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밤

요즘은 오후 다섯 시만 되어도 어둠이 밀려온다. 먼저 커튼을 닫아 바깥의 차가운 그림자를 막고 거실에 불을 켠다. 히터를 켜 따스한 공기를 불러들이고 텅 빈 거실 한쪽에는 잔잔한 음악을 흐르게 한다.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겨 냉장고 문을 열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작은 설렘이 고개를 든다. 남아 있는 재료들을 하나씩 꺼내어 나만의 저녁상을 차릴 준비를 한다. 아침에 먹다 남은 감자가 있었지만 다시 손이 가지 않아 대신 단호박을 찜기에 올렸다. 아침에는 막 쪄낸 감자가 그렇게나 맛있더니 저녁이 되자 차갑게 굳어버린 그 감자를 보며 문득 어느 겨울날의 기억이 스르르 되살아난다.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 가족이 타스마니아 시골농장에서 살던 시절, 그해 겨울은 유난히 매서웠다. 타스마니아의 겨울은 오후 세 시가 넘으면 벌써 어둠이 저만치에서 밀려오기 시작한다. 숨가쁘게 다가오는 어둠은 잠시 후면 문 앞에 서성인다. 그때도 어김없이 커튼을 닫고, 난로에 장작을 가득 채웠다. 초저녁에 불길을 활활 피워 올려야 온 집안이 고르게 훈훈해졌다. 그사이 저녁상을 차리고 식구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따끈한 저녁을 나누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장작을 몇 개 더 넣고 공기통로를 조심스레 닫아두면 벽난로 속 불씨는 밤새 시름시름 숨을 고르며 아침까지 생명을 이어갔다. 이른 새벽 차가운 공기를 몰아내기 위해 다시 장작을 채우고 공기통을 열어주면 불길은 금세 살아나 활활 타올랐다. 아이들이 깨어날 즈음이면 집 안 구석구석은 이미 따뜻한 숨결로 가득 차 있었다.

긴긴 밤이면 적막이 내려앉고 저 건너엔 불빛 하나 반짝인다. 농장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크리스네 집이다. 그날 밤도 칠흑처럼 짙고 고요했다. 벽난로에 장작을 가득 넣고 저녁을 준비한 뒤 우리 식구는 식탁에 둘러앉아 따끈한 밥을 나누었다. 집안 구석구석이 훈훈했다. 난로 가에 모여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다. 그렇다고 우리 신앙이 특별히 깊어서라기보다는 그 산골엔 TV도 전화도 신문도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시간이 가족 모두 특히 아이들에게는 좋은 추억이 될 거라 믿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저녁식사 후, 감자 몇 개를 호일에 싸서 장작불 밑 재 속에 묻어두고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앞으로 ‘휙!’ 하고 작은 물체가 스쳐 지나갔다. 생쥐다.

순간 온 식구가 일제히 벌떡 일어나 쥐 잡는 소동이 벌어졌다. 쥐는 아이들 방으로 달아나 옷장 뒤에 몸을 숨겼다. 각자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눈에 띄면 무조건 내려치기로 작전이 섰다. 다행히 덩치가 작은 녀석이라 아이들도 겁을 내지 않았다. 쥐를 잡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아이들마저 덩달아 들떠서 이리 뛰고 저리 쫓았다. 밖이 추워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쪽에서 몰고 저쪽에서 막으며 한참을 쫓다가 마침내 잡았다. 아이들 아빠는 그 쥐를 화형에 처해야 한다며 장작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아이들은 기겁을 하며 소리질렀다. 뜻밖의 ‘생쥐 손님’ 덕분에 온 가족이 한바탕 흥미로운 놀이를 끝마쳤지만 아이들의 아쉬움은 컸다. 잘 익은 감자를 꺼내 호호 불어 먹을 시간이었는데, 아빠가 쥐를 불 속에 던져버렸으니 말이다. 아빠가 짓궂게 말했다. “그럼, 감자 꺼내줄까? 아마 더 맛있을 걸?” 두 녀석이 동시에 외쳤다. “싫어요!” 결국 우리는 쥐를 잡았다는 대견함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으로 나눴다. 그날 밤 잿더미 속 감자는 쥐와 함께 재가 되어 버렸다.

1990년, 그 해 겨울은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매서운 추위라 했다. 농장 사람들은 수도가 얼고 파이프가 터졌다는 소식을 서로 전했다. 남자들은 부지런히 파이프를 교체하고 천 조각을 둘둘 말아 수도관에 옷을 입혔다. 그 덕에 혹한 속에서도 물길이 간신히 이어졌다. 우리가 살던 농장에는 각 집마다 낡은 라디오 하나씩만 있었고 대신 모두가 함께 쓰는 ‘TV룸’이 있었다. 그래서 긴긴 겨울 밤 화요일 저녁이면 온 농장이 기다리는 영화의 밤이 찾아왔다. 누군가 정성껏 고른 좋은 영화를 틀어주면 우리는 그날 하루를 영화로 마무리했다. 저녁을 마친 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농장 예배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들뜬 설렘으로 가득했다. 영화가 절정에 이르면 아이들은 어느새 깊이 잠들었고 집으로 돌아올 땐 등에 아이를 업고 손전등 불빛으로 앞길을 더듬어 걸어야 했다. 어느 날 밤에는 머리 위로 별들이 쏟아져 내려 길을 환히 밝혀주었고 또 어느 날에는 둥근 달이 마치 길잡이처럼 우리를 데리고 귀로를 비춰주었다.

오늘따라 그 해 겨울 타스마니아 산골농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유난히 또렷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먹고 남은 감자 몇 알이 식탁 위에 그대로 놓여 찬밥 신세가 된 것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발걸음은 자연스레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전원을 켜고 빈 문서 위에 천천히 적었다. ‘그해 겨울 밤….’

 

 

글 / 클라라 김

 

 

 

 

Previous article교민동정 (2025년 8월 14일)
Next article공동소유 vs. 공동지분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