭죽이 연발로 터지고, 물웅덩이가 내 몸을 받아준다. 하지만 머리가 완전 깨진 것 같다. 그래도 좀비처럼 신경은 살아있다.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악취, 물렁하게 닿는 불쾌한 이물질, 하수처리장이다. 시야 협착증에 걸린 것 같던 동공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시커먼 오물의 존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L다국적 제약회사 CEO, 너, 의사들, 임상실험 연구소 직원들…… 이 먹고 마시고 배설한 똥과 오줌, 음식찌꺼기, 샤워한 물이 내 온몸에 스며들고 있다. 무릎이 전동기처럼 떨린다. 나는 반원형 오물웅덩이에서 벽을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쳐 나간다.
간신이 벽에 몸을 붙이고 일어선다. 오물에 서 있는 내가 지상으로 다시 올라갈 확률은 제로다. 나는 망했다. 쥐덫…… 함정에 휘말려 들었다. 격렬하게 딸꾹질을 해대며 내가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 빌어먹도록 잘못되었다. 너의 수법은 너무나 교묘하고, 이제 나는 돌이킬 수 없다. 너의 야심찬 미소와 교활한 미래가 내 눈앞에 상상되는 순간 상처받은 나는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 것 같다.
지갑은 웅덩이에 떨어져버렸고, 주머니에 찰싹 붙은 약봉지, 똥물을 먹은 약은 악취로 자신의 존재를 나에게 강요하고 압박한다. 진통제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이건 내가 자초한 운명이다. 미숙하게 알고 있는 현실, 진정한 복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모험을 감행한 자가 겪어야 할 엄청난 고통이다. 어찌하겠는가, 살인 충동을 내 의지로 자제할 수 없었다.
너의 잔인함은 끝이 없다. 내가 이대로 무너진다면 오물 때문이 아니라 분노와 고독 때문이다. 속이 울렁거린다. 발을 움직인다. 한 발을 겨우 떼기도 전에 창자가 뒤틀리며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토를 한다. 창자에 닿지 못한 진통제 덩어리가 오물위에 둥둥 떠돈다.
“뭐 해. 빨리 와.” 아내 목소리가 들린다.
“복수… 복수… 복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정신을 회전시켜본다. 그러나 너무 신경이 곤두선 탓인지, 억제 하지 못하고 울음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남아있는 모든 힘을 복부에 몰아 폭발적으로 껄껄 웃는다. 예상하지 못한 폭소가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켜 정신을 회복시킨다.
지상에서 떨어진 폭죽소리가 지하 하수처리장 벽에 공명되어 울린다. 짧은 순간, 밧줄처럼 흔들리는 나무뿌리가 나를 쳐다본다. 빛의 세례를 받은 그것들은 높은 곳에서 천사의 발바닥처럼 내게 동정을 보낸다. 기적이 촉발되고 있다. 나는 기적을 확장시키려고 초인적으로 몸부림친다. 오라(Oura)를 발산하며 주문을 외친다.
“나는 할 수 있다.”
안전화를 벗어던지고 도마뱀의 발바닥처럼 콘크리트에 붙어서 기어오른다. 두 손바닥의 악력과 두 발바닥의 흡착, 억만년 동안 흘러온 파충류의 DNA가 나를 돕고 있다. 셔츠가 찢어지고 무릎의 피부가 벗겨진다. 그러함에도 날개가 없는 나는 추락하고 만다.
죽든지 살든지 해 보는 거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발톱의 힘으로 개구리처럼 벽을 타고 다시 기어오른다. 간신히 나무뿌리를 움켜잡는다. 헉! 똥물을 먹고 자란 나무뿌리는 질기다 못해 비루하다.
기적이다. 배수파이프를 타고 나무뿌리가 자라고 있었다. 녹슨 파이프를 발견한 나는 신음을 토한다. 그것들은 나무뿌리에 몸을 숨기고 둥글게 휘어져 벽속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 있다. 미끄러운 잿빛 파이프에 전선을 촘촘하게 감으며 한 발씩 올라간다. 불꽃이 봤다면 내 꼴이 동면에서 깨어난 도마뱀처럼 우스꽝스럽고 초라하겠지. 현기증 때문에 올라가다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손톱에 풀의 질감이 닿는다. 지상이다. 빙고, 여보, 내가 해 냈어. 해냈다고. 한 손으로 땀과 뒤섞인 목둘레의 오물을 훔친다. 이제 올라가야 할 차례다. 하지만 나는 떨고 있다. 탈진해버린 영혼처럼 꼼짝할 수 없다. 손톱의 촉감을 세워 갈고리처럼 턱을 풀밭에 간신히 걸친다. 스노클처럼 외눈만 지상을 살피고 다리는 아직도 파이프에 걸친 채 거칠게 숨을 빨아들인다. 무어의 아내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소리를 찾는 발소리.
나는 정신을 번쩍 차린다. 이건 예측한 플랜이다. 네가 다가오고 있다, 두리번두리번 아내를 찾으며. 그 순간 화산처럼 불꽃이 폭발한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지상으로 몸을 끌어올린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지나쳐 간다. 소리 나지 않게 다가가 라이플의 견착대를 잡아당긴다. 당장 너를 향해 개머리판으로 내려칠 수 있지만 나는 기다린다. 폭죽이 연속으로 터진다. 오늘밤 불꽃놀이의 하이라이트다. 네가 두리번거리다 몸을 돌려 아내를 발견하는 순간 개머리판으로 네 머리를 내려친다. 너는 쓰러지면서 간신히 한 마디를 내 뱉는다.
“너? 찰리!”
마지막 말을 뱉으면서도 너는 여전히 몸부림을 치며 푸덕…… 푸덕 몸을 움직인다. 천천히 입술의 각도가 이지러지고 있는 너, 그 동안 나는 너를 미워하며 사랑했었다. 터지는 벵골 불꽃들이 너무 눈부시다.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나는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하늘을 밝히는 불꽃을 구경한다. 껄 껄 껄…… 몸이 떨리고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웃음 끝에 눈물이 떨어진다.
갑자기 네가 몸을 버둥거린다. 운동으로 키워진 너의 몸은 힘과 폐활량이 초인적이다. 나는 압도당한다. 너의 몸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힘이 세다. 지금이라도 너와 맞서 싸운다면 제어하기 벅찰 것 같다. 그 전에 빨리 너를 해치워야 한다. 너는 타락한 탐욕으로 신약을 만들어 살아있는 육체에 장난을 치는 그들과 같은 괴물이다. 수많은 환자들이 다국적 제약회사의 강력한 권력에 맞섰다가 위협을 넘어 쓰디쓴 현실을 맛보며 죽어갔다. 너는!
폭죽이 터지는 순간을 노려 방아쇠를 당긴다. 폭죽 터지는 소리가 동굴처럼 총성을 삼켰다. 끝. 모든 것이 끝났다. 블릿이 박힌 네 옆구리에서 격정적으로 피가 흘러내린다. 폭죽이 날아가서 오로라처럼 하늘을 물들이고 내 주먹은 폭죽을 흉내 내어 횃불처럼 하늘을 찔러댄다. 내 생애 최고의 밤이다. 아, 미치도록 황홀하다.
나는 바짝 너에게 다가간다. 너의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내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이미 눈썹이 굽어가고 있는 너는 팔과 다리를 계속 떨어댄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극한까지 끌고 가려는 너의 손가락이 내 팔에 닿는다. 네 심장소리에 나의 심장이 소스라쳐 멎을 것 같다. 너무 늦었어, 무어! 너의 안구가 위쪽으로, 머리 꼭대기를 향해 돌아가는 것이 눈처럼 하얀 불빛이 비춰준다.
이제 내 차례다. 총구를 목구멍 끝까지 밀어 넣는다. 아내에게 갈 시간이다. 으으으음, 무어의 아내가 게거품을 물고 묶인 손발을 버둥거리며 짐승처럼 신음을 토하고 있다. 어림없다, 내 전선은 형틀처럼 단단히 옥죄고 있다. 목구멍에서 총구를 뽑은 나는 조금 전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를 곱씹는다.
“여보, 제발 담배 좀 끊어.”
너는 꺼져 들어가고 있다. 내 아내가 얼마나 고통 받으며 죽어갔는지 알아? 때 이른 비극적 죽음으로부터 우리 모두 무언가를 배워야 하지 않겠어?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무고한 생명을 놓고 장난질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건 남의 인생을 탐식하는 거야. 용서하려고 했지만, 네가 너무나 교묘하게 나를 피하고 있어서 일이 쉽지가 않았어. 내가 가진 것을 유익하게 뺏을 줄 아는 놈. 내 정보를 탈취해 그들이 빠져 나갈 구멍을 마련해 줬었지. 제약 회사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으로 긁어모은 어마어마한 돈을 온통 약 광고에 쏟아 붇고! 사람들의 생활을 나쁜 쪽으로 변화시키고. 아직도 사람들은 담배를 끊으려고 신약을 복용하고 여기저기서 죽어 가고…….
별안간 네가 몸을 후다닥 뒤집는다. 나는 너의 몸통에 밀려 벌렁 뒤로 자빠진다. 너의 주먹이 나의 얼굴에 날아온다. 나는 빠른 동작으로 너를 덮친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엎치락뒤치락 뒹군다. 네 목구멍에서 내 얼굴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피에 화상 입을 것 같다. 그 순간 네가 힘껏 라이플을 차버린다. 라이플은 내 등 뒤 절벽 아래로 빠르게 날아간다. 내 다리를 붙들고 몸부림치는 너는 화살에 쏘인 사자 같은 일그러뜨린 표정이다. 내 실수라면 너의 손목에 숨겨진 거대한 힘을 잠시 잊어버렸다. 반쯤은 마비되었고 반쯤은 미쳐버린 나는 천천히 진통제의 힘에 몰락하고 있다. 너무 많은 진통제를 털어 넣었다. 꽉 움켜진 너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목구멍에선 헛된 비명만 터져 나올 뿐이다. 그 순간 네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나를 원망하듯 아니 차라리 애원하듯 한 동공, 너는 꺼져간다. 네가 손아귀의 힘을 툭 놓아버린다. 갑작스러운 반동으로 나는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날개를 펼쳐보겠다고 혼신을 다하지만 절벽이 울어대는 내 메아리만 수평선 멀리 날아가고 있다.
“아아악 아아악 아아악……” (끝)
테리사 리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소설가·단편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 어제 오늘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