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와 평론가가 진행하는 팟케스트 방송을 듣는 중이었다. 한 여성 패널이 집안 살림하는 시간을 줄여서 글을 쓰고 싶다며 인공지능 로봇이 빨리 보급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모 리서치에서는 못된 며느리보다 인공지능 로봇 며느리가 나을지 모른다는 답이 50%를 웃돌았다. 세상이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변하고 있는 중이다. 나또한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원고지에 글을 쓰며 자란 세대지만 지금은 폰으로 활자 치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리한 걸 보면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온니, 온니!’
직장동료 패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이다. 패니는 칠레인 남편을 둔 인도네시언인데 한국 드라마 마니아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배운 한국 문화에 대한 조예가 제법 깊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냥 장난처럼 온니, 온니 하더니 ‘언니’라는 호칭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알고부터는 더 살갑게 군다. 그녀가 영어 문장에 외마디 한국말을 섞어 쓸 때면 눈매가 유난히 가늘어지면서 눈가에 애교가 넘친다. 덕분에 그녀와 나는 아주 가까워진 느낌이다. 남편의 콤플레인까지 감수하며 해물탕, 된장찌개, 김치찌개, 빈대떡, 비빔밥에 청국장까지 식탁에 올린다는 패니, 한국 드라마의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의아해진다.
1.5세대 필리피노 그레이스의 배우 이민호에 대한 사랑도 몇 년째 지속 중이다.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가 있다는 것을 나는 그레이스를 통해 처음 알았다. 대화중에 남자 주인공 이름이 나오기라고 하면 그녀의 눈은 별이 되고, 볼은 핑크빛 복숭아가 된다. 갑자기 올라가는 입 꼬리 때문에 사각턱 모서리가 일그러지면서 얼굴 모양이 하회탈처럼 되곤 하는데, 그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화제에 올리는 통에 그녀가 가끔은 귀찮아 질 때가 있다.
홍콩에서 온 대학생 메들리도 만만치 않다. 그녀는 내게 질문 공세를 계속해대더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호칭 중 오빠, 누나, 아줌마, 언니, 이모, 삼촌, 아저씨 등에 대한 분석을 마쳤다. 오빠가 남편이 된다는 헷갈리는 의미도 갈래를 잡았다. 그리고 ‘사랑해’와 ‘좋아해’의 차이도 구분 할 줄 알게 되었다.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한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우연히 일본 작가 사노요코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암 선고를 받고 죽기 직전까지 일기처럼 쓴 그녀의 글에는 한국드라마 예찬이 통통 튀는 노래마냥 경쾌하게 펼쳐지고 있다. 사노요코는 목이 한 쪽으로 돌아갈 정도로 한국 드라마 보기에 빠져 있었다. 점원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한국 드라마 DVD를 구입하는데 열을 올렸다. 일생을 마감하는 힘든 시기에 그녀에게 가장 위로가 된 것이 한국 드라마였던 것이다. 그녀는 거기에서 행복을 만끽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평온을 얻었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의 어떤 점이 죽음을 앞 둔 66세의 유명 작가를 행복이란 황홀경에까지 빠지게 한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녀의 답은 ‘그냥’ 이었다. 좋아하는 감정에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따라 같이 울고, 같이 웃다 보면 어느새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굳이 단어를 만들어 표현하자면 ‘정’과 ‘집요함’ 정도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대답하는 ‘그냥’이 품고 있는 범위는 간단치 않다.
나와 같은 아줌마들에게는 미처 다 써보지 못한 감정들이 있다. 그녀가 말하는 아줌마들은 그 자리가 메말라 버렸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존재들이다. 메마른 마음자리에 감성의 비를 콸콸 채워주고, 삶을 촉촉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바로 한국 드라마에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욕구를 채워준다. 그것은 ‘엄마’나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다가 잃어버린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일깨어주는 힘이기도 하다. 한번쯤은 꿈꾸어 보았지만 꿈으로만 존재했던 것들. 억제와 절제를 미덕으로 살아온 보편적 아줌마들의 감정 분출구 같은 것들. 나또한 그런 달달함에 끌려 한국드라마에 열을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개연성 없는 주제와 값싼 감정 노출을 비웃으며 곧 멀어졌었다. 솔직히 그런 사랑을 하기엔 너무 멀리 와있는 나이이니 부러 외면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웃어본다. 입 꼬리가 올라가는데 미간이 찌푸려진다. 제 때에 웃고, 제 때에 울지 못하면서 잘못 발달한 표정 근육 때문인 것 같다. 속 편하게 실컷 눈물을 흘려 본적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타국살이를 하면서 행여 주저앉게 될까봐 감성적인 것들을 일부러 차단하고 살았다. 맘 놓고 감정을 부리다가 그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것만 같았다. 웬만한 시련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엄살이야, 라며 자신에게 미리 타박을 놓곤 했다. 타인을 향한 슬픔이나 연민 따위도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할 문장의 형용사처럼 기피하고 살아온 세월들이다.
좋다, 싫다 등의 표현을 아끼다 보니 이제는 언어를 잃어버린 말더듬이가 된 듯하다. 주변의 관계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보편타당한 감정들만 표현하다 보니 내가 로봇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제 때에 흘려야 할 눈물과 제 때에 표현해야 할 노여움이다. 그리고 웃어야 할 때에 맘껏 웃는 일이다. 자연스러운 감정 주름선 하나하나가 아쉬운 이때에 로봇이라니.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어느 결에 온라인이 일상 대화의 기본 창구가 되어버렸다. 어제는 취소된 모임을 위한 영상 체팅 창을 열기 위해 한나절을 소비했다. 이런 추세라면 인공지능 로봇의 대중화는 시간문제인 것 같다. 로봇의 시중을 받으며 보내게 될지 모를 말년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뉴스 사이트로 달려가던 커서를 한국 드라마 사이트로 빠르게 옮긴다.
유금란 (수필가·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산문집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