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술타령 ②

우리는 술이라는 ‘탄력 좋은 공’을 하나 가지고 놀이를 즐겼을 뿐…

술을 너무 마시는 것도 이해 할 수 없지만 술을 전혀 못 마신다는 것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물 마시는데 왜 술을 못 마시느냐, 물 마시듯 쭈욱~ 마셔라!’ 사람들 말처럼 ‘좋다, 꿀꺽 꿀꺽.’ 그러나 길게 기다릴 것도 없다. 속이 짜르르함과 동시에 얼굴은 물론 온 몸뚱이가 열에 들떠 확확 달아오르면서 심지어는 손등, 손가락까지 붉어진다.

 

01_이쯤 되면 술에 취하는 게 아니라 술에 단단히 체하는 상태

가슴으로는 열차가 지나가고 머리 속에는 고압선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린다. 호흡곤란, 어지럼증과 함께 속은 부글부글 끓고 끊임없이 메스껍지만 토할 것 같진 않다. 도저히 살아갈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문제는 또 정신만은 또렷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술에 단단히 체하는 상태인데 이런 무서운 경우를 겪어보면 죽어도 술은 먹을 수 없는 독약과 같은 공포의 물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인 중 20-40% 정도는 돌연변이 형태의 알데히드 탈수소 효소를 가지고 있어서 간에서 알코올의 독성 분해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를 아예 분해할 수 없거나 분해 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한마디로 술을 못 하거나 잘 못 마시면 위험한 사람이 5명중에 1-2명 인 수치이다.” 과학자들이 지적하는 술 마시면 안 되는 부류… 바로 ‘나’이다.

남편은 술이 취하면 자꾸 웃는다.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전혀 없지만 잡다한 실수를 많이 한다. 우는 형, 폭력적인 형, 시비를 걸고 푸념을 하는 형, 화를 내는 형 등에 비하면 술 끝이 수월하다고는 하지만 술 취한 모습은 남편이라도 절대로 고와 보일 리가 만무하다.

그보다도 일 년에 한 두 번씩은 꼭 무슨 사고든 내게 마련이니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고향 큰 형님 내외분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02_수술시기는 지났고 항암치료를 하면 1개월 더 연장할 수는…

“장수야! 니 잘 들으래이. 내는 암에 걸려서 3개월을 몬 넘고 죽을끼라 하드라. 나는 괘않다. 아부지가 문제다, 잠시 너그 집에 모시그라. 내 죽거든 미국으로 출장 갔다 카고 몇 년만 버텨보자. 아부지 건강이 안 좋으시니 잘 몬 하다가는 쌍초상 나게 생겼니라. 당체 다른 도리가 없는기라…”

혼자 되신 아버님이 드디어 시드니로 관광을 오셨다. 남편은 자다가도 헛소리를 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자꾸 일어나 앉는다. ‘평생을 공직으로 봉직하던 큰형님이 암이라니…’

“암 환자의 20%는 아무런 자각 증상이 없습니다. 특히 초기에는 아무런 증세가 없어서… 늦었지요. 아주 진행된 말기암이라 장기로 퍼져서 암성 복막염을 일으켜 복수가 많이 차는군요. 수술시기는 이미 지났습니다. 혹 항암치료를 하면 1개월 더 연장할 수는 있겠지만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직접 전화를 해서 들어본 담당의 소견이다. 큰 시누이 댁과 우리 집을 오가시며 아버님은 호주 오길 잘 했다고 좋아하신다. “내가 우리 막둥이 사는데 폐가 될까 봐 안 오고 싶었는데 여긴 참 따뜻하고 좋구나…”

적도를 지나온 그 즈음에 남반구 초여름 날씨는 온 세상이 진 초록이었고 아버님은 햇살이 너무 눈부시다고 하시면서 새벽 5시부터 밖에 나가 나무도 잘라 주시고 마당도 쓸어 주셔서 정원은 날이 갈수록 훤해진다.

“오야, 오야, 니 히야 말대로 내 죽기 전에 느흐 아아들 실컷 보구로… 겨울이나 나고 갈끼다… 허허.”

 

03_그날 밤 더 심하게 앓는 남편을 보다 못해 술상을 차려놓고…

초등학생인 아들 형제는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처음 보는 딱지놀이, 새총놀이에 팔려 날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안은 아이들 목소리로 가득 가득 낭낭하다.

고향 형님께는 며칠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전화가 온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데 몰라보기 여위어가는 남편이 문제였다. 어머님 돌아 가셨을 때도 이렇게까지 끙끙 앓지는 않았는데….

남편이 술을 끊은 지 두 달째 되던 날 전화를 한 건 작은 누님이었다. “수고가 많구나. 그래 느희는 막중한 책임이 있으니 꼼짝 말고 아버님을 잘 모셔야 한데이. 큰 오빠는 어제 세상을 버리셨니라. 아버님 눈치 채실라 울지들 말고. 총총… 전화 끊는데이.”

그런데 며칠 안 되어 아버님께 큰 시아주버님의 전화를 받으라고 한다. “아버지 건강 하시지요? 시드니 좋으시죠? 국제 전화라서요, 길게 전화 못하니까 제 말만 짧게 전할 게요. 네네. 제가 이번 주말에 미국 출장을 가게 됐어요. 음음… 제가 공직에 있으면서 쥐 꼬리만한 봉급이 성에 안차서요. 주식을 좀 하다가 돈을 쪼매 잃어서요. 어… 몇 년 해외 근무를 하면 봉급을 더 주니께 금방 복구가 되니 더… 걱정마시구요. 네… 제가 지원했세요. 지금 제 목소리 들리시지요? 죄송합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 합니다. 음… 미국에 가서 또 전화 드릴 게요. 안녕히 계세요. 아… 버지!” 딸끄닥, 전화는 끊어졌다.

그날 밤 더 심하게 앓는 남편을 보다 못해 술상을 차려놓고 식탁으로 불렀다. 잘 차려진 식탁을 보자 그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라며 도리질을 한다.

 

04_술이 싫다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무섭게 들릴까?

“아니야, 이건… 큰 형님도 술을 참 좋아하셨지. 이제 술은 싫어!” 그의 뜻밖에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속에서 쿵! 소리가 났다. 술이 싫다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무섭게 들릴까….

아버님이 오시고부터 술을 안 하는 것은 혹시 술에 취하면 실수를 할까 봐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갑자기 낮설어진 남편에게서 싸늘한 냉기가 느껴진다. 그 동안 그토록 나를 괴롭혀온 남편의 술타령이 오늘은 너무도 그립다. 웃음을 잃은 그가 어떻게 남은 날들을 버티어갈지 걱정이다.

‘우리의 사랑은 그 동안 술과의 삼각 관계였단 말인가?’ ‘…’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우리는 술이라고 하는 탄력 좋은 공을 하나 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놀이를 즐겼을 뿐이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그 공을 놓쳤다. 갑자기 우리에게 찾아온 가족의 죽음이 그 공을 무자비하게 빼앗아버린 것이다.

친구들이 한마디씩 위로를 전해준다. “그러게 죽음은 순서대로 맞아야 정답이라니까. 50을 갓 넘긴 형님의 죽음은 당연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 아버님이 살아 계시는 한….”

행복? 그래, 잠시 은행에 맡겨놓은 셈 치자. 우리는 놀이대신 아버님의 건강을 잡고 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술술 지나간 세월… 어찌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비 오는 밤이다. 캄캄한 어둠을 보내고 나면 또 다시 태양은 뜰 것이다.

 

글 / 그라시아 (글벗세움 회원·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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