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 끝난 ‘결과’에만 주목하며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밀어 부치기도
사실은 우리가 가장 포기하기 힘든 것이 우리가 정말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자신이 정말 간절히 원했던 것이 끝끝내 실패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간절하게 바랬던 것이 ‘실패’로 끝난 ‘결과’에만 주목하고선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밀어 부치기도 합니다.
01_자살은 죽음을 택할 만큼 큰 ‘용기’가 있어 행하는 것 아니야
오늘, 너무나 안타깝고도 슬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떤 분의 자살 소식입니다. 사실 저는 그분을 딱 한번 본 것이 전부입니다. 그분의 성향도 개인적인 디테일들도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참 선한 인상을 가졌던 분이라는 것, 그것이 제가 그 분에 대해 알고 기억하는 전부입니다
자살이란 단어를 접할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시나요? “죽을 용기가 있다면 차라리 사는 길을 택하겠다.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도 몰라?”
과연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것을 살아갈 용기로 전환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 자체가 오류입니다.
자살은 죽음을 기꺼이 택할 만큼 큰 ‘용기’가 있어 행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더는 감당할 수 없어 죽음으로 그것을 끝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02_한국과 비교해서 호주에서는 자살할 이유가 없어야 맞는 걸까?
즉, 자살이란 ‘죽음’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두려움을 이길 만큼 큰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곳 호주에서도 청소년의 자살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호주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교민들 중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니 호주처럼 easy going 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청소년들이 자살을 많이 한다고? 그럼 한국에 사는 애들은 전부 다 자살하고도 남겠네! 참 나….”
이렇게 어이없어 하는 분들도 저는 여러 번 뵈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정말 지상낙원과 다를 바 없는, 특히 한국과 비교해서 호주에서는 자살할 이유가 없어야 맞는 걸까요?
03_고통의 크기는 다른 사람 것이 내 것보다 작다고 단정지을 수 없어
고통의 크기는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이 내 것보다 작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처해져 있는 환경과 조건에서 오는 고통에 비해 네가 지닌 고통은 정말 별거 아닌 거야”라고 말한다는 것은 감히 폭력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혹 이런 ‘폭력’을 나는 오늘도 내 아이에게 행사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내가 가진 가치관, 세계관, 믿음에 따라 정해 놓은 틀, 결코 내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 틀, 그 틀에 내 아이가 잘 순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해서 오늘도 좌절하고 계신 분이 있으신가요?
사실은 우리가 가장 포기하기 힘든 것이 결국에는 우리가 정말 원했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기사제공: Psychotherapist 천종원 (0410 189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