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크리스마스

사라진 과거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진 과거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내 어릴 적 놀이터와 동무들은 다 어디로 갔지… 더듬어 가본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내 기억 속의 과거일 뿐이었다.

이상 기온으로 블루마운틴에 눈이 내렸다. 미미한 자연피해가 있는 가운데 올해는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어 기쁨에 들뜬 사람들이 있다.

호주의 겨울 한가운데 7월이면 블루마운틴 카툼바에서는 ‘7월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린다. 유럽에서 건너온 아일랜드 죄수 출신 노년층이 만든 이색문화로, 흰 눈과 함께 크리마스를 즐기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노스텔지어를 풀어내는 파티이다.

어느 폭설 내린 성탄절 이브, 교회에서 캐롤송을 부르고 집으로 돌아가 난로 옆에서 칠면조를 뜯으며 꾸었던 꿈을 기억해내는 그들만의 의식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그때 뽀얀 눈길을 걸으며 몇 십 년 뒤, 남반구의 고립된 섬 호주라는 커다란 땅에서 뜨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어쩌면 고향 떠난 이민자들에게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가두어두었던 꿈 상자를 여는 일처럼 설레고 아름다운 말인지 모른다.

내 유년기와 청년기의 겨울은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미처 11월 달력을 떼기도 전에 12월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성탄전야 축하잔치 계획이 발표되면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느 땐 무엇인가 툭 떨어지는 소리였고, 어느 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 듯 몽실거리는 소리였다.

교회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수업이 끝나면 바로 교회로 모였다. 선생이라고 해야 고만고만한 청년들이었기에 어른들 빼고 다 모이는 셈이었다. 우리는 합창, 합주, 성경 암송, 연극 등을 준비하면서 12월의 날들을 장식했다. 연습 틈틈이 중앙에 자리한 난로에 둘러서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직 열지 않은 희망 상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눈동자가 성탄나무 꼭대기에 달린 왕별처럼 반짝거렸다.

노래에 젬병인 나는 주로 남자아이와 짝을 이루어 사회를 보거나 연극을 했는데 소품을 만들고 대사를 맞추며 깔깔거리느라 정작 무대에 오르는 날은 재미가 덜했다. 성탄전야, 교회당은 이웃들과 이모 삼촌까지 함께한 가족들로 빼곡했다. 웃음과 눈물을 나누며 감동과 환희의 순간을 보내고 손님들이 돌아가고 나면 진짜 우리들만의 성탄파티가 시작되었다. 선물돌리기를 하고 게임을 하며 새벽송을 기다리는 시간은 꿈처럼 달콤했다.

새벽송은 성탄의 절정이었다. 새벽이라지만 아직은 먼동의 기미도 없는 혹한의 밤중, 제 몸보다 더 큰 자루를 조별로 하나씩 들고나선 우리는 지칠 줄 모르는 용사들이었다. 발목 높이쯤 쌓인 눈밭을 털모자, 장갑,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돌리고 눈만 빠꼼히 내보인 채 돌던 그 길, 흰 눈에 반사되는 푸른 달빛을 밟으며 잡아주고 밀어주며 걷던 그 눈길은 미래로 가는 내 삶의 이정표처럼 아득했다.

얼추 마지막 집을 돌 때쯤이면 과자와 라면, 사탕, 센베이, 귤 등으로 꽉 찬 자루는 기운 좋은 청년들의 어깨에 걸쳐졌다. 저마다 으쓱거리며 교회 마루에 풀어놓으면 마치 헨델과 그레텔의 마법의 집처럼 황홀했다.

교회학교 아이들을 위해 선물 봉지를 만들며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행복했고, 사찰 집사님이 끓여주신 성탄 새벽 떡국은 고기 한 점 들어있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 좋은 먹거리였다. 유일하게 외박이 가능했던 일년 중 단 하루, 밤을 꼬박 새운 탓에 정작 성탄예배에서는 여기저기 고개를 박고 자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눈총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내가 유년기를 보냈던 그 교회는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터라도 밟고 싶어 가보았지만 지형마저 변해 찾을 길이 없다. 근처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 보았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추억할 만한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그 눈길을 함께 걷던 친구들 또한 지금 뿔뿔이 흩어져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상자에 들어 있던 희망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처럼 깊이 가두어놓고 그냥 묵혀두고 있는지, 아니면 너무 미리 열어 세상을 피곤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7월의 성탄트리를 만들고 싶어 먼지가 뽀얗게 쌓인 크리스마스 장식 상자를 연다. 해묵은 장식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바닥에서 내 희망 하나가 버둥거리고 있다. 아이들이 크면서 장식이 많이 줄었다. 천장을 닿던 소나무도 어느 해인가 벽 중간쯤으로 내려왔다.

아이들에게 꿈을 너무 빨리 거두어들인 게 아니었나 싶어 가슴에서 뭔가 또 툭 떨어진다. 곁을 맴돌던 아들이 소나무를 큰 것으로 바꾸자고 한다. 귀가 번쩍 트인다. 머리가 커가면서 성탄 소나무 따위엔 관심이 없던 아이다. 비록 갇힌 듯 답답한 현실일지라도 그 시절 희망을 걸던 12월을 기억하며 소나무라도 큰 것으로 바꾸어야겠다.

혹시 태평양 건너 어디에선가 새벽송을 같이 돌던 친구 하나, 왕별처럼 빛나던 내 눈동자를 기억하고 ‘네가 그때 꿈꾸던 희망이 여기 있다’ 푸른 달빛에 실어 달아주고 갈지 누가 알겠는가. 시드니에서 7월의 크리스마스는 지나간 꿈 상자를 다시 여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다.

 

유금란 (수필동인 캥거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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