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판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개새끼, 개판, 개지랄, 개싸움, 개 같은’ 등의 말이 정작 당사자인 개들에게는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뭐, 개를 향해 그 같은 표현을 쓰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해석도 있기는 하지만 좋지 않은 일에 빈번히 우리에게 좋은 반려자가 돼주고 있는 개를 등장시키는 게 왠지 좀 껄끄럽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아니, 똥 왕창 묻은 개가 조금 덜 묻은 개와 엉켜서 한바탕 개싸움을 벌인 최근의 한국 정치판을 보면서 참 개판, 가관이라는 생각을 자주 가졌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국민을 찾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던 그네들의 실제 모습은 제 밥그릇 챙기기, 제 편 감싸기, 상대편 깎아 내리기, 공약 마구마구 내뱉기 등으로 점철됐습니다.

이제 지들끼리 찧고 까불리는 한 차례의 개싸움(?)이 끝났으니 다음 선거 전까지는 그들이 재래시장을 찾아 상인들의 손을 붙들고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시장음식을 꾸역꾸역 먹어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시장바닥에 혹은 아스팔트길 위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는 모습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번번이 당하고 속아왔으면서도 어찌 선거 때만 되면 까맣게 잊고 똑같은 바보짓을 반복하는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치하는 자(者)들은 다 ‘그 놈이 그 놈’ 같은데 속고 속고 또 속아도 반복되는 흐름이 그저 신기하기만 합니다. 여당이 됐든 야당이 됐든, 어떤 놈이 됐든 그저 밥 먹고 살기 좋게만 해주면 될 텐데 저들에게는 그 같은 생각이 애초부터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 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 친숙했던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입니다.

지난주 목요일 밤, 한국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펜을,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일제에 맞섰던 그는 열일곱 차례의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1년 반 남짓 앞둔 1944년 1월 16일 새벽, 채 마흔이 안된 나이에 눈을 감았습니다. 옥중에서 눈을 부릅뜬 상태로 코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둔 이육사 시인은 “아무 걱정 말고 가시오. 조국의 독립은 후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편히 가시오”라며 눈을 세 번 쓰다듬자 그제서야 겨우 눈을 감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날 방송을 보며 새삼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육사 시인의 본명은 원록 (源祿)입니다. 그러한 그가 우리에게 이육사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해진 이유는 그가 일제가 부여한 자신의 수인번호 264에서 스스로의 필명을 따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육사 시인이 사후에 남긴 유품은 만년필 한 자루와 마분지 한 장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마분지에는 유언대신 이육사 시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 ‘광야’가 적혀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국민과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면서도 자나깨나 제 밥그릇 챙기기, 제 편 감싸기에 바쁜, 못된 정치하는 자(者)들이 이육사 시인이 간절히 소망했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못 되더라도 손톱만한 깨우침이라도 있어주기를 기대하며 ‘광야’를 공유합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나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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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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