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저는 갑작스러운 ‘의기투합’을 좋아합니다. 물론, 둘 다 어디론가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둘 중 하나라도 귀찮아하거나 내키지 않아 한다면 곧바로 ‘나가리’가 될 수 있는 걸 우리는 늘 100% 합의를 이뤄내곤 합니다.
답답하고 무료한 일요일 낮 시간, 집에 있어봤자 하루 종일 ‘TV 멍’이나 때리고 있을 게 뻔한 상황… 우리는 전격적으로 ‘쿠지비치 (Coogee Beach) 탐사’ 합의를 봤습니다. 집에서 입고 있던 차림 그대로에 모자만 하나씩 꾹 눌러쓰고 우리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시드니에 24년째 살고 있으면서도 그 유명한 쿠지비치엘 한번도 안 가봤다는 건 극심한 게으름과 무심함의 발로였습니다. 그 옛날(?)엔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돼버린 UBD를 일일이 들여다보며 다녀야 했지만 지금은 세상이 좋아진 탓에 스마트폰 구글맵에 ‘쿠지비치’를 입력했더니 친절한 한국인청년(?)이 또렷한 한국말로 상세한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27km, 30분 정도를 달리니 가슴이 탁 트이는 쿠지비치가 두 팔을 활짝 벌려 우리를 반겨줬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비치들을 다녀봤지만 이곳은 특별히 좀더 예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입추의 여지 없이 꽉꽉 들어찬 주차장에 들어서는데 맘 좋게 생긴 호주인 아저씨가 자기가 지금 나갈 거라며 씽긋 웃어 보였습니다. 운수 좋은 날입니다.
그렇게 손쉽게 주차를 마친 후 우리는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쿠지비치를 영접했습니다. 호주국기와 나란히 펄럭이고 있는 원주민기가 인상 깊게 다가왔고 저만치의 ‘Racism NOT Welcome’을 담고 있는 거리의 표지판도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비가 살짝살짝 뿌리다 말다 하고 바람도 만만치 않았지만 쿠지비치를 즐기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쿠지비치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있던 우리는 쿠지비치 해안산책로 (Coogee Beach Coastal Walk)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북쪽으로 조금 올라갔더니 2002년 10월 12일 발리 폭탄테러로 희생된 호주인들을 추모하는 작은 공간이 조성돼 있었고 그 아래로는 Giles Baths라는 이름의 록풀 (Rock Pool)이 마련돼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쭉 따라 북쪽으로 6km를 올라가면 본다이비치로 이어진다는데 그 코스는 나중에 택하기로 하고 우리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잘 포장된 시멘트 길과 팀버 길로 이어지는 코스… 그렇게 남쪽으로 4.9km를 내려가면 마로브라 비치에 닿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둘 다 집을 나설 때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걷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코스가 평탄하고 순했습니다. 애초에 트레킹을 작정하고 나온 게 아니었기에 우리는 8000보 정도를 걷고는 다시 쿠지비치를 향해 돌아섰습니다.
곳곳에 햇빛 또는 비를 피하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탁들은 물론, 바비큐 시설들까지 잘 갖춰져 있었는데 곳곳마다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운 좋게 우리 차 바로 옆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케이마트 (K mart)에서 6불을 주고 산 비닐 테이블보를 처음으로 활짝 펼치고 우리의 늦은 점심 혹은 이른 저녁을 차렸습니다.
언제 준비를 했는지 아내는 컵라면 두 개와 흰쌀 밥과 김치 그리고 맛있게 조미된 김까지 완벽한 한 상을 차려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믹스커피 한잔까지…. 게다가 고맙고 희한하게도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서 아마추어 기타동호회쯤으로 보이는 열한 명의 남녀가 하모니카를 곁들인 기분 좋은 기타연주와 노래를 계속해 우리의 디너쇼를 더더욱 특별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줬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나이 들수록 우리 둘밖에 없어. 우리,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자….” 뒷정리를 모두 마친 후 아내와 저는 다시 두 손을 꼭 잡은 채 고마운 쿠지비치를 걸으며 새삼스런 다짐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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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