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에이든이 먼저 “할머니!” 하며 달려 나왔고 그 바로 뒤에 에밀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에밀리는 그 조그맣고 앙증맞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로 지 할머니한테 와락 안겨 들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녀석의 입에서 나온 외침(?)이었습니다. “앤니!” 우리 모두는 처음 겪는 상황에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습니다. 에이든과 반가움의 허그를 하고 있던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 까칠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에밀리가 그토록 반갑게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를 맞이하다니….
얼마 전에도 지 엄마가 우리를 가리키며 “뽐이, 누구야? 하고 물으면 “앤니, 아부” 하며 수줍게 웃던 녀석이었습니다.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할머니를 향해 “앤니!”를 소리 높이 외치며 달려온 건 처음입니다. 딸아이가 저를 가리키며 “누구야?” 하자 녀석은 또렷한 말투로 “아부!”라고 했습니다. “넌 언제 할머니 할아버지 할래?” 하며 가끔 다그치긴(?) 하지만 녀석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향한 ‘앤니, 아부’가 그야말로 최선인 겁니다.
지난주 금요일, 이스트우드 한인상가지역에 나갔다가 문득 아이들 생각이 나서 단골제과점에서 빵 몇 개를 사 들고 딸아이 집 인터폰을 눌렀습니다. 좀처럼 하지 않는 ‘깜짝 방문’을 강행했던 겁니다. 그렇게 ‘앤니소동’을(?) 한바탕 일으킨 후 에이든과 에밀리는 할머니가 건네준 빵을 받아 들고는 세상 행복한 얼굴이 됐습니다.
우리는 딸아이 집 현관 앞에서 2분 남짓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는 이내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문득 찾아왔다가 집안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돌아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짧은 만남이 이상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는지 녀석들도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딸아이도 딸아이신랑도 집안으로 들어오라 했지만 우리의 원칙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뽐이 뽀뽀!” 하면 입술을 쭈~욱 내미는 에밀리표 뽀뽀를 한번 받고는 “뽐이, 한번 더!”를 외쳐서 앵콜(?)뽀뽀까지 받았습니다. 에이든과는 사나이의 감성이 담긴 뜨거운 허그를 한번 했습니다.
“안녕가세요!” 우렁차게 들리는 에이든의 인사와 고사리 같은 손을 연신 흔들며 “빠바!”를 외치는 에밀리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서 아른거렸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아니 집에 와서도 그 감동이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전혀 할머니 같지 않고 언니 같아서 뽐이가 ‘앤니’라고 부르는 거 아니야?” 우리 집에 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갑니다.
그러고 보니 에이든은 말이 참 많이 늘었습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이 좀 늦는 것 같은 두 녀석이지만 문득문득 촌철살인으로 터져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그야말로 귀염덩어리입니다. 에이든은 이제 자신의 의사표시를 어지간히 잘 합니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 갖고 싶은 것에 대한 표현도 거리낌 없이 해냅니다.
특히 지 할머니한테는 이것저것 갖고 싶은 선물목록을 자연스럽게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 집에 놀러 온 녀석이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다고 리스트(?)를 나열했는데 아내가 웃으며 “큰일 났다. 에이든 선물 많이 사주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데…”라고 혼잣말을 했더니 갑자기 녀석이 또렷한 목소리로 “할머니, 돈이 필요해?” 하는 바람에 우리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자아이들은 말이 더 빠르다지만 지 오빠를 닮아 역시 말이 늦는 에밀리는 짧게 짧게 이어지는 행동과 말이 또 다른 예쁨을 자아냅니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두 녀석이 만들어내는 귀엽고 앙증맞은 말들이 우리 행복의 사이즈를 더 크게 만들어줄 겁니다.
‘앤니소동’이 있은 다음날 오후에는 이스트우드의 단골미용실에서 지 엄마와 나란히 앉아 머리를 하고 있는 딸아이를 보면서 또 다른 종류의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소소한 것들이 제가 원하고 바라는 참 행복이라는 생각에 가슴 한 켠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한 움큼 솟아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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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