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 온지 며칠 안 됐을 때의 일입니다. 한국 운전면허증을 호주 운전면허증으로 바꾸기 위해 RTA를 찾았는데 열 명도 넘게 늘어선 긴 줄… 한참을 기다려 제 차례가 다가왔지만 제 바로 앞, 갓난아기를 안은 젊은 여성과 창구 여직원과의 수다(?)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나 창구로 가자 그 여직원은 “방금 그 아기엄마가 얼마 전까지 우리와 함께 일했던 사람이다. 출산 때문에 얼마 전 그만뒀는데 건강하고 귀여운 아기를 낳고 찾아와서 수다가 길어졌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웃어 보였습니다.
덩달아 괜찮다며 웃어주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벌써 22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 한국에서는 이미 어디를 가나 번호표를 뽑고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다가 ‘띵똥’ 소리가 나면 창구에 가서 일을 보는 시스템이 완벽히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선진국이라는 호주가 은행을 가든 어디를 가든 길게 줄을 서서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건 이해가 쉽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나마도 한국은 여러 개의 창구에서 업무가 신속하게 처리되는데 반해 이곳은 창구 한두 개를 열어놓고 그야말로 ‘만만디’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도 이스트우드 웨스팩이나 ANZ 같은 은행을 가면 여전히 긴 줄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떨 때는 달랑 창구 한 개만을 열어놓고 ‘여유작작’ 하는 걸 보게 되는데 뭐라 말도 못하고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얼마 전에도 운전면허증 갱신을 위해 맥콰리파크에 있는 Service NSW를 찾았다가 또 한번의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제 딴에는 오래 기다리는 게 싫어서 오전 아홉 시가 되자마자 번호표를 뽑고 (그곳에는 다행이 번호표 시스템이 도입돼 있었습니다) 들어갔는데 같은 100번 앞에 L이니, R이니, A니 하면서 여러 개가 붙어 있었고 결국 그날도 40분 이상을 기다려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지루하게 기다려야 하는데도 어디를 가나 모두가 느긋하고 저 혼자만 답답해 하는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호주라는 나라가 법을 지키며 기다리면 편안하게 모든 것들이 이뤄지는 나라인 건 맞지만, 기다림에 익숙한 호주에서 23년을 살고 있지만 그리고 한국식 ‘빨리빨리’ 습성이 몸에 배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응이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벌써 다 지어서 들어와 살고 있겠다….’ 가끔씩 푸념처럼 내뱉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몇 달이면 멋진 2층집을 뚝딱 지어내는 한국과는 여러 가지가 다르긴 하겠지만 호주는 느린 건지 여유를 부리는 건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한국인 빌더에게 맡기면 빠르긴 한데 프로젝트 홈 회사들에 비해 가격이 다소 높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황당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조언에 후자의 방법을 택하긴 했지만 만만디도 이런 만만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일련의 과정에 그들만의 계획과 절차들이 있긴 하겠지만 텐더싸인 후 1년이 훨씬 넘도록 공사를 시작하지 않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곧 지을 것처럼 해서 집을 비우고 나왔지만 한 달이 지나서야 디몰리션을 하더니 이후 5개월이 넘도록 조용했습니다. 2주마다 얄짤없이 빼가는 렌트비를 보면서 한숨만 깊어가던 중 새로운 펜스도 치고 간이화장실도 갖다 놓고 흙도 여러 트럭분을 부어놨기에 ‘아, 드디어 시작하나 보다’ 싶었는데 또 4주 넘게 허송세월을 하다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집 많이 지었죠?”라고 이구동성으로 묻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우리보다도 훨씬 늦게 시작한 집들도 빠르게 짓고 있고 어떤 집은 벌써 2층까지 다 올라가고 벽돌도 쌓고 기와까지 덮었습니다. 그렇게 애를 태우던 집 짓기… 출발은 한참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미친(?)듯이 진행돼 우리가 가보지 않은 3주 동안 깜짝 놀랄 만큼의 진척이 이뤄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동안 충분한 ‘기다림의 미학’을 가졌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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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