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읽는 레시피 – 너도 할 수 있단다, 오징어순대

진아, 너의 전화를 받았을 때 이모는 깜짝 놀랐단다. 엄마의 생일상을 직접 차려보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말하는 너의 말이 얼마나 기특하고 좋았는지 모르겠다. 네가 이 세상에 선물처럼 왔을 때 이모는 노처녀 구박덩어리였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25일 지나면 26일까지는 냉장고에 보관하지만 그 이후에는 버려 버린다며 여자나이 27세 이상에 결혼을 하지 않는 건 문제가 있는 거라고 했었지. 언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할건지 큰일이네, 사람 노릇 하려면 시집가야지 언제까지 부모 걱정 시킬 거냐…. 이런 잔소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살고 있었단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모는 결혼생각이 1도 없었단다. 특별하게 비혼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야. 이제 너도 어느 정도 컸으니 이모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려나… 그냥 이모는 누군가와 삶을 같이하고 사랑을 약속한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단다.

 

사랑이 가랑비 같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지, 소나기 같은 사랑은 열병처럼 갑자기 찾아와 삶을 뒤흔들어버리지. 그런 사랑은 깊이가 없고 열정에 가까운 거라 영원한 시간을 약속할 수 없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을 하고 있었단다. 그냥 가랑비처럼 젖는 듯 아니 젖는 듯 천천히 내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사랑인지 정인지 우정인지 알 수 없지만 진한 사골국 끓이듯 푹 고아진 깊은 마음만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거지. 그러나 스피드한 세상에서 깊은 정이 들만큼 시간을 들여 마음을 줄 인연은 쉽지 않았어. 너는 어떤 사랑을 꿈꾸고 있을까? 모두의 삶의 방식이 같을 수 없고 마음의 깊이나 사랑의 색조차 같을 수는 없는 거란다. 진이는 이모와는 달리 열정을 꿈꿀 수도 있고 아니 그보다 더 담백한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중요한 건 인생은 예측 불허, 우리의 생각처럼 인생이 진행되어 가지는 않는다는 거겠지.

 

이모부는 만난 지 겨우 얼마 만에 연인이 되어버렸단다. 그러니까 진아, 사랑은 알 수 없는 거란다. 이모가 소나기 같은 사랑에 취해 버리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단다. 이모부는 본인이 너무 매력이 넘쳐서 그런 거라고 큰소리 치곤 하지,

 

결혼 생각은 1도 없던 나였지만 천사 같은 너의 손을 살포시 잡아보던 그날, 미칠듯이 결혼이 하고 싶어졌단다. 너와 같은 천사를 낳을 수만 있다면 세상 어떤 남자라도 괜찮을 것만 같았어. 너는 너무나 아름다운 요정이었단다. 벌써 18년전 이야기가 되었구나. 시간은 조각조각 부서지며 어느 순간 성큼 흘러가 버렸단다. 이젠 나보다 키도 크고 허벅지 두께도 더하고 표정조차 우아한 숙녀가 된 널 볼 때마다 먹먹해지곤 한단다. 아이가 없는 이모에게 진이는 첫 조카이면서 딸이고 천사이고 이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이란다. 하루 하루 더 아름드리 나무처럼 무럭무럭 성장해가는 널 보면 감사가 벅차게 올라온단다. 이제 이만큼 컸다고 직접 엄마의 생일상을 차려보고 싶다는 너의 마음이 참 기특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어버렸나 왠지 모를 진한 감동에 뭉클해지더구나

 

뭐가 좋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 아직 라면과 떡볶이, 계란프라이만 가능한 네가 할 수 있는 요리가 뭐가 있을까 더구나 생일상에 올리기에 그럴듯한 요리는 뭐가 좋을까, 한참을 고민 끝에 떠오른 건 오징어순대였단다. 선물을 받을 너의 엄마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해.

 

자, 이제 이모가 말하는 대로 해봐 이모가 도와줄 테니 겁먹지 말고…. 요리란 말이야 진아, 생각보다 즐겁고 행복한 놀이란다. 일이라 생각하고 귀찮다 생각하면 번거로운 짐이 될 수도 있겠지. 다시 생각해보면 요리는 자신과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정말 가치 있는 일이며 행복한 여정이란다. 대충 하려면 방법이 있겠지만 제대로 잘하려고 하면 또 끝도 없는 정성을 요구하는 것이 요리이기도 해. 이모는 말이야 진아, 요리를 하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마음을 치유 받기도 해. 집중해서 요리하는 과정 속에서 머릿속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고민덩어리들이 정리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속에서 일렁이던 화가 거짓말처럼 녹아버리기도 하고 말이야. 더구나 정성을 들인 요리를 누군가가 기뻐하며 맛있게 먹어주면 그 보람이란 게 생각보다 크단다. 이모는 이모부가 우와 맛있다 행복하다 리액션을 과하게 해주면서 이모의 요리에 찬사를 보내줄 때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이모부의 오물거리는 입이 너무 사랑스러워 밥 먹다가도 뽀뽀를 해주고 싶어지지.

 

먼저 재료를 다듬어보자. 어른 숟가락을 오징어 속에 넣어 내장을 긁어내야 해, 투명한 뼈를 쭉 잡아 빼고 눈알과 입도 제거해야 한단다. 그래 징그럽지, 처음엔 쉽지 않을 거야 그러면 그냥 손질된 오징어를 사도 괜찮아. 진아, 어른이 되고 살림이란 걸 하게 되고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하다 보면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용감해질 필요가 있단다. 때로는 징그럽고 무서운 것도 내 손으로 만져야 할 때가 있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거나 실천해야 할 때가 있단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새 억척스럽고 강해진 나를 발견하게 되는 날도 있어 이모는 순리라는 말을 좋아한단다. 삶에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역할을 책임감을 가지고 살다 보면 조금씩 변하고 성장해가는 내가 되기도 해 거칠어진 손이나 커진 목소리, 징그러운 무언가도 덥석 잡을 수 있는 변화 이 모든 것들은 세월 따라 나를 감싸는 순리라고 이모는 생각하고 있어. 아직 너에게는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어느 날 넌 아… 이런걸 이모는 말한 거구나 하고 끄덕거리게 될 거야 이모가 그러했듯이. 깨끗이 다듬어진 통 오징어를 두고 속 재료를 준비해보자. 양파, 고추, 홍고추, 당근, 삶은 당면을 잘게 다져주자. 아직 칼질이 어려우면 큼직큼직 잘라서 야채 다지기에 넣어봐 칼은 언제나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단다 아무리 능숙한 요리사도 주의하지 않으면 손을 다치는 건 순간이야. 하지만 진아 요리할 때 칼을 사용하는 것도 주의해야 하지만 살면서 말을 조심하는 것도 중요하단다. 무심코 던지는 말이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칼이 되어 생채기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야. 가능한 내 입으로 쏟아지는 말은 꽃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해보자 선하게만 살수 있는 세상은 아니라지만 햇살처럼 예쁘고 따뜻한 말을 나누며 살면 더욱 좋지 않을까.

 

이제 다져진 야채에 계란 다진 마늘 간 돼지고기, 으깬 두부를 넣어줄 거야 전분가루를 두 스푼 정도 오징어 안쪽에 잘 발라주고 다진 재료를 넣어주는 거지 속은 약 70%만 넣는 것이 중요해. 너무 욕심껏 가득 채우면 빵 터져버리니까 꼭 여유를 두는 것이 중요하단다. 그러고보면 진아, 뭐든 적당히가 참 어려운 것 같아. 이모는 아직도 어렵단다 어느 만큼이 적당한 정도인지 가늠하는 것이 말이야. 속을 채운 오징어를 꼬치로 바느질하듯 듬성듬성 입구를 막아주고 찜기에 올려 20분 정도 쪄주면 완성된단다. 어때? 그럴듯 하지? 식기를 기다렸다가 접시에 상추나 깻잎을 깔고 이쁘게 담아봐 쪽파를 쫑쫑 잘라서 살짝 뿌려주면 더 보기 좋을 거야

 

자, 너의 첫 요리가 완성되었어. 오징어순대는 사실 쉬운 요리는 아니란다. 어른들도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모가 오징어순대를 추천한 것은 이 정도의 요리를 해보고 결과를 보게 되면 너는 어떤 요리에도 도전해볼 자신감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란다

 

진아, 어른이 되어가면서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될 거야. 겪지 않으면 좋을 일들도 많을 거야 그러나 진아, 이모는 진이가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도전해보고 깨어져도 후회를 하는 용감한 삶을 살았으면 해. 오징어순대를 요리하면 옆구리가 터져 이쁘게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내장을 긁어내고 다듬는 게 징그럽고 싫을 수도 있어. 그래도 말이야. 진아, 해보면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이 분명 있단다. 진아, 배우면서 사는 것이 삶이란다. 반백년이 넘은 이모도 매일 매일 배우고 느끼고 깨닫고 반성하곤 한단다. 아마도 60살이 되고 70살이 되어도 다시 배워야 할 것들은 언제나 있을 거야. 진아,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고 씩씩하게 너의 삶을 살려무나. 너를 사랑하는 우리가 기도할거야. 이모는 언제나 널 응원할 게. 사랑한다, 진아.

 

 

김은희 (문학동인캥거루 회원·미술심리치료사·가족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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