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여행의 반전

고통과 엇갈림이 많았던 관계… 그 관계설정에 긍정적 반전이 자주 일어나기를…

1875년 일본 군함이 부산을 거쳐 강화도를 공격하면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교섭협상이 시작된다. 조선 내 일본인 범죄자는 일본관리가 처리한다는 치외법권을 비롯하여 일본이 조선해안을 마음대로 항해하며 지도를 작성할 수 있다는 조항 등 일방적인 내용이 많았다. 이 협상에 참여한 일본측 수행원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조선은 마치 깊은 산속에 있는 것과 같아 국외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01_이때부터 한국 근대사는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 인천 그리고 원산을 단계적으로 개항한다. 이때부터 한국 근대사는 한번 생긴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계속 덧되는 상황으로 점철된다.

이 조약은 조선군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연무당 (鍊武堂)에서 체결되었는데 이 연무당 옛터는 강화산성 서문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은 비석과 안내판만 덩그러니 있는 공터다.

바로 옆에 놓인 큰 도로로 인해 가슴 아픈 역사를 사색할 여유가 없었다. 이런 먹먹한 가슴을 안고 일본 오사카 (大阪)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의 저가항공 피치 (Peach)로 간사이공항 2터미널에 도착했다.

최근 일본으로 오는 해외여행객들이 대폭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간사이공항은 북새통이었다. 입국심사를 위해 줄을 서있자니 대부분이 중국 사람들이다. 특히 초등학교 자녀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은 것을 보고 그 원인이 사뭇 궁금했다.

아마 오사카에서 유명한 테마파크인 유니버설스튜디오에서 영화 속의 환상을 아이들에게 직접 체험하게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지 않을까? 순조롭게 입국 수속이 끝나자 나는 서둘러 순환버스를 타고 공항 1터미널로 갔다.

 

02_금각사를 안 보고는 교토에 다녀왔다는 말하면 안 된다?!

터미널 바로 밖에는 목적지인 교토 (京都)로 가는 심야버스가 있어 다행이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교토로 가는 승객들이 많아 나는 버스 한 가운데에 설치된 간이의자에 앉아 가야만 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훨씬 지났지만 로비에서 보이는 인공적인 정원과 폭포가 피로를 풀어주었다.

교토에 와서 ‘금각사 (金閣寺)’를 보지 않고는 교토에 다녀왔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니 다음 날 아침 금각사를 찾아갔다. 호텔측으로부터 버스 타는 곳을 설명 듣고 한 블럭을 걸어가 사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찾았지만 표지판에는 금각사로 가는 버스의 번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

난감해하던 중 마침 관광을 온 한 무리의 한국 여학생들이 버스 정류장으로 다가와 나는 주저 없이 도움을 청했다. 전화기에 있는 앱을 이용해 열심히 찾던 학생이 알려준 곳은 사거리의 모퉁이를 돌아 바로 근처에 있던 다른 버스 정류장이었다.

불과 40미터 거리에 있던 또 다른 정류장을 못보고 헤맨 셈이었다. 버스를 타자마자 혼자 금각사를 향하는 한국청년을 만나 도착할 때까지 쉼 없이 정보를 주고 받았다. 다니던 직장에 과감히 휴가계를 내고 며칠 혼자 일본여행을 온 한국청년의 결정을 듣고 보니 대한제국 시절 바깥세상의 동향에 어두워 국권을 상실했던 시절이 새삼 떠올라 청년이 대견해 보였다.

입장시간까지는 조금 일러 입구에서 기다리는데 곧이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단체로 왔고 거기에 몰려든 많은 관광객들로 금각사 입구는 금새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03_내 생애 이렇게 찬란한 외형을 가진 건물을 본 적은 없었던

매표소에서 돈을 지불하고 경내로 들어서서 조금 걷자 금세 호수 너머에 황금으로 치장을 한 금각이 저 멀리 산을 배경으로 갑자기 나타났다. 모퉁이를 돌자 이렇게 순간적으로 고혹적인 자태를 지닌 건물이 나타나도록 길을 만들어 놓은 것도 상업적인 발상일까… 혼자 생각에 잠겼다.

내 생애 이렇게 찬란한 외형을 가진 건물을 본 적이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 순간을 놓칠세라 수많은 군중을 뚫고 가장 사진이 잘 나오는 자리에서 좋은 각도를 잡아 여러 장을 찍었다.

3층 누각으로 된 금각은 경호지 (鏡湖池)라는 거울 못에 투영되어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나고 있었다. 금각에서 받은 감흥을 간직한 채 순로 (順路)라는 표지판을 따라 경내 답사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저녁 (夕)에 이곳에서 바라보는 금각이 아름다워 (佳) ‘석가정 (夕佳停)’이라고 명명된 야트막한 언덕길 위에 지어진 다실을 만났다. 해가 지는 저녁까지 머물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한낮에 석가정에서 바라보이는 금각의 옆모습도 아름다웠다.

다음 행선지는 교토의 남쪽에 위치한 우지 (宇治)시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뵤도인 (平等院)’이었다. 일단 우지 지역은 좋은 토질과 물로 인해 양질의 녹차가 많이 생산되는 차의 고장이다.

 

04_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도 있으니 우지시는 우리 역사와 맞물려

우지강에 놓인 우지교를 건너면 바로 뵤도인이 나온다. 그리고 이 우지강에서는 가마우지 새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또한 우지교는 아주 오래 전 고구려 스님이 와서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곳 강변에서 놀러 온 친구들과 같이 생애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고 하는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도 있으니 우지시는 여러모로 우리 역사와 맞물려있는 셈인가? 외국인들과 함께 하는 그룹투어로서 버스로 이동을 하니 이런 한반도와 관련된 일본 내의 역사적인 발자취를 개인적으로 충분히 둘러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불교 사원인 뵤도인의 주 건물인 봉황당이 일단 방문객들의 시선을 끈다. 꼬리만 해도 3미터인 봉황 두 마리가 봉황당 지붕 위에 의연히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 중당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는 지붕이 있는 복도가 있어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형태이다.

이 봉황당은 일본 10엔 동전에 새겨져 있다. 봉황당 내부는 볼 수가 없었으나 거기에 놓여진 불상과 범종이 봉상관이라는 박물관 내부에 진열이 되어 있다. 특히 범종에는 용, 천사 그리고 사자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조각이 되어 있으며 천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봉황당 앞에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일본이 수도를 나라 (奈良)에서 교토로 옮긴 때가 794년이다. 천황궁이 조성되자 그 앞으로는 4키로의 신작로가 만들어지고 그 길이 끝나는 양쪽인 동쪽과 서쪽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05_쿠카이 스님을 일컬어 ‘일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도

서쪽의 절은 화재로 없어졌지만 동쪽에 있는 절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도우지 (東寺)’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코도 (講堂), 콘도 (金堂) 그리고 5층탑이 있다.

코도 안에는 21개의 부처상이 혜안의 경지와 임무에 따라 4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콘도에는 중생의 아픈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약사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고통 받는 어두운 세상을 햇빛과 달빛으로 비추어주는 일광보살이 오른쪽에 그리고 월광보살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콘도의 지붕은 이층으로 된 이리모야 양식이었으며, 코도와 콘도 모두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로만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우지 경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5층탑은 55미터로 일본에서는 가장 높은 목재탑이라고 한다. 9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이래 네 번이나 불에 탔지만 진동을 흡수하는 독특한 설계 덕분에 지진으로는 한번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도우지가 만들어졌을 때 천황은 ‘쿠카이 (空海) 스님’에게 절을 맡기는데 이 절을 중심으로 구법, 전법 그리고 수행과 더불어 후학을 양성하여 쿠카이 스님은 일본 의 초기 불교가 정착을 하는데 공헌을 한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30대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무려 21년간이나 체류하면서 불교의 정수를 습득했다고 한다. 귀국해서는 일본 최초의 일어/중국어 사전도 만들고 시인이자 화가로서의 재능도 발휘하여 혹자는 쿠카이 스님을 일컬어 일본의 레오나드로 다빈치라고도 한다.

 

06_진짜 기생은 없었고 기모노 입고 거리 활보하는 외국인들만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지 전에 들린 곳이 기온 (祇園) 거리. 하나미코지 (花見小路)라고 불리는 거리를 걸었는데 사실 일본의 기생인 게이샤 (藝者)나 적어도 마이코 (舞子)라고 불리우는 게이샤 견습생을 직접 거리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온다.

이 기생들을 꽃으로 비유하여 ‘꽃을 볼 수 있는 작은 거리’라는 이름이 재미있다. 주로 예전 상인들이 쓰던 목조건물들이 식당이나 가게로 사용이 되고 있는 이 거리에서 진짜 기생은 전혀 볼 수 없었고 대신 기모노를 착용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외국인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다음 날 교토를 떠나기 전 아침 일찍 ‘청수사 (淸水寺, 기요미즈데라)’로 갔다. 물이 맑은 절답게 산 위에서부터 맑은 물이 세 갈래로 갈라져 내려오는 곳이 있는데 이 각각의 물은 건강, 사랑 그리고 학문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 물 하나하나를 다 마시면 오히려 복이 달아난다고 해서 조심스레 건강의 물을 마셔보았다. 또한 나무 껍질을 촘촘하게 연결하여 만들어져 흡사 기름을 바른 머리카락을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 형태의 독특한 모양의 지붕을 가진 본당은 높은 암벽 위에 있어 주변의 산과 저 멀리 교토의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절벽을 이용하여 본당 앞으로 길게 만들어진 테라스는 무대처럼 공연까지 가능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사 중이라 접근을 할 수 없었다. 이 본당 뒤편에는 신사가 있는데 그 마당에 두 개의 돌이 있다. 한 쪽 돌에서 눈을 감고 다른 쪽 돌까지 무사히 걸어가게 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마침 이곳을 방문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07_다다미 수 천장을 깔아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센조지키라…

교토에서의 일정이 끝나자 나는 남쪽의 오사카에서 나머지 일본 일정을 보낼지 고민을 했다. 아무래도 도시 냄새가 짙은 오사카보다는 자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오사카 남쪽의 와카야마 (和歌山)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이 와카야마도 지나쳐 더 남쪽으로 내려갔다. 내친김에 바다에 포위된 시라하마 (白浜)까지 간 것이다. 순전히 계획에 없는 일정을 만든 셈이다. 물론 며칠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토에서 시라하마까지 바로 가는 고속버스가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열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는 불편을 겪었다.

 시라하마의 숙소에 도착하자 일단 ‘산단베키 (三段壁)’를 찾아 걸어갔다. 깎아지른 주상절리의 암벽이 약 2키로 정도 이어지는 해안명소다. 오락가락 하는 비에 바람까지 강해 푸른 바닷물은 전신을 암벽에 내맡겨 하얀 포말로 거듭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파도와 부대끼면서 절벽은 다양한 문신을 온 몸에 휘감고 있었다.

파도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동굴도 보고 바로 앞으로 밀려드는 위협적인 파도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절벽 아래의 내부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시설도 있었지만 대신 나는 전망대와 절벽 위 산책로를 걸으면서 망망대해를 즐겼다.

다음으로 ‘센조지키 (千疊數)’에 들렀다. 이곳은 바다와 마주하는 경사진 곳이 파도와 바람에 지속적으로 침식을 거듭하여 깎인 겹겹의 사암 지층이다. 마치 수 천장의 다다미를 깔아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센조지키라고 한다.

 

08_맑은 날 이 구멍을 통해 보이는 일몰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어찌 보면 전북 부안의 채석장을 연상케 하며 푸른 바다색에 견주어 연갈색의 계단식 사암이 대조적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일본 석양 100선에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올해 개봉된 썩 잘 만들어진 영화 ‘변산’에 나오는 노을을 떠올리면 된다.

숙소에서 점심을 하자마자 이번에는 버스로 ‘엔게츠도 (円月島)’에 갔다. 오랜 시간의 침식작용으로 바위 한 가운데에 둥근 해식동굴이 생겼다. 그 모양이 마치 엔화의 동전 구멍과 비슷한 섬이라고 해서 엔게츠도라고 불리우지만 정식명칭은 다카시마 (高嶋)인 것을 보면 수면 아래에 있는 규모까지 합치면 아마 꽤 높은 섬인 모양이다.

맑은 날 이 구멍을 통해 보이는 일몰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비도 오고 저녁까지 기다려봤자 날씨가 짓궂어 일몰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조금 걸으니 마침 족욕탕이 있어 비도 피할 겸 족욕을 하면서 엔게츠도를 바라보는데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조금 더 걸어 시라하마 해수욕장을 만나자 비에 흠뻑 젖은 몸을 바닷물에 담근다. 빗물과 짠 바닷물이 같이 문을 두드리니 내 피부 구멍들이 빗장을 열어젖힌다. 고운 백사장으로 ‘일본의 와이키키 해변’으로 불리우는 이 해수욕장은 부근에서 신선한 해산물까지 살 수 있었다.

숙소 건너편에는 버스 정류장으로 사용이 되는 제법 큰 공터가 있다. 해수욕을 하고 숙소에 들어가기 전 우연히 그곳에 있는 버스 시간표를 살피다가 오사카까지 직통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교토에서 이곳 숙소 바로 앞까지 오는 버스편도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그 고생을 했으니 뒤통수를 한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09_버스 운전사는 전광석화처럼 다시 내 앞에 나타나 호의를

즉흥적으로 행선지를 정하면 이런 실수가 초래된다. 좌우간 돌아갈 오사카까지는 내려올 때처럼 여러 번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이 없겠다 생각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다음 날 고속버스 시간에 맞추어 정류장에서 느긋하게 버스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버스가 도착했다. 그런데 아뿔싸! 버스 기사는 표를 편의점에서 미리 구입하여 타야 한다면서 탑승을 허락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구입이 당연히 되겠지 라고 생각한 내 실수였다. 아찔하고 난감했다. 통사정을 했지만 막무가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젊은 기사라 더 융통성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내 머리 속은 몇 시 기차를 타야 오사카에 최대한 빨리 도착할 것인가에 대한 계산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공터 입구를 막 빠져 나가던 버스가 갑자기 멈추었다. 내가 망연자실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백미러로 봤을까? 기사가 다시 내려 나더러 버스를 타라는 것이다. 며칠 전 절 입구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금각의 휘황찬란한 모습이 순식간에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처럼 이 버스 운전사는 전광석화처럼 다시 내 앞에 나타나 호의를 베푸는 것이었다.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표를 구입하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반전이었다.

오사카는 비에 흠뻑 젖고 있었다. 다음 날이 출국이라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서둘러 오사카 성으로 향했다. 16세기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달성한 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오사카 성은 일단 규모가 크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자를 성 주위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10_무게가 무려 100톤이 넘는 암석 하나가 방문객을 압도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성 내부에 육군부대가 주둔을 하기도 했다. 성 정문을 들어서면 성벽을 쌓을 당시 사용된 많은 암석 중 가장 크고 무게가 무려 100톤이 넘는 암석 하나가 방문객을 압도한다. 우중 속에서도 오사카 성은 관광객들로 만원이었다.

다음 날 출국시간에 맞추어 일찍 숙소를 나서 가까이 있는 전철역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간밤에 많이 내린 비로 공항 가는 전철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마침 대만에서 온 젊은이들을 만나 동변상련의 끈을 바로 연결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 방법이 최선인지 여러 가지 안을 즉석에서 상의를 하고 나서 이 젊은이가 확인한 전화상의 정보에 의해 다음 전철역까지 걷기로 했다. 그것도 빗속에 짐을 끌고서. 나는 비옷을 입었지만 짐 가방은 고스란히 비에 노출된 채로….

역에 도착해보니 역시 이곳에서도 공항 행 전철은 운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차에 출근길이 막혀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일본청년을 만나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11_더 늦게 온다는 버스는 오히려 더 빨리, 또 한번의 극적인 반전이…

선뜻 자기가 공항 가는 버스를 타는 터미널까지 안내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청년이 앞장서고 여러 명 외국인 일행은 뒤를 따라 거의 40분을 긴장 속에 걸어서 드디어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항 행 버스를 기다리느라 만들어진 줄이 너무 길었다. 비행기 이륙시간을 고려해보아도 도저히 버스로는 시간을 맞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금을 지불하고서라도 택시로 공항 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만 젊은이들도 결정을 하고 택시를 기다리는 줄로 가버렸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결정을 하기까지 한참을 궁리했다. 결국 버스로 가기로 하고 버스표를 구입하여 줄에서 기다렸다. 곧 도착한 버스는 앞 줄의 승객 대부분을 태워 출발했고 나는 다음 버스가 제 시간에만 와 준다면 문제 없을 것이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있던 일본인이 다음 버스는 한참 늦게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봤다고 하면서 내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나 다행히 더 늦게 온다는 버스는 오히려 더 빨리 도착했다. 또 한번의 극적인 반전이었다. 버스에 올라타자 긴장이 풀려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한국과 일본… 역사적으로 고통과 엇갈림이 많았던 관계다. 앞으로는 그 관계설정에 긍정적인 반전이 자주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찰스스터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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