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현상

‘금단현상’이란 “특정약물이나 대상, 행위에 대해서 충동적 습관적으로 하게 되고, 중단할 경우 여러 가지 증상을 겪게 되는 것을 말한다. 기호품에는 알코올, 니코틴, 커피 등이 있고, 약물에는 진정, 수면, 중추신경자극제가 있으며, 인터넷중독, 쇼핑 중독과 같은 행위와 관련된 것도 있다. 증상으로는 불안, 초조, 분노, 욕구불만, 현기증, 폭식 등이 발생한다.”

컴퓨터가 고장 나 작동을 멈췄다. 동시에 내 일상도 흐트러졌다. 테니스 하고, 책 읽고, 인터넷접속 하는 것이 나의 주요 일상이다. 그 중에서 인터넷접속은 내 일상에서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헌데 인터넷접속이 불가능해지자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잡히질 않았다.

세상이 온통 침묵 속에 있었다. 하루가 지루하고 불안했다. 주위는 숨막힐 듯 건조했고, 실체가 없는 불안과 초조는 심장 박동수를 증가시켰다. 원인 모를 짜증과 신경질이 났다.

바로, 무언가 습관적으로 하던 행위가 중단되었을 때 찾아 든다는 금단현상 이었다. 하늘 올려다보고, 흘러가는 냇물에 손 발을 담그고, 들판에 서서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고, 솔솔 부는 바람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걸 소홀히 한 나의 척박한 삶의 후유증 같기도 했다.

인터넷접속을 못하자 험담하고 막말하면서 싸워대는 인간들의 상황이 궁금해서 조바심이 났다. 나는 논리적 비판 능력을 상실하고 그저 쌍욕으로만 상대를 평가하는 함량미달족들의 싸움 구경에 빠져 있었던 거다. 그 싸움 구경에 익혀진 일상이 흐트러지자 금단현상이 찾아온 것이었다.

인터넷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고상한 체 하면서 막말하고 헐뜯기 경쟁을 하는 ‘싸움질 중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족속들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선 (善)의 가면을 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질을 하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싸움질을 멈추면 금단현상이 찾아와 일상이 무너진다. 그래서 매일 싸워야 한다.

아주 가끔은 가슴을 찡하게 하는 사람다운 사람들도 있다. 힘 없고 가진 것 없어 천대받고 핍박 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던지며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런 사람다운 사람보다는 싸움질하는 족속이 더 흥미진진하다.

나는 인터넷에 중독돼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낸 자기들만의 주장에 한치의 양보도 없이 그저 상대를 씹어대는 싸움을 지치지 않고 해대는, 그 장하고 장한 연륜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지도층과 편가르기 선수인 언론이라는 ‘싸움질중독자들’의 싸움 구경에 중독돼 있었던 거다.

나의 금단현상은 잘난 척, 고상한 척 하면서 오직 국가와 국민만을 위한다는 입에 발리고 쓸개 빠진 소리를 되풀이 하면서 메스껍게도 상대에 대한 호칭만은 ‘존경하는 누구 님’하면서 미움과 증오를 퍼부어대는 그 비천한 무리들의 싸움 구경을 할 수 없게 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이 좀 거칠어진 걸 이해하기 바란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 바쳐 정치한다는 족속들의 행태 때문에 그렇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구경거리는 불 난 구경과 싸움 구경’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바로 그 싸움 구경 하느라고 엉덩이 시린 줄도 모르고 앉아있었던 거다. 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지구촌 곳곳에서 조국을 바라보고 있는 교민사회에도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 나처럼 싸움 구경 중독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상당수일 것이다.

컴퓨터가 고장 난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집 지킴이 ‘테디’를 데리고 산책을 했다. 녀석은 가로수마다 코를 들이대고 흠흠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한 다리를 들어 영역표시를 하면서 신바람이 났다. 산책 끝에 언덕에 올라 키 작은 나무아래 녀석과 나란히 앉았다. 눈 아래 펼쳐진 세상은 평화로웠다.

아메리카인디언 델라웨어족의 추장 ‘상처입은가슴’은 이렇게 말했다. “평원에 앉아 하루가 저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평화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악한 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배워왔기 때문이다.”

싸움질에 중독돼 싸움을 멈추면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족속들이여! 평원으로 나가보라!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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