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앞마당 화단에 몇 달째 3미터가 넘는 기다란 목을 늘어뜨리며 장하게 피던 용설란꽃이 다 지고, 마른 대만 남아 매달려 있다.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꽃을 피우던...

추석 2020

-경에게    작은 오두막에서 기억이 자란다 끓는 연탄불에 물솥을 올리고 외출 나갈 작은 오빠 운동화 두 짝을 솥뚜껑 위에 엎어놨다 따뜻해진 발은 이미 청군이 되어 서울역이나 남산까지 한달음에...

희미하게 살해 충동이 느껴지는 발라드 (단편소설 연재)

아내가 자살했다. 스스로 손목을 그었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혈액 바다에 그 동안 복용해 오던 ‘침팩스’ 캡슐들 그리고 보드카가 병째로 뒹굴고 있었다. 전선 절단용 칼은 시신...

우는 신발

- 진학 형에게     하늘은 울 일이 없어 이 땅에 울다 가는 거다 다 울고 오라는 세상 얼굴 내밀며 울지 않으면 엉덩이를 맞는 거야 울러 왔다는 거 잊지 말라고 그래서 피카소도 열심히 그린 우는 여인   나는 소리 내어 울고 있는 신발을 본 적이 있지 하늘에 줄 하나 걸어놓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떠나는 맨발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는 가지런하고 어여쁜 구두를 보았지 울지 않으면 미치고 만다고 우는 아이들이 모여 평화스러운 골목 팀 스프리트 바람이 한참이던 양평의 들판 선아였던가 2월의 외딴 집 열다섯 소녀의 몸속으로 밀고 들어온 검은 구름 그때 울 수 있었으면 바람은 지나가는 거라고 수근 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쉬쉬거리는 힘없는 아비를 붙들고 울었더라면 그 뜨거운 맨발이 눈발 가득한 들길을 피해 갔을까   태어나는 것은 모두 아프다고 풍진 세상이 안타까워 예수도 그렇게 울었던 것을 얼굴을 내밀며 울지 않는 아이 그래서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거야 신발 하나 가지런히 놓이기까지 세상은 아픈 거니까 어서 울라고 울어야 견디는 거라고     김 오 (시인·시동인 캥거루 회원)  

희미하게 살해 충동이 느껴지는 발라드 (단편소설 연재)

넌 나한테 죽은 사람이야. 넌 죽었어. 난 차갑게 미소 짓는다. 라이플엔 내 심장보다 뜨거운 블릿이 곧 장착될 것이다. 팔을 뻗어 가방을 확인한다. 라이플 부품이 담긴...

꽃봉오리

얘들아 내 말 좀 들어줄래? 내가 왜 평생 혼자 사는지 아이도 못 낳는지   원래 난 예뻤거든 그날 그 일본 순사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보내려던 집에 시집갔더라면 일본가는 그 배를...

norfolk island*

섬의 길이 열리다   수평선을 넘고 넘다 고향 길 잃고 가족 친구까지도 잃어버린 나비 날개 찢어지는지도 모른 채 108배 넘는 pine tree로 기어올라 섬의 길이 열리다   섬 푸르러 이 곳을 침범한 불나방 나비의 심장...

잎 관 ㅡ마운틴 윌슨에서

늦은 여름날 장례식장 태양이 아직 머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때   죽은 줄 알았던 유칼립투스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끌어올리는 것   살아 돌아온 전사처럼 숯덩이 자신들만의 비법으로 불면을 태우고 심장을 열어젖히고 겹겹의 옷자락에 얹혀진 혈관 터진 사이...

땅에 내리고 싶어요

나는 게으르다. 팀을 따라 떠나는 단체 여행을 엄두도 못내는 이유다. 그런 내가 매년 1월1일이 지나면 여행을 떠난다. 전세계를 들썩이는 휴가가 끝난 직후는 가격도 저렴하지만...

스마트폰 3

ㅡ중독     생각을 묻는다 손안에   들여다봤을 뿐인데   일상의 틈새를 메우려 반려 했을 뿐인데 따로 두었다가도 요술램프 지니를 부를 수 있어 옆에 두었을 뿐인데   만나고 헤어지기 싫어 가까이서 속닥였을 뿐인데   정들어 버렸다   이젠 거리를 두는 만큼 다가오는 상사병     송운석 (시인·캥거루문학회원·2017년...

이번 주 온라인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