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조식품

미리 말해둘 것이 있는데, 나는 건강보조식품사업과는 정신적, 물질적, 이해충돌 그 어느 것과도 전혀 관련이 없다.

나의 유년시절을 잔잔하고 따스한 가슴으로 품어주던 분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내 어머니였지만, 내가 성년기에 들어서면서 비틀어진 무리들과 어울려 방황하고 고뇌할 때 손 내밀어 나를 붙잡아 이끌어주던 분은 내 둘째 형님이다.

싸움으로 피투성이가 돼 도둑고양이처럼 나의 작은 세상인 다락방으로 숨어들어 잠들어 있으면, 언제 올라왔는지 내 곁에 앉아 묵묵히 따뜻한 물수건으로 상처부위를 다독여주던 분이다.

희망도 없는 공부라는 걸 때려치우고 장사라도 배워 돈을 벌겠다고 하자, 돈 벌기 전에 공부부터 더하라며 뺨을 때려 대학입학시험준비를 하게한 것도 그분이다.

폐를 앓으면서 아이들 가르쳐 모은 돈으로 대학입학금을 마련해준 분도 그분이다. 입사시험에 합격했을 때 내 머리를 두 팔로 감싸고 눈물 고이던 분도 그분이다.

고국을 떠나올 때 공항에서 이별의 말 한마디 없이 내 눈만 쓸쓸하게 쳐다보던 분도 그분이다. 낯선 나라에 와서 안정하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던 것도 그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움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 힘들다.

이민 와 살면서 나는 늘 그분에게 무엇이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마땅하게 보낼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분의 전립선이 시원치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전립선에 도움될 수 있는 걸 찾아봤다.

그리고 추천 받은 것이 건강보조식품이었다. 효능을 믿지는 않았지만 특별하게 달리 보낼 것도 없어 그거라도 열심히 보내기 시작했다. 은혜와 감사함에 대한 마음으로 선택한 것이 생뚱맞게 건강보조식품이 돼버린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어느 날 그분이 전화했다. “야, 니가 보내주는 그 건강보조식품 말이다. 좋은 것 같더라. 이번에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전립선이 놀랍게 좋아졌다는 거다. 나는 다른 치료약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니가 보내주는 그 건강보조식품만 복용하거든. 의사에게 말했더니 계속 복용하라고 그러더라. 고맙다.” 그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실렸고, 밝았고, 가벼웠다. 보낼 것이 그것밖에 없는 것이 마음 아프고 미안했다.

내 몸뚱이에 붙어있는 두 눈 중에 하나는 시력이 제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눈이다. 그러니 남은 하나가 둘이 할 일을 혼자 하느라고 걸핏하면 시름시름 앓는다.

원래 제 할일 못하는 놈 곁에 있으면 애먼 놈만 죽어나는 거다. 좀 쉬게 해주면 좋으련만 잠시도 놔두지 않고 책 읽고, 자판 두드리고, 인터넷 보면서 부려먹는다. 뒤늦게 뭘 익히고, 뭘 쓰고, 뭘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외줄 타는 광대처럼 왜 그리 피곤하게 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거의 언제나 눈은 피곤함에 시달렸다. 그 모습이 걱정스러웠던지 아들이 눈에 좋다는 건강보조식품을 사다 줬다. 쓸데없는 것에 돈 쓰는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정성이 고마워 복용하기 시작했다.

한 두 달 지났을까? 눈의 피곤함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일주일을 주기로 새벽녘이면 따끔대던 증상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연이겠지.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이 지났는데도 눈 상태는 편안함이 지속됐다. 분명한 것은 그 건강보조식품을 복용하기 전까지 내 눈은 불편한 증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는 거다.

나는 건강보조식품의 효능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내 돈 들여 구입해서 복용한 적이 없다. 아들이 사다 준 건강보조식품이 내가 처음으로 복용해본 것이다.

나는 건강보조식품이란 적당히 값싼 원료로 대충 만들어 건강에 유난스러운 사람들에게 팔아먹는 것이며, 오래 살고 싶어 안달이 난 노인네들 모아놓고 기똥찬 구라 풀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덤터기 씌우는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이걸 어쩐다? 이젠 하찮은 것이 아니라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을 바꿔야 될 것 같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실제 효과인지, 우연인지 단언할 순 없지만, 내 형님도 나도 효과가 있다고 느껴지니 말이다.

그래 맞다. 세상만사 겪어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과유불급 (過猶不及)이라고 뭐든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믿고 살아가는 것이 편안한 삶 아닐까?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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