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이름을 ‘Y’라고 하자. 녀석은 나보다 한참 아래다. 고국산천이라면 만나기 쉽지 않았을 거다.
사는 것이 강물 같은 것인지 바람 같은 것인지 흐르고 돌아 생경한 인간들이 한곳에 모였다. 녀석과 나는 ‘언론’이라는 동종업종 때문에 가끔 자리를 함께했다.
녀석은 행동이나 말투가 까칠했다. ‘이민선배 언론인’들을 깔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건방지다는 생각이었는데 몇 번 만나보니 녀석의 삶의 자세가 소신 있고 명확했다.
당시에 – 지금은 거론하지 않겠다 – 뉴질랜드 교민사회 ‘언론인’들은 나를 포함해 거의 다 사이비들이었다. 언론공부를 제대로 했거나 언론분야에 종사했던 인물이 없었다. 이민 와서 호구지책으로 언론이라고 얼렁뚱땅 똥폼을 잡은 거다.
그런데 나보다 몇 년 늦게 이민 온 녀석은 달랐다. 서울대학교를 정말로 졸업했고 잡지사를 거쳐 중앙지인 신문사에서 오랫동안 기자로 활동했다. 그런 녀석의 눈에는 사이비언론인들이 우습게 보였을 거다.
녀석의 기사는 매서웠다. 잘못된 것들에 눈치보지 않았다. 사이비언론인들은 녀석이 껄끄러웠다. 껄끄러움은 질시와 미움을 동반하는 거다. 녀석은 개의치 않았다. 불의, 허풍과 동행하는 사이비들을 비웃었다. 녀석의 주위엔 배가 아파 못 견디는 족속들이 증오의 눈길을 번뜩였다. 누가 그랬다. “한국 사람은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죠!”
녀석은 겁도 없이 사이비언론들의 대형 광고주이며, 음흉한 속셈으로 교민사회를 휘젓던 ‘돈 좀 가졌다’는 한 인간의 불의를 성토했다. 녀석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쓰레기들의 주특기인 ‘명예훼손’ 소송에 걸려들었다.
돈 좀 가졌다는 그는 자신의 행위에 까칠한 지적을 하는 녀석의 숨통을 조여 교민사회 상왕 노릇을 꿈꾸는 자신의 계획을 완성하고 싶었던 거다. 결론은 그는 돈의 위력을 앞세워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빈손으로 멀리 돌아서고 말았다.
나는 돈 좀 가졌다는 그의 얼굴에 소주를 끼얹으며 “똑바로 살아, 이 새끼야!”라고 질타했다. 그는 나도 명예훼손이나 폭력으로 고소해 박살을 내려고 했다는데, 확실한 증거가 될 끼얹은 소주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려 그의 곁에 앉아 나에게 두 눈을 부라리던 빈대 같은 졸개들의 증언만으로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나는 그 사건 이후 더럽게 살아가는 인간들에겐 소주를 끼얹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고쳐야지!
연초에 어느 단체장이 신년모임이 있으니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나는 근엄한 표정으로 헛웃음 날리며 악수하는 모임을 질색하기에 “Y에게나 연락해보라”고 했다. 그 단체장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Y 걔는 까칠해서 안 나와요”
까칠하다는 것이 뭘까?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양창순은 “까칠하게 살아야 행복해진다”고 했다. 양창순이 말하는 ‘까칠하다’는 ‘생김새가 야위거나 메말라 윤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성격이 바르고 곧다’는 의미인 거다. 이런 사람일수록 삶의 지향점이 확고하다. 보통은 누군가 성격이 고집 세고 까다롭고 예민해서 대화하기 어려울 때 까칠하다고 한다. 양창순은 까칠하다는 것은 당신답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삶은 서로 반대되고 모순되는 갈등이다. 매 순간이 스트레스다. 불안하고 우울하고 화나고 억울하고 피해의식도 갖게 된다.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삶이다. 어떻게 하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단단해질까?
불안, 우울, 분노는 세 쌍둥이다. 함께 다닌다. 이 세 쌍둥이를 없애야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답게’ 살아야 한다. 도덕성, 윤리성을 두려워하고, 주위 눈치 안 보는 자존감을 키워야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 죽을 때까지 노화도 안되고 병에도 안 걸리는 동물이 새라고 한다. 앵무새는 평균수명 100년, 가장 멀리 난다는 알바트로스는 150년, 갈매기는 7~80년이라는 거다. 새는 힘들면 날아가고 편하면 있는다고 한다. 그래서 새는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모른다는 거다.
사람이 50년 살면 49년을 후회하고, 60년 살면 59년을 후회하고, 70년 살면 69년을 후회한다고 한다. 그 후회는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죄책감, 남의 눈치 보느라고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한 자책감, 스트레스를 떨치지 못한 자존감이다.
녀석 Y는 명예훼손소송을 당하고도 녀석답게 밝고 당당했다. 변호사비만 날리고 소송에 패소했으면서도, 파산신고를 하면서도 떳떳했다. 자신에 대한 의연함 때문이다.
산다는 거? 헉헉대며 요란스럽게 살 것 없다. 그저 까칠하게 살면 된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